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na Lee Sep 08. 2024

내 이름은 '애나'

최선이 아니었길 바라던 어린 나

매번 최선이 아니었다는 희망중독에 갇힌 나


25살 처음 비행기를 타고 먼 나라 호주로 워홀을 가게 되었다. 대한항공의 승무원 언니들은 우리를 편하게 해 주었고 10시간 남짓한 장거리 비행이었지만 설렘과 여동생과의 동행으로 외롭지 않았다.


호주 공항에서 이민관의 환대를 받으며 시드니 공항에 도착, 하루 백패커에서 묵고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골드 코스트에 가게 되었다.

영어가 서툴렀던 내가 처음으로 갖게 된 아르바이트는 한식당 고깃집 서빙알바.

호주에 한 달 정도 지내던 숙소 할아버지가 지어준 이름 'Anna'

손님들 중에 가끔 "어! 우리 엄마 이름이랑 같아요, 할머니 이름도 예요"

그렇다. 오래된 흔한 이름. 어감이 좀 순한, 법과 규칙을 잘 따르며 규율을 어기지 않을 것 같은 여자사람 이름.

호주 할아버지는 내가 이 이름이 너무 잘 어울린다고 지어 주었다.

나는 여기 타지에서도 나를 잘 알지 못하는 외국인에게 조차도 나는 보기 쉬운 흔한 평범한 여자 아이처럼 보였을까?

맞다. 나는 성실해 보이고 학교 규칙을 잘 따르며 착한 어린이, 여자애, 여자사람이었다. 공부는 곧 잘했지만 끈기가 부족한 탓에 공부로 크게 성공하지는 못한 것 같다.

외모도 평범하고 성격도 유순한 편이라 그냥 보통의 사람으로 살아왔다.

내게 너무나 잘 어울리는 이름 애나.

호주에서의 1년은 지금 돌이켜보면 전혀 나의 앞날에 영향을 끼칠 만한 일들이 없었기에 짧게 나열해야겠다.

캐나다 워홀과 다르게 호주는 신청도 입국도 너무 쉬서, 많은 젊은 친구들이 외국생활을 쉽게 경험하기 좋은 나라이고 제도라 생각한다.

지금은 정책이 바뀌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2015년에는 그랬다.

그냥 잘 놀았던 시기였다. 영어도 아주 조금 늘었고, 그 당시에 뭔가 정신이 살짝 나가서 결혼을 한다 만다 호주에서 만난 남자를 집에 인사를 시키고, 술도 많이 마시고 놀기도 많이 놀고 크게 다치기도 하고 예를 들어 다리가 부러지고.. 허허...

워홀러답게 일은 많이 했다. 한식 고깃집 서빙알바, 마사지샾 리셉션, 대학교 안에 있는 초밥집에서 캐쉬어와 롤맨으로 짧게 1년을 꽉 채워 일했다.

호주 워홀을 왜 갔느냐..

서울살이가 너무 외로워 도피성으로 떠난 호주였다.

2년여를 서울에서 임상병리사로 일하며 직장을 다니면서 열심히 살았다. 돈을 벌기 위해, 돈을 쓰기 위해. 내 인생의 첫 꼬임은 아마도 대학교 3학년 때 휴학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나는 의사가 되고 싶었다.

지금도 되고 싶다 의사.. ㅋ 학교 보내 줄거라 믿고 있다. 남편 듣고 있나..?

MEET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쉬었지만 잘 되지 않았고, 다행히 다니던 4년제 대학은 졸업하고 병리사 라이선스를 취득해 어떻게 취업은 했다.

난 일을 잘한다.

일머리가 나쁘지 않아서, 일을 구할 때는 주제파악을 잘해서 취업을 잘한다.

아니다. 어쩌면 현실을 너무 잘 알아서 자꾸만 없는 이유를 만들어 가면서 높은 취업문턱 근처에는 가보려 하지 않고 꼭 뽑힐 것 같은 문만 두드렸던 것 같다.

동기들은 대학병원이나 기업체병원이 아니면 안 될 것같이 열심히 토익을 준비하고 학점을 관리했고 다들 좋은 병원에 취직해 멋진 서울언니야들로 살기 시작했다. 옆에서 그저 그런 곳에 다니며 그래도 나는 의전 진학을 위해 지금 잠시 멈춘 것처럼 보이는 거라 정신 승리하며 바빴던 나는 그곳에서 튕겨 나와 호주에 가게 되었다.

임상병리사. 점수 맞춰서 간 대학, 학과..

병원 취업 후에도 어느 직장에서나 사랑받고 필요한 인재로 잘 살아왔다.

이 일이 천직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 내면 깊은 곳에서 어쩌면 매 순간 만족하지 못하고

대학도 나를 많이 낮추어 선택한 것이고, 직업 역시 그렇다 생각했나 보다.

주제넘은 생각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지만, 그때의 나를 후회하지 않지만 나는 20대의 나를 모두 도려내버리고 싶을 만큼 우울한 지난날을 보냈다.

어린 내게 모든 순간이 늘 최선이었겠지만 그게 아니었다 생각하는 내가 나를 지치게 했겠지만, 결과적으로 지금은 만족하는 삶을 살고 있으니 그때의 나에게 잘했다, 잘 생각했다 말해주고 싶다.

37살의 나는 내가 너무 예쁘고, 주변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는 끔찍하게도 나 자신을 아낀다. 너무 아프지 않게 너무 스트레스받지 않게 내가 행복하다 느끼는 순간을 내가 직접 만들어가며 수수하게 은은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지 못했던 지난날의 나에게 미안해라 말하며 사과하고 싶다. 너는 참 좋은 사람이었으나

정작 본인인 너에게 스스로 그 모습으로 대해주지 못해, 보여주지 못해 늘 아파했지.


나는 이제 착하지 않다.

내 행복에 굉장히 예민하다.

내가 먼저이다.

고통받고 힘든 순간에는 어떻게든 빠져나가고 그 안에 나를 오래 가두지 않는다. 차후를 생각한다.

내가 혼자 딛고 일어설 단단한 받침대를 만들기 위해.

비결은..?

그런 사람을 보고 배웠다. 고마워 남편.

남에게 배려하다가도 선하게 굴다가도 그 짓에 지치기 전에 나를 먼저 챙길 줄 아는 건강한 사람이 되었다.

자꾸 말이 길어지는 것은 앞으로 풀어낼 고된 지난날의 나를

엄마가 너무 슬퍼하지 않았으면 해서이다.

엄마 나 지금 행복해!


호주에서 돌아온 나는 그렇게 1년을 채우고 한국에 돌아가서 다시 서울살이를 하였다.

눈이 펑펑 오던 날 밖에서 울면서 유학원의 전화를 받고, 왜 나는 하나도 쉬운 게 없는가 나를 가여워하다가 다시 캐나다 밴쿠버로 발길을 돌렸다.

밴쿠버는 Co-op Visa였고, 6개월 비즈니스 수업을 듣고, 말이 그렇지 영어를 배우고,  6개월 일을 할 수 있는

비자였다. 그때 당시 500만 원 정도의 비용이 들었던 것 같다. 500만 원을 주고 1년 체류할 수 있는 비자를 산 셈이다.

7시 20분, 선착순으로 지원하던 캐나다 워홀을 도전했으나, 근무하던 병원 아침조회에 늦을까 여의도 피시방에서 조마조마하던 27살의 나는 "당신은 기계가 아닙니까? "하는 영어 질문에 답을 못해 서럽게 지원조차 못한 내 우울하고 쪽팔린 과거.. 내 500만 원...


캐나다 입국 모든 절차는 서울에 있는 유학원을 통해 이루어졌고, 코업 비자취득을 위한 캐나다 학원 입학시험을 한국에서 치렀고, 모자란 영어실력이 들통나 애를 먹으며 아주 아슬아슬하게 입학을 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그나마 좀 자신이란 게 있던 영어가 내 발목을 잡으며, 가뜩이나 텅텅 비어 버린 내 주머니를 구멍내면서 인생 가장 최고로 우울한 1년의 밴쿠버 생활이 시작되었다.

밴쿠버 공항에서 이민관이 6개월짜리 반쪽 학생 비자를 주었다. 내가 돈을 써서 캐나다에 온 이유였던 6개월짜리 워킹 비자는 주지 않았다.. 나 지금.. 200만 원뿐인데...?



자영업의 근황은..

드디어 짧았던 여름이 끝나고 토론토에 가을이 찾아왔다.

문만 열면 성시를 이룬다던 여름은 보기 좋게 망했고..

나는 새로운 가을 메뉴 4개와 함께, 가슴이 살랑살랑해지는 샹송과 가을 노래를 틀고 다시 손님들을 유혹한다.

이젠 나와 남편 그리고 든든한 주방 친구 1명과 조촐하게 핼러윈과 크리스마스를 기다린다. 8개월 차 자영업도 곧 1년을 채우게 되겠군! 주변에서 1년 뒤면. 비즈니스도 점 차 안정된다 하니 또 기대하자!


다음 글로 돌아오겠습니다! 건강 조심하세요 감기도요!

우리 가게 근처 캐나다 캣카페 고양이랑 노는 한시간에 25불이라니.. 고양이 생각은 안...해??
캣카페 ...아르바이트 보낼까?

뭔가 묘한 가게 근처 초콜렛 카페.. 음산한데 분위기 있어!

우리의 신메뉴!

작가의 이전글 한두 푼 아껴서 부자 될 거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