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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시카 Nov 06. 2024

운명을 받아들이는 너의 자세,
너를 대하는 나의 자세

                       - 주름잎









비가 그치고 나니 갠 하늘의 새 날이 더욱 눈부십니다.

이른 아침 나비 한 마리가 9층 높이의 창까지 날아올라와 날갯짓을 합니다.

어제 비와 밤새 맺힌 이슬로 날개가 무거울 법도 하건만 저 작은 생명체의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지척에 산과 농장이 있다 보니 아무래도 여름엔 각종 벌레들이 집안까지 들어오는 경우가 많아 침대 위에 모기장을 설치해 자고 있습니다. 약을 쓰기는 싫어서 어릴 때부터의 내 호기심도 채울까 하여 작년 여름에 사서 아직 키우고 있는 벌레잡이풀인 ‘네펜데스’의 벌레잡이 통이 아침 햇살에 눈부신 미모를 자랑합니다. 누가 저 우아한 몸짓이 벌레를 잡아 먹이로 삼으려는 식물의 덫임을 눈치챌 수 있을까요? 가끔 통을 들여다보면 작은 곤충들이 빠져 있는 것도 볼 수 있는데 유혹은 늘 이토록 황홀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인가 봅니다. 



내 집에 놀러 왔던 친구는 내 취미의 기괴함에 대해 한참이나 설교를 늘어놓기도 했습니다. 잔인하고 품위 없는 취미라고... 


어릴 때 누구나 한 번쯤은 벌레잡이 식물에 매혹된 적이 있지 않은지요? 벌레를 잡아먹는 식물이라니! 사실 ‘잡아먹는다.’는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요. 벌레를 포획해서 녹인 후 흡수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저러나 벌레의 입장에서는 잡아먹히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벌레잡이풀에 대한 인상이 좋을 수는 없는 것인가 봅니다. 하지만 이 녀석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질소가 부족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부단한 노력 끝에 얻은 기발하고도 소중한 생존책이지요. 살아남기 어려운 환경에서도 절대 포기하지 않은 노력의 결실인 동시에 자신의 한계 내에서 내린 최선의 선택이라는 점에서 그들의 생존 방식은 아름답습니다. ‘기괴하다.’는 것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린 결정에 해당되는 용어입니다. 그러기에 ‘기괴한’ 일들은 인간 세상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기괴한 내 취미에 대한 변명이 너무 길어지기는 했지만 내 생각은 그렇습니다. 


누구도 자신의 삶을 결정짓는 조건들을 온통 거부하고 그것을 뛰어넘어 홀로 설 수는 없습니다. 그런 조건들을 일컬어 간단하게 ‘운명’이라고 하지요. 용감함도, 뛰어난 두뇌도, 막강한 육체적 강건함도 결국은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 안에서의 변수일뿐입니다. 운명론자라고요? 비겁한 자기변명이라고요? 무능력에 대한 우아한 첨언이라고요? 예감된 실패와 그 상처에 대한 심리적 방어책라고요? 아마도 맞을 것입니다. 그래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믿음이 노력이나 도덕성, 열정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님도 확신합니다. 나를 가둔 장벽 안에서라도 나는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그 운명이 내가 살아가는 방식까지 바꿔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해지고 내 트랙 정원의 꽃들도 땅으로 숨어드는 이때까지도 꽃을 피우고 잎을 달고 있는 꽃이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주름잎’입니다. 정말 긴 시간 동안 끊임없이, 조용히 꽃을 피우고 있었네요.

크랙 정원의 많은 꽃들이 그러하듯 아주 작은 꽃을 피웁니다. ‘작은’, ‘낮은’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종소명 ‘pumilus’가 아주 딱 맞는 이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 주름잎의 꽃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단지 작다는 표현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듭니다. 왜냐하면 작기도 작지만 꽃의 모양이 아주 납작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무엇인가로 눌러 놓은 것만 같습니다. 4번의 사진을 보면 무슨 말인지 금방 이해가 되실 것 같네요. 과장해서 표현한다면 디즈니 만화에 나오는 ‘도널드덕’의 얼굴을 닮았다고 해야 할까요? 그 유머러스한 모습에 미소가 절로 피어납니다. (아래의 사진들) 


하지만 그 작고 납작한 꽃을 피우는 데에도 얼마나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도 보입니다. 먼저 아름다운 색! 꽃잎의 옅은 보라색은 가장자리로 갈수록 옅어지는 멋진 그러데이션을 보여줍니다. 우아합니다. 참으로 우아하지요. 깔때기 모양의 꽃의 윗입술꽃잎은 2갈래로 살짝 갈려져서 어찌 보면 꽃잎 위에서 솟아 나온 귀여운 뿔처럼도 보입니다. 반면 아랫입술꽃잎은 시원하게 3갈래로 갈라져서 꽃가루받이를 하러 오는 곤충들이 편안하게 앉을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고 있습니다.              


                                             < 2갈래로 갈라진 윗입술꽃잎 > 


                                              < 3 갈래로 갈라진 아랫입술꽃잎 >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볼록 튀어나온 아랫입술꽃잎의 노란 반점입니다. 이제는 꽃의 이런 구조에 많이 익숙해졌을 테니 따로 설명을 덧붙이지는 않겠습니다. 이른바 허니 가이드이지요. 암술대는 길게 꽃잎 밖으로 나와 있고 수술은 4개인데 2개는 길고 2개는 짧습니다. 이런 전략도 이미 여러 번 소개해 드렸습니다.   



꽃은 물론 피어났을 때도 아름답지만 요즘에는 꽃이 진 자리의 아름다움에도 자주 눈길이 갑니다. 어떤 경우에는 꽃이 진 후 그 구조가 선명하게 드러나기도 합니다. 위의 사진에서도 중간까지 깊이 갈라진 5갈래의 꽃받침이 아주 선명하게 보이네요. 꽃잎이 사라지고 허전하게 남겨진 꽃받침, 꽃잎이 떨어진 후에도 오래도록 허공을 가리키듯 남아있는 암술대, 그리고 꽃받침 안에서 여물어가는 몽글몽글 열매들... 색이 바래고 꽃잎이 시들고 줄기와 잎이 말라서 바스러져가는 모습도 또한 꽃의 삶의 한 단면이겠지요. 이야기가 잠시 곁 길로 새어버렸네요.     


       

                                            < 꽃잎 밖으로 길게 나온 암술대 >

                                                   < 꽃 진 자리에 홀로 남은 암술대 > 



이렇듯 주름잎은 작은 몸체로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모든 전략과 대비를 해 놓았습니다. 약간의 물기만 있으면 그곳이 어디라도 주름잎은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저 주어진 조건 안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지요.  


주름잎이 자라는 곳은 물기가 많은 곳입니다. 다른 조건은 얼추 견딜 수 있지만 건조함에는 버티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주름잎의 서식지는 사람들이 농사를 짓는 공간과 겹치는 경우가 많지요. 이제 주름잎은 ‘잡초’가 됩니다. 살아남으려는 주름잎과 농사에 방해가 되는 잡초를 뽑아내는 인간들 간의 소리 없는 전쟁! 둘 다 생존을 건 싸움이기에 한 발도 물러설 수 없습니다. 특히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한 논농사의 일정과는 달리 밭은 그야말로 ‘수시로’, 예측이 불가능한 시간에 갈아엎어지고 뽑혀나가는 처절한 생존의 불구덩이가 됩니다. 주름잎은 어떻게 이런 환경에 대처하고 살아남았을까요? 비결은 오직 하나, 끊임없는 번식 전략입니다. 쉬지 않고 꾸준히 꽃을 피우고 씨앗을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운명에 순응하면서도 그 한계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주름잎 덕분에 나의 크랙 정원에서는 아주 오랫동안 이 작은 꽃을 볼 수 있었던 것이네요.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는 주름잎의 삶이 어찌 조용하고 소박하고 평화롭기만 했을까요? 끊임없는 도전과 자기 변화... 그 과정은 과거나 현재의 것만도 아니고 영원히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겠지요. 주름잎의 지금의 모습, 그리고 겉모습만 보고 ‘현명한 꽃에서 한 수 배운다.’는 따위의 말을 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나는 꽃에서 무엇인가를 ‘배우지는’ 않습니다. 그저 꽃을 보며 삶(생명 현상)의 보편적인 모습을 확인하고 다시 나의 삶을 되돌아보는 것뿐이지요. 하나의 생명체라는 점에서 꽃과 내가 무엇이 다를까요?  



오늘 다시 한번 ‘운명’과 ‘한계’를 생각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작은 꽃의 자세를 생각해 보며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잠시, 하지만 결코 무겁지는 않게 생각해 봅니다. 왜냐하면 꽃을 보며 지나치게 엄숙해지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주어진 찰나의 순간에, 이 공간을 공유하며 함께 살아가는 생명체이고, 그래서 기본적으로는 즐겁고 행복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꽃을 대하는 자연스러운 태도일 것입니다. 


꽃은 내게 어떤 교훈을 주기 위해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우리와 공존할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꽃은 함부로 훼손시키거나 꺾어서 없애버릴 수 있는 대상이 아닌 만큼이나 또한 어설픈 ‘보호’의 대상도 아닙니다. 어떤 꽃은 ‘보호종’이고 어떤 꽃은 ‘환경유해종’이라고 결정할 수 권리는 누가 누구에게 준 것일까요? 그리고 그 기준은 절대적인 것일까요? 꽃은 그저 ‘존중’의 대상일 뿐입니다. 이 행성 위에서 살아갈 권리는 꽃들에게나 우리 사람들에게나 한 치의 차이도 없이 똑같이 부여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의(善意)’에서 나온 행동일지라도 그 결과나 의미가 바로 선의가 되는 것이 아님을 이제는 압니다. 그래서 꽃을 보며 그들을 대하는 나의 자세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해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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