- 김시습, 그는 왜 방랑시인이 되었나?
‘탕유(宕遊)’란 자유분방하여 모든 속박을 벗어난 행보를 말하며, ‘청완(淸玩)’은 고독한 자아가 자연에 친화하는 형태로서, 국토의 근경 및 원경이 심미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그 사람의 정서에 각인되어 자연 경물에 대한 인식이 낭만적이고 섬세한 것을 뜻한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치유와 힐링의 국토 장정이라 할 수 있다.
탕유와 청완으로 우리 국토를 순례한 방외 인문학의 시조는 신라 말기의 고운 최치원이라 할 수 있다. 그가 다니고 머물렀던 길과 장소는 모두 전설이 되고 설화를 잉태하였다. 최치원은 고대의 인물이라 그의 전설이 신비롭기는 하나, 과장되거나 견강부회한 면이 없지 않다. 그런데 여기 자신의 행적을 일일이 시로 표현하면서 스스로 전설을 만들어간 인물이 있으니 바로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이다.
그는 방외인으로 국토의 남과 북, 동과 서를 방랑하면서 수천 편의 시를 남겼다. 그의 이런 시문을 모아 엮은 기행 시집이 <매월당시사유록(梅月堂詩四遊錄)>이다. 김시습은 정처 없이 국토를 떠돌면서 괴로운 심사를 달래고 자신의 심정과 정서를 자연에 투영하며 시를 지었다. 김시습 덕분에 조선의 사대부들은 방 안에서 국토의 근경과 원경을 심미적으로 간접 경험할 수 있는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 이른바 청완(淸玩)을 공유한 것이다. 그런데, 김시습은 왜 일생을 이렇게 떠돌면서 살았을까?
우리는 매월당 김시습을 방외인 또는 기인이라 한다. 그러나, 그도 처음부터 기인은 아니었다. 김시습은 5세 때 세종대왕 앞에서 시를 지을 정도로 신동이었다. 세종께서는 김시습이 어른이 되어 학업이 성취되면 크게 쓰겠노라고 말했다. 그런데 순탄할 것으로 생각되던 그의 인생은 그의 나이 19세 때 일어난 계유정난(1453년)으로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수양대군이 어린 단종을 내쫓고 세조로 등극한 사건은 김시습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그는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삼각산에서 글을 읽다가 한양에서 온 사람으로부터 세조의 등극 소식을 들은 김시습은 즉시 문을 닫아걸고 3일 동안 바깥출입을 하지 않다가 방성통곡(放聲痛哭)한 다음에 읽고 쓰던 서책을 모조리 불살라 버리고 방랑 길에 올랐다. 조선의 큰 인재가 될 수 있었던 김시습은 스스로 시대를 등지고 자연인의 삶을 선택한 것이다. 그는 일생을 방랑하며 살았다. 울분과 저항을 시로 토해 내었다. 현재 전해오는 시가 2,200여 수이니 원래는 그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김시습은 설잠이란 법명이 있을 정도로 불교에 심취했다. 괴로운 마음을 불가에 의지하지 않고 어찌 견딜 수 있었으랴.
김시습은 일생을 방외인으로 보내서 한 줌 혈육도, 가족도 남기지 못했다. 그야말로 철두철미한 고독 속에서 늘 자신과 마주해야 했다. 사람들은 그가 생육신으로 사육신의 시신을 대범하게 매장해 줄 정도로 기개 있고 강단 있는 선비로 생각할 것이지만, 그의 친필 글을 대하면 그는 한없이 마음이 여리고 고독에 몸부림치며 살았던 평범한 남자였음을 느낄 수 있다.
훗날 선조 임금은 김시습의 이런 방외인의 기질과 인생에 관심을 가져 그의 시를 좋아했다. 그래서 그의 시문을 모아 문집을 간행토록 하였다. 시대의 이단아 김시습의 문집이 왕명으로 간행되었는데 그것이 <매월당집> 23권이다. 또한 선조는 율곡 이이에게 명해 김시습의 전기를 집필하게 하였다. 선조의 명을 받은 유학자 이이는 고민했다. 김시습은 승려 생활을 하다가 무량사 절간에서 입적했는데, 유학자인 자신에게 그의 전기를 지으라고 명하니 참으로 받들기 난망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율곡 자신이 모친을 여의고 20세 때 금강산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불도에 탐닉했다는 핸디캡을 가지고 있던 터라 왜 하필 나에게 승려 생활을 했던 김시습의 전기를 짓게 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고심 끝에 율곡이 찾아낸 묘수, 그것은 비록 김시습이 승복을 입고 절에서 기거하면서 불도를 닦았지만, 본질이 유학자였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율곡은 붓을 들어 김시습의 일생을 담담하게 써 내려갔다. 그리고 김시습의 일생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심유적불(心儒迹佛)”- ‘마음은 유학에 있었고 몸은 불가에 두었다.’ 김시습이 비록 행동은 불가의 승려처럼 하였으나 그의 마음은 유학자의 도리와 윤리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절묘한 해석이 아닐 수 없다. 그 후 이‘심유적불’ 네 글자는 조선에서 김시습을 평한 공식적인 규정이 되고 말았다.
당쟁이 치열해져 서인과 남인, 노론과 소론이 갈라져 싸웠다. 이때 이념적 가치로 떠오른 것이 절의(節義)였다. 예론 같은 형식적 논리로는 상대를 굴복시키기 어렵다고 판단한 당파들은 절의야말로 도덕과 학문을 동시에 충족하면서도 임금에 대한 충의까지 내포한 개념이라 생각하여 적극적으로 그에 해당하는 인물을 찾아 현창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부응할 수 있는 인물로 김시습이 18세기에 소환되었다. 이미 사육신과 단종이 복원된 마당에 김시습을 단종에 대한 충절과 절의를 지킨 인물로 재조명한 것이다. 이때 그들이 기준으로 삼은 것이 율곡의 심유적불(心儒迹佛)이었다. 후일 정조 임금이 김시습에게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청간(淸簡)이란 시호를 내리면서 사후 291년 만에 완전히 복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