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의 위력
김영자
한창 감수성이 풍부하던 우리들의 여고1학년 때의 일이다. 그때는 「공민」이라는 사회과목이 있었다.(1960년초) 공민 선생님은 수업 중에 한 가지 설명을 마치면 언제나 “알겠나?”,라고 물으셨고 우리가 “네”하고 대답하면 다음 진도가 나가는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하셨다. 그뿐 아니라 항상 우리 반 정란이 에게만 눈길을 주시면서 “알겠나?”를 외치시는 거다. 선생님과 정란이 만의 수업이며 우리는 들러리 서는 기분이었다. 마음이 상한 우리는 공민시간에는 절대로 아무말도 하지말자고 약속을 했다. 눈길 차별에 대한 우리들의 시위인 셈이었다. 어느날 우리의 무언의 시위를 눈치채신 선생님이 화가 나셔서 모두 일어나 교실 바닥에 무릎을 꿇으라 하셨고 그날 수업은 끝이 났다. 다음 공민 시간에 선생님과 화해하고 다시 공민수업을 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정란이도 몹시 불편한 입장이었다.
사람의 이목구비 중에서 여러 모양의, 많은 마음을 나타낼 수 있는 곳은 눈뿐이다. 입도 웃음으로 마음표현을 할 수는 있으나 눈이 동조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입이 아무리 따뜻한 미소를 전하고 싶어도 싸늘한 눈빛이나, 비난의 눈빛, 경멸의 눈빛이 담겨 있으면 온전한 미소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음을 표현함에 있어 눈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건 항상 사용하는 언어에서도 알 수 있다. 시선, 눈길, 눈빛이 비슷한듯하나 우리는 그 차이를 안다. 눈이 주는 표정으로 눈인사, 눈웃음, 눈도장, 눈 맞춤 등이 있고 눈의 행동으로 쳐다본다, 올려다본다, 내려다본다, 쏘아본다 등 눈이 주는 감정표현과 느낌은 열거 할 수 없이 많으며, 이렇듯 많은 표현을 할 수 있는 어휘를 사용하는 민족도 없을 것이다. 가끔 치맛바람 엄마들을 지탄하는 소릴 듣는다. 엄마들의 촌지문제도 결국 선생님의 눈길을 잡으려 함이다. 수업 중에 한번이라도 더 내 아이에게 눈길을 주십사하는 바램이 치맛바람의 목적이 아닌가 싶다.
사람을 처음 볼 때, 어떤 물체를 볼 때 시선이 향하고 그 시선이 머물 때는 마음도 동행한다. 애정이 있는 곳에 눈길이 머물고, 욕망이 있는 곳에 눈길이 머문다. 예로부터 “눈은 마음의 창”이라 하였으며 연인들은 눈으로 말한다 하며 눈빛만 보아도 안다고 한다. 뱀은 나무위의 새를 독한 눈빛으로 쏘아보아 떨어뜨린다는 말도 들었다. 눈빛은 누구의 영혼을 피폐하게도 하며, 어떤 이의 마음을 위로하기도 한다.
중학교 때 새 엄마의 친구들이 우리 집에 오셨다. 인사를 하던 나는 새엄마 친구들의 어색하고 낯선 눈빛을 읽었다. 어린 내가 처음 느끼는 눈빛이며 설명할 수 없는 눈빛이었다. 내 몸 전체를 쓸어내리는 것 같은 이상한 시선. 아무 잘못도 안했는데 큰 잘못을 한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하는 시선이었다. 멋쩍어진 나는 내방으로 들어갔고 다시 나가기가 힘들었다. 불편한 마음에 창밖만 보며 서 있었다. 창밖 큰 나무의 윤기 있는 초록 잎이 나를 더 주눅 들게 하는 하루였다.
“눈높이를 맞추다”라는 말도 자주 듣는다. 우리의 눈길이 어떻게, 어느 곳을 향하는가에 따라 개인과 사회가 달라질 것이다. 우리의 눈빛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누구의 마음에 온기를 줄 수도, 누구의 마음을 다치게도 할 수 있다. 친구와 대화중에도 그 눈빛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를 가늠할 수 있다. 때론 입보다 더 많은 말을 할 수 있는 것이 눈일 것이다. 눈의 표현기능을 선하게 이용하거나 상황에 따라 따뜻하게 제어한다면 우리네 삶에서 더 많은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