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른 사람의 기억을 먹고 산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상황들을 기억하는 '과잉기억증후군'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인생의 거의 대부분을 기억하다 보니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 되었다. 아주 어려서는 모든 사람은 다 그런 줄 알고 있었다. 내가 3살 때 어머니와 아버지는 나를 누나에게 맡기고 항상 장사를 하러 가셔야 했다.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도 나처럼 모든 것을 기억하시는 줄 알았다. 하지만 부모님은 일하기 바쁘셨고, 나와의 약속은 그렇게 매일 기억의 저 편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그로 인해 마음 아파하는 날이 많았다. 나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약속을 안 지키는지 알 수가 없었다. 왜 어제 한 이야기를 마치 오늘 처음 들은 사람처럼 행동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들의 영역 안에서 모든 것을 기억하고 산다는 것을 커서야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을 가지고 살아간다. 나는 기억이 우리를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나는 일반 사람들과 다르게 많은 것들을 기억한다. 하지만 이것이 항상 나에게 좋은 것만을 남겨주지 않았다. 살면서 어떤 기억들은 쏜 화살 같이 잊어버리고 싶은 경우가 많았다. 나는 그러지 못했고, 그것이 나의 학창 시절에 나를 붙잡는 가장 큰 족쇄가 되었다. 나의 많은 기억들이 생각의 놀이터에 들어와 자기들 마음대로 뛰어놀 때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실 이 병은 2006년 미국의 질 프라이스라는 여성이 최초로 진단받은 병이었고, 내가 유년시절을 보내고 있을 때는 병원에서도 이유를 알지 못했다. 의사들과 상담사들은 단순하게 '아이가 그냥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다.'는 진단을 내리기 일쑤였다.
나는 나 스스로 내가 다른 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치료를 위해 병원을 자주 찾았다. 결국 이 병은 나을 수 없는 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 다르다는 것이 틀린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친구들은 그런 나를 틀리지도 다르지도 않게 대해 주었다.
내가 14살이 되던 해에 나는 내 일생의 가장 큰 슬픔을 오롯이 나의 기억에 남기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던 아이의 죽음을 눈앞에서 보는 일은 그 어떤 나의 기억의 바람보다 격렬하고 강하게 나의 머리를 흔들어 놓았다. 그 당시 남이사와 무해한 그리고 나는 친구들과 함께 성지곡 수원지로 소풍을 갔다. 그때 우리 곁에는 아주 어여쁜 여자아이가 함께 있었다. 그 소녀는 우리와 같은 동네에 살았고, 우리와 함께 자랐다. 내가 그 아이를 처음 좋아했던 때는 5학년이 되던 해였다. 같은 반이 되었던 우리는 거의 독수리 오 형제와 같이 함께 등하교를 했었다.
기억해, 무해한, 남이사, 노다비, 그리고 "조하해"... 우리는 그렇게 함께 중학생이 되었다.
우리는 평생에 가장 소중한 친구들이 되었고, 세상이 우리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 아이를 우리 곁에서 떠나보내 던 그날은 너무나 화창한 초여름이었다. 우리는 여느 때와 같이 주말에 다 함께 성지곡 수원지로 소풍을 갔다. 성지곡 수원지를 걷던 중 우리가 가장 좋아했던 아이 '하해'가 발을 헛디뎌 수원지 물에 빠지는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나는 무슨 생각으로 그 아이를 구하기 위해 물속으로 뛰어들었는지 지금도 잘 기억하지 못한다. 그것은 나의 의지가 아닌 나의 무의식이 그렇게 한 것이었다. 나 역시 수영을 잘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해와 나는 그대로 물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나는 물속으로 가라앉는 동안 하해를 꼭 껴안고 머릿속으로 계속 되뇌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널 잊어버린다고 해도 내가 세상 끝까지 너를 기억할게. 내가 널 기억할게, 내가 널 꼭 기억할게. 너의 웃음, 너의 말, 너의 눈빛, 너의 행동 하나하나를 기억할게. 내가 죽어서도 너를 기억할게. 만약 다음생이 있다면 그때의 나도 널 기억하도록 지금 더 너를 기억할게.
얼마가 지났을까 우리는 근처를 지나던 수원지 관리인을 통해 구조되었고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 이후로 하해는 더 이상 우리 곁에 남아있지 않지만 나의 기억엔 하해에 대한 모든 것이 남아있었고, 무슨 일인지 하해가 가지고 있던 기억까지 남게 되었다.
2주 후 나는 병원에서 퇴원을 했고, 학교로 돌아왔다. 나는 마치 하해와 같은 공간에 사는 듯했다. 해한 이와 나는 정말 아무 일이 없다는 듯 학교생활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놀이터 시소에 앉아서 해한 이와 나는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해한 이의 눈을 바라보는 그때 나는 해한 이 가 하해의 죽음 이후에 마음에 큰 상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참으로 무해한 녀석, 나 만큼 힘들게 그 기억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해한의 기억과 추억을 보고 말았다. 해한이 녀석은 나 만큼 하해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렇게 그 아이와 공유했던 모든 추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 다만 해한이의 마음을 읽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소위 말하는 텔레파시라고 생각했다.
기억은 마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신을 보호하는 가장 강력한 방패이자
남을 해하는 가장 날카로운 칼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날 이후로 사람들의 기억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우리와의 기억과 추억, 그리고 사랑으로 매일의 고단함을 이겨내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그들이 가진 고유한 기억과 추억이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같은 날의 기억을 다른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나의 학교 친구들과 선생님들은 저마다의 기억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누군가는 그 기억으로 자신을 스스로 방어하고 살아가고 있었고, 누군가는 그 기억 때문에 다른 이를 날카로운 칼로 상처를 입히며 살아가고 있었다.
모두에게 상처가 있고 그 상처를 다른 기억으로 덮고 사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내 주변 사람들의 기억을 보게 된 나는 처음에 너무 혼란스러웠지만, 이것은 하해가 주고 간 선물이라 생각했다.
한참 후에야 나는 그들의 기억 속에서 한 가지를 발견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먹고 이야기하는 기억은 모두 추억이 되고, 그 추억은 살아가는 힘이 된다는 것이다.
나는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집 근처 초밥 집을 자주 갔었다. 하해에 대한 그리움과 나에 대한 원망이 나를 여전히 사로잡고 있던 때, 아버지는 나를 위해 초밥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가셨다. 그 초밥 집은 우리 동네뿐 아니라 인근에서도 손님들이 많이 찾아오던 식당이었다. 거기엔 장인정신이 온몸을 지배하시는 '장인애' 주방장님이 계신다. 그때 장주방장님은 아버지로부터 나의 이야기를 미리 전해 들으셨다. 주방장님은 그런 나에게 고등어초밥을 주셨다.
"억해야, 부산 사람들은 활어가 풍부한 곳에서 나고 자라서 이렇게 성질 급하고 죽으면 금방 산화되는 기름기 많은 생선들은 잘 먹지 않는다. 그런데 이 고등어가 숙성의 시간을 거치고 그 과정에서 요리사의 인고의 과정이 더해지면 얼마나 맛있는 생선이 되는지 한번 먹어볼래?"
그때 장인애 주방장님은 나의 눈을 정확히 주시하시며 이야기하셨다. 그때였을까? 나는 장인애 주방장님의 기억을 볼 수가 있었다.
매우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을 하던 수습생(見習い) 시절부터
처음으로 초밥을 쥐던 날의 기억,
드디어 배우게 된 구이와 찜,
일식의 꽃이라고 불리는 사시미를 손질하던 그날,
그 재료를 존중하며 다루는 모습,
그리고 처음으로 업장에서 주방장으로 인정받던 그때의 기억들,
자신만의 철학과 스타일을 확립해 나가던 수많은 시간들을 나는 오롯이 볼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단 하나였다. 사람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선사하겠다는 사명감이었다.
"억해야 뭐하노? 주방장님이 니를 위해서 이렇게 초밥 직접 잡아주시는데. 빨리 먹어봐라. 자슥아."
"아이고 참 본기씨 아한테 와그라노."
"아...아.. 네,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나는 잠시 넋을 놓고 있었다.
그 고등어초밥은 나를 다른 세상으로 인도했다. 매번 광어, 농어, 참가자미와 같은 흰 살 생선의 담백함만을 추구하던 나에겐 고등어의 그 기름지고 고소한 맛은 가히 말로 형용할 수가 없었다.
"와... 진짜 너무 맛있어요. 주방장님. 고등어가 어떻게 이런 맛이 나죠?"
"맛이 좀 다르지. 고등어도 아주 좋은 횟감이고, 그것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좋은 횟감이 될 수도 있고, 그냥 버려지는 잡어가 될 수도 있지. 누구나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나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사람에게 주어진 인고의 과정과 성숙의 시간이 이 고등어초밥처럼 다른 사람을 감동시키는 좋은 사람이 되게 할 거다."
나는 그때 큰 깨달음을 얻었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가던 그 초밥 집은 이제 폐업을 하고 없지만 나의 기억에 그대로 남아있다. 그때의 기억은 생생히 내 머릿속 깊은 곳에 있는 해마를 자극했다. 그 길로 나는 요리사가 되길 꿈꿨다. 여전히 힘들어하던 나를 아버지는 전국의 유명한 식당으로 데리고 다니셨고, 나는 그곳에서 먹은 음식과 분위기 다 기억했다. 미식가셨던 아버지와 손기술이 좋으신 어머니의 유전자를 물려받아 결국 나는 요리사가 되었다.
지금은 종로에 있는 원테이블 레스토랑의 오너 셰프이다.
"기억요리사"
나의 레스토랑은 철저히 예약제로 운영된다. 손님들과 사전 미팅 후 손님들의 추억에 있는 음식을 그들의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고 나는 그들의 추억하는 그 음식을 만들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닌다. 나는 그렇게 손님들의 기억을 먹고사는 요리사가 되었다.
0화 끝
다음화-기억요리사 1화 김치찌개
내가 종로에 '기억 요리사'라는 이름을 걸고 첫 주문을 받은 음식은 김치찌개였다. 그 음식은 어느 군인의 어머니의 레시피로 만들어졌다......
작가소개: 내 나이 마흔이 넘어서 글을 쓰고 싶어 도전하게 된 브런치작가 도전작. "기억요리사"는 실제 나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웹소설작입니다. 음식에 대해 단순한 레시피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스토리텔링이 있는 레시피를 전달하고자 연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아직은 신입작가도 아닌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수준이지만, "가치 없는 일들의 연속이 결국 가치 있는 일을 만들어 낸다"라고 믿고 있기에 이렇게 작가에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응원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