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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시카 Nov 13. 2024

외모지상주의의 세상에서 살아남기

                           - 냄새명아주









꽤나 많은 꽃들을 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착각이었음을 새삼 느낍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크랙 정원을 가꾸기 시작하면서야 비로소 알게 된 식물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이 ‘냄새명아주’입니다. 


처음에는 중대가리풀인 줄 만 알고 그냥 무심히 보아 넘겼지요. 그러나 왜 그 ‘촉’이란 것이 있지 않아요?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습니다. 그래서 조금 더 다가가 살펴봅니다. 이내 다른 식물임을 눈치챌 수 있습니다. 하필 학원가라 아이들의 왕래가 종일 빈번한 곳 가로수 아래 자리를 잡고 있다 보니 찬찬히 바라보는 것 자체가 놀이동산에서 바이킹을 타는 것처럼 아슬아슬, 흥미진진합니다. 


외모만 보아서는 점잖은 명아주와는 전혀 닮은 구석이 없는 것 같은데 도감을 찾아보니 냄새명아주라고 하네요. 

‘냄새’라는 이름 때문에 두 번째로 보러 나갔을 때는 잎을 하나 따서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아보았지만 별다른 강한 냄새는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렴풋이 뭔가 그리 유쾌하지는 않은 그런 냄새가 느껴졌습니다. 비록 아주 미약한 냄새지만 아마도 이 냄새가 온갖 벌레들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소중한 무기일 수도 있겠구나 생각합니다. 


솔직하게 얘기하면 그 생김새도 그리 매력적인 편은 아닙니다. 외모 비하가 아닙니다. 아니 외모 비하 맞습니다. 아주 작은 데다가 변변한 꽃을 피우는 것도 아니고, 피어나는 장소도 사람들이 눈길을 끌기는 어려운 곳입니다. 그러나 보니 어여쁘다 하여 꺾거나 만져서 해를 입히는 손길도 없었을 것입니다. 눈에 띄지 않음으로써 생존을 이어가는 삶, 허허실실의 고차원적 생존법입니다.  


그러나 그렇다 보니 이 녀석의 생식 전략이 궁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도대체 이 모양 이 꼴로 어떻게 꽃가루받이 곤충을 유혹하여 씨앗을 만들어내는지...


‘꽃’을 찾아봅니다. 극한의 작업입니다. 궁둥이 땅에 붙이고 사진을 찍는 것조차 어렵습니다. 아이들은 그냥 걷기만 하는 게 아닙니다. 뛰고 고함을 지르고 자전거를 타고 앞도 뒤도 보지 않고 통통거립니다. 이 험악한 여건 속에서는 잠시라도 카메라를 들이댄다는 것도 큰 모험이 됩니다.


그렇게 하여 담은 사진을 샅샅이 살펴봐도 기대했던 꽃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할 수 없이 도감에 SOS를 칩니다. 꽃덮개는 5개이고 암술대는 2개, 수술은 5개라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이제 거꾸로 도감을 바탕으로 내가 찍은 사진 속에서 그 부분들을 찾아 꿰어 맞추어 봅니다.      

        


또렷하게 보이지는 않으나 도감을 참고로 정리해 보면 잎겨드랑이에 덩어리 져 있는 것이 꽃차례지요. 꽃차례에서 한 덩어리를 떼어서 생각해 보면 마치 조그만 공모양으로 동그랗게 생긴 것이 바로 꽃입니다. 꽃잎이라고 할 것도 없는 꽃덮개 조각이 5개라서 오각형의 호박 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하트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든 말든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듯...

다음으로 이 꽃들의 중심부를 보면 무엇인가 뾰족하게 솟아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암술대겠지요.

접사 하여 보니 온통 털투성이라서 판별하기가 더욱 힘들어집니다. 국가표준식물목록에 따르면 ‘꽃은 잎겨드랑이에 이삭 모양으로 모여 붙고, 화피는 5갈래, 대형의 꽃에는 5개의 수술이 꽃 밖으로 솟고, 소형의 꽃에는 수술이 퇴화되며, 암술만 있고, 암술대는 2-3개’라고 합니다. 온통 의문점 투성이입니다. 수술이 퇴화되었는데 꽃밥은 어떻게 터져 여러 개의 암술과 꽃가루받이를 한다는 것인지? 식물의 수수께끼가 하나 더 늘었습니다. 


아래의 사진은 잎 뒷면의 분비샘입니다. 당연히 냄새가 나겠지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귀화한 식물이라 ‘호주명아주’라고도 불리는 이 식물은 같은 ‘과’에 속하고 항렬도 같은 다른 명아주과의 식물들과는 그 크기나 모양에서도 차이를 보입니다.  



그래서 담아둔 사진 중에서 ‘좀명아주’를 꺼내봅니다.         

   




‘좀’ 명아주라고는 해도 냄새명아주와는 비교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큰 키에 훤칠한 외모가 멋집니다. (위쪽  사진) 줄기는 곧게 서고 길쭉한 모양의 잎도 눈길을 사로잡네요. 사실 너비보다 길이가 훨씬 긴 삼각형 모양의 긴타원형으로 물결 모양의 톱니가 있는 이 잎의 모양이야말로 명아주와 좀명아주의 가장 큰 차이점 중의 하나입니다. 전체적으로 멋진 모습입니다. 이 아이(좀명아주)와 저 아이(냄새명아주)가 같은 집안의 아이인지가 의심되기도 합니다. 



내친김에 좀명아주의 꽃(아래쪽 사진)도 조금 더 들여다보고 갑시다.

이 꽃도 작기는 매한가지라 구분이 어렵기는 하지만 가지 끝부분에 옹기종기 모여서 피어나는 녹색의 꽃은 냄새명아주의 모양과 비슷해 보입니다. 다만 꽃차례가 다소 성글어서 여유가 있어 보이고, 벌어진 꽃덮개 안에 들어앉은 암술대와 꽃덮개 바깥으로 삐죽이 나온 수술의 멋진 곡선이 분명하게 눈에 들어옵니다.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보니 이제야 좀명아주와 냄새명아주 꽃의 공통점이 눈에 들어옵니다.  


왜 이 꽃을 보았을 때 명아주과의 식물임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일까요? 이유는 참으로 단순합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명아주과의 식물들에 비해 이 녀석의 외모가 형편없었기 때문이지요.

작은 키, 오가는 사람들로 북적대는 한 길가, 이상한 냄새, 게다가 꽃은 있는 것인지 아닌지... 열심히 들여다보니 꽃의 꼴 하고는 쯧쯧쯧...

맞습니다. 나는 어느새 꽃에 대해서조차 ‘외모지상주의자’가 되어 있었네요.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사실 참 자연스러운 것이지요. 아름다움은 우리를 즐겁게 하고 눈길을 사로잡고 가슴을 뛰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성선택’에 있어서의 중요성은 재론의 여지도 없지요.

문제는 아름다움이 권력이 되고, 아름다움에 대한 사회적, 성적 압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현상이지요. 외모가 개인의 우열을 결정하며 외모를 통해 사람을 판단하는 경향이 지나치게 커져서 급기야는 외모가 개인에 대한 편견이나 차별을 강화하는 원인이 되기에 결국은 외모를 가꾸어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도 강화됩니다. 성형수술이 국가적인 수입이 될 정도로 성형 기술이 가장 앞서가는 나라에서 살며 불편한 점도 자주 경험했습니다.

예쁘고 잘 생긴 사람이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멋져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의 비판은 설득력도 떨어지고 자칫 열등감의 표출이라 비웃음을 당할 수도 있기에 길게 언급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노력하지 않으면, 늘 깨어있지 않으면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되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무관하게 보일 수도 있겠으나 극단적인 외모지상주의는 일종의 사회악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육식의 종말’에서 리프킨이 언급한 ‘차가운 악(惡)'을 되짚어 생각해 봅니다. 


'차가운 악'은 먼 곳에서부터 영향을 미쳐오고, 기술과 제도의 허울 속 깊은 곳에 모습을 숨기고 있으며, 그로 인한 제도적 결과는 때로 쉽게 사라지지 않거나 전혀 우연한 관계라고 의심되지 않는 가해자나 피해자들로부터 야기된다. 이런 악은 개인적인 특성이 없으므로 좀처럼 감지되지 않는다....(중략)...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무장강도, 강간, 고의적인 동물 학대 등과 같은 '뜨거운 악(hot evil)'의 범행에서와 같이 격렬한 분노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육식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 시공사


사회의 어느 문제에서나 발견되는, 그리고 내 의식 속에서도 끊임없이 작동하고 있는 이 ‘차가운 악’의 문제에 대해 곰곰 생각해 보게 하는 식물입니다. 



모든 현실의 문제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왜 한국 여자들은 그렇게 성형 수술을 많이 하나요?’라는 질문은 성형 수술을 하는 여성들에 대한 비난이나 비웃음의 문제로 수렴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런 식의 질문에 대한 답은 문제 자체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질문은 ‘왜 한국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아름다움에 대한 압력은 그렇게 클까요?’ 또는 ‘왜 한국의 결혼 시장이나 취업 시장에서 여성의 몸은 그렇게도 강력한 변수가 되는 것인가요?’라고 바뀌어야 하며 그때에야 비로소 문제의 해결책이 희미하게나마 떠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면 무엇 때문에 우리는 힘을 들여 토론을 하고 민주적 토의의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하는 것일까요? 모든 의사소통은 결국은 문제를 분명히 하고 그 해결책을 찾는 것에 모아져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써놓고 보니 ‘꼰대’의 악취가 엄청나네요. 답답한 며칠을 지내면서 어쩔 수 없는 꼰대가 되었나 봅니다.

질문의 수준은 해답의 수준을 상당할 정도로 결정합니다.

문제에 대한 인식의 수준은 그 문제에 대한 올바른 해결책을 찾도록 합니다. 사회 지도층이라 자처하는 인사의, 정직함과 용기는 차치하고 기본적인 지성이나마 보고 싶었던 애타는 갈증과 처절한 절망이 결국 나를 여기까지 밀고 왔나 봅니다.  



지저분한 도시의 한 복판에서 발견한 냄새명아주의 의연함을 봅니다.

이 녀석은 자신의 문제, 자신이 처한 현실을 직시하고 바로 그 지점에서 삶의 난제들을 해결해 나가는 것 같습니다.

납작 엎드린 것 같은 작은 몸체, 벌레를 쫓는 냄새,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지 않는 수수한 꽃, 굳이 곤충들이 없어도 꽃가루받이가 가능할듯한 수술의 퇴화라는 꽃의 구조(이 부분에 대한 검증은 꼭 필요할 것 같습니다. 나는 다만 이렇게 추측할 뿐입니다.), 빽빽한 털로 도시의 건조함 속에서 부족한 수분을 붙잡아두는 등 현명하고도 효율적인 대응에 감탄하며 박수를 보냅니다. 

이렇게 또 하나의 신기한 식물을 알게 해 준 나의 크랙 정원, 보기와는 다르게 아주 아주 풍성한 꽃밭입니다!   




사족입니다.

가을, 좀명아주는 이렇게 조용히 익어갑니다. 

보여드리고 싶어 안달이 나는, 숨겨놓고 보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아름다움입니다.  

          





냄새명아주는 또 어떤 모습으로 익어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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