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여뀌
입동이 지났건만 아직도 한낮에는 겉옷이 무겁게 느껴집니다. 거실 앞 창밖으로 보이는 단풍의 색도 힘이 빠져있는 것 같습니다. 여름은 안간힘을 쓰며 다가오는 가을을 밀어내고 있나 봅니다. 결국은 무릎을 꿇을 테지만 그래도 그렇게 ‘버팀’에도 나름의 의미가 있겠지요. 내가 어떻게 그 사연을 다 알 수 있겠습니까만 한낮의 여름과 아침, 저녁의 가을이 교차하는 멋진 날들입니다.
여뀌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은 이미 한 달도 더 된 것 같습니다.
바로 뒷산의 그늘에 무더기로 피어난 ‘장대여뀌’를 보면서도 그건 크랙 정원에 핀 것은 아니니 하고 눈을 딱 감았더랬습니다. 뒤이어 ‘개여뀌’와 ‘흰여뀌’가 피어나 가을의 느낌을 물씬 풍기기 시작한 것도 한참 전... 내가 너무 게을렀네요.
개여뀌를 보니 문득 큰 아이가 아직 안정된 직장에 자리를 잡기 전, 참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던 시절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아이를 일터로 보내고 나서 집에 홀로 있을 용기가 나질 않던 그 많은 순간들, 길을 하염없이 걸으며 마음을 다잡던 그 시간들 사이로 길 가 빈 터에 피어나 있던 개여뀌를 어찌 잊을 수 있을까요?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아이가 돌아올 때쯤이면 내 복잡한 마음을 들키지 않고 희망 가득한 표정으로 맞아야 하기에 웃는 연습을 하고 또 하고 했습니다. 아프고 힘들었던 지나간 시간들, 하지만 다가올 기쁨을 더욱 크게 만들어 주려는 시간의 배려였던가도 싶습니다.
‘여뀌’는 대가족을 이루고 있습니다.
여뀌, 바보여뀌, 장대여뀌, 털여뀌, 기생여뀌, 흰여뀌, 꽃여뀌, 물여뀌, 산여뀌... 그중에서 길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장 친숙한 여뀌가 아마도 이 ‘개여뀌’ 일 것입니다. ‘개’ 여뀌라...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개’는 ‘야생 상태의’ 또는 ‘질이 떨어지는’, ‘흡사하지만 다른’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라고 합니다.
자, 그렇다면 개여뀌는 여뀌 가문의 천덕꾸러기라는 뜻이 되나요? 알아보니 여뀌는 맵고 알싸한 맛을 가지고 있어서 이 때문에 영어 이름도 ‘워터 페퍼(Water Pepper, 물후추)’라고 하네요. 여뀌를 찧어서 냇물에 풀면 물고기들이 맥을 못 추고 천천히 움직이기 때문에 천렵에 이용했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는데 여뀌의 매운맛 성분이 물고기를 마비시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 생선의 비린내도 잡아주고, 즙을 내어 술을 빚으면 술맛이 변하지 않는다고도 합니다. 쓸모가 많은 식물이네요. 그렇다면 개여뀌는? 네, 매운맛이 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잡초인 주제에 쓸모도 없었다는 의미일까요? 참 무성의한 이름인 것도 같지만, 사실 사람 냄새 가득한 이름이기도 하네요. 가족이란 바깥에서 보면 참으로 끈끈하고 견고하게 보이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 보면 짐작조차 어려운 많은 사연들을 가지고 있지요. 그리고 가족 구성원 중 몇몇은 늘 따돌려지고, 미움받고, 천하게 취급받기도 합니다. ‘가족 잔혹사’, 누구나 알고 있지만 누구도 입술에 올리지는 않는 감춰진 사연들, 개여뀌도 그런 스토리의 주인공일까요?
개여뀌가 다른 종류의 여뀌와 구분되는 가장 확실하고 쉬운 차이점 중 하나는 꽃차례가 아래로 처지지 않고 바로 서있다는 점입니다. 여뀌들은 대부분 이삭꽃차례를 이루고 있으므로 그 많은 꽃들의 무게 때문에 아래쪽으로 쳐지기 마련이지만 몇몇 종들은 꽃차례가 꼿꼿하게 서있기도 합니다. 개여뀌도 그렇습니다. ‘왕따’의 마지막 자존심일까요? 멋진 모습입니다.
다음은 내가 무척 사랑하는 ‘흰여뀌’의 모습입니다. 하기야 어느 누군들 사랑하지 않고 배기겠습니까?
아래쪽을 처진 꽃차례가 개여뀌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삶의 무게, 원숙한 지혜, 가을의 우울... 뭐 그런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렇다고 해서 여뀌 종류를 구분하는데 꽃차례가 가장 중요하다고 알고 있으면 곤란합니다. 다른 종의 꽃들과 마찬가지로 털의 유무, 잎의 모양, 특히 ‘잎집’에 털이 있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포인트라고 하네요.
여뀌라는 이름은 알알이 박힌 열매가 엮여 있는 듯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재미있는 유래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집 주위에서 피어난 여뀌 꽃 또는 열매의 알갱이를 밤새도록 세고 또 세느라 도깨비가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되니 이처럼 도깨비를 '엮이게 한다.'라고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네요. 우리 이야기 속의 도깨비는 어찌 이리 어리숙한지... 하지만 여뀌의 꽃차례에 빼곡하게 달린 꽃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여뀌류 중에는 꽃차례가 아주 성글어서 허전하게 보이는 꽃들도 있지만, 위의 이야기에서처럼 이삭꽃차례의 특성상 작은 꽃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습니다. 무심하게 본다면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갈 수 있는 예쁨이 있지요. (개여뀌의 3번 사진과 흰여뀌의 2번 사진) 톡톡 터지듯 피어나는 여뀌의 꽃을 바라보노라면 시간이 흘러가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하나의 꽃에 눈길을 주고, 마음을 주고... 그렇게 기쁨은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커져 갑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여뀌의 꽃을 사진에 담으며 늘 안타까웠습니다.
이 모든 꽃들이 한꺼번에 활짝 피어난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를 생각했지요. 그러나 여러 번을 찾아가 들여다보아도 모든 꽃들이 다 피어난 경우는 보기가 어려웠습니다.
<흰여뀌>
그렇습니다. 개여뀌든 흰여뀌든 그들은 모든 꽃봉오리의 꽃들을 피워내지는 않습니다. 힘들여 빚어낸 꽃봉오리, 그러나 마지막 단계에서 그들은 선택을 합니다. 어느 봉오리는 꽃을 피우고 어느 봉오리는 그대로 남겨두어야 하는 어려운 선택... 힘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꽃을 다 피우는 것에는 엄청난 자원이 들어가야 하기에 한 개체 전체가 건강하게 살아남아 남은 과제를 풀어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내어야만 하는 선택입니다. 그렇다면 선택되지 못한 봉오리들은 무의미한 삶을 살았던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대로 남아 꽃차례 전체의 화려함을 유지시켜 줍니다. 그런 묵묵하게 ‘존재함’ 자체가 더 많은 곤충들을 불러들이고 꽃가루받이의 확률을 높여줍니다.
집단을 이루고 살아가는 생명체들의 숙명은 그렇습니다. 모두가 화려하고 눈부시게 피어날 수는 없습니다. 누구는 피어나고 누구는 그대로 시들어 가야만 합니다. 누구나 주인공이 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매 순간 최선을 다했고, 모든 것을 걸고 피나게 노력해 왔기 때문이지요. 마지막 한 계단, 그 앞에서 그대로 스러져야만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화의 운명은 나 개인의 행복 따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최선을 다했지만 얻을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쉬움 속에서 뒤돌아보는 내 지난 시간들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 시간들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음도 알게 됩니다.
만약 내가 어느 한순간이나마 활짝 피어날 수 있었음은 다른 많은 이들의 묵묵한 ‘견딤’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아쉬움 속에서 운명을 한탄했다면 다른 누군가의 피어남을 위한 ‘묵묵히 존재함’을 받아들이는 과정이었음을 깨닫습니다. 겸손해서가 아니라 생명의 법칙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어줍지 않은 ‘달관’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가치중립적인 자연의 이치가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꽃을 다 피워 올리지는 않는 개여뀌, 흰여뀌를 바라봅니다. 다 피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예쁜 모습입니다. 다시 한번 바라봅니다. 오, 그렇습니다! 다 피어났다면 오히려 그 빽빽한 아름다움에 눈멀어 가슴속 깊이 스며드는 아름다움을 놓쳤을 수도 있었겠구나 생각도 해봅니다.
수많은 아이들과 부모님들이 가슴 졸이는 ‘수능일’ 아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