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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쑥라떼 Dec 01. 2024

기획자의 고정값


#1

최근 맡고 있는 브랜드의 출시 시기가 겹치면서 동시다발적으로 처리해야할 일들이 쏟아졌다. A 프로젝트의 기획서를 잡다가, 10분 뒤 B 프로젝트 관련 담당자와 통화하는 일이 빈번해지면서 마음의 여유가 밑바닥을 드러냈다. A에서 B로, B에서 A로 전환 비용을 최소화 할 수 있는 방법은 뭘까. 얼마나 집중해서 일하고 있나 능률을 따지기 시작했다.


#2

최근에 만난 선배가 '요즘 고민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졌다.
"기획할 건 쌓여 가는데 자는 시간을 줄여도 절대적인 시간이 모자를 땐 어떻게 해야 하나요? 

어디서 시간이 새고 있는지를 모르겠어요." 

'욕심' 대비 일의 '효율'이 영 좋지 않다는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선배는 뜻밖의 대답을 했다.


"기획을 할 때 생각이 복잡하니 일이 복잡해지는 거지.

기획자가 자기 기획에 확신이 없으면 일이 복잡해져. 이러면 함께 일하는 팀원도 불안해요."


결정은 단순해야 한다. 이 다음은 되게 만드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나는 완전히 몰입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간만 보고 있었던 건 아닐까. 내 태도가 나는 물론 함께 일하는 이들에게도 영향을 주었으리라. 머리가 복잡하다는 마음을 뜯어보면 결국엔 '불안'하단 얘기였고, 은연 중에 그 불안을 동료에게 나눠주고 있었다. 내가 나를 믿지 못해서 동료에게도 믿음을 주지 못했다.


#3

고정값 없이 일했다. 내 일이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때때로 희미해져도 되돌아갈 수 있는 지표를 꽂아두지 않았던 것이다. 불안하고 어지럽게 일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분명 일의 과정에서 중간중간 '기준'이 있었겠지만 휘발되어 버렸다.


사전적 의미로 값은 '어떤 사물의 중요성이나 의의'를 일컫는다. 일의 고정값은 내가 일을 할 때 중요하게 여기는 바뀌지 않는 대상이다. 각각의 프로젝트에 대입해보자면 해당 프로젝트 안에서 잃지 않고 지켜나가야 하는 중요한 기준점이 될 것이다.


#4

정답인 기획은 없다. 아무리 뛰어난 기획자도 제품이나 서비스가 소비자에게 어떤 반향을 일으킬지는 그저 예상할 뿐이다. 나의 예측이 맞기를 바랄 뿐, 100% 장담할 수 없다. 그럼에도 기획자는 '믿음'을 가져야 일을 끌어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회사 밖으로 나와 처음 키를 잡은 브랜드가 술이었다. '술도 잘 못 마시는' 내가 신규주류 브랜드를 기획하고 있다는 사실이 늘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혹여나 이것이 브랜드의 약점이 될까, 누군가 내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으로 허를 찌르진 않을까. 자잘한 불안감이 몸 어딘가를 배회하며 꿈틀댔다. 술 전문가, 술 덕후들을 모아두고 한 나절 FGI를 하면 될까, 수백명의 데이터를 모아 분석해볼까. 지금부터라도 설문을 해보자며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꽤나 정석적인 방법을 구상하고 있을 무렵, 해답은 의외의 장소에서 찾을 수 있었다.


"라떼님, 설문을 해도 전세계의 알콜홀릭을 다 조사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나요?"

"여기서 가장 고민을 많이 한 건 라떼님이잖아요. 라떼님을 조금 더 믿어봐요."


며칠을 고민하다 어렵게 러브레터를 보냈던 기획자 선배와 깊은 불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자리였다. 나에겐 너무나 단단해보이던 그도 수많은 불안을 넘어왔다고. 이런 사람이 우리의 기획을 좋아할거야. 예상했으면 믿고 가야지. 성공했다면 너무나 기쁜 일이겠지만, 아쉬운 결과가 오더라도 '그땐 그게 최선이었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물론 이러한 생각을 하기 위해선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야만'한다.


맞다. 이미 곳곳에는 힌트가 널려 있고, 수많은 이들은 나에게 길을 알려주고 있었을지 모른다. 지금까지 때를 만나지 못해서, 내가 내 발 밑만 보면서 걷느라 닿지 못했을 뿐.


#5

고정값을 만든다는 것은 나라는 '변수'를 다스린다는 말이었다. 문득 잡념이 떠오르거든, '저기 라떼씨, 고정값을 벗어나고 있잖아요.' 단도리를 하고, 다시 이탈하지 않게끔 루트를 따라가자. 결정을 미루고 주저할 시간에, 발산이 아닌 수렴한 에너지로 프로젝트를 완주할 수 있을 것이다. 라떼야, 불안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다스리는 거라고 너 스스로 몇 번을 되새겨 왔잖아. 몇 주전 스스로 일기장에 적은 문장을 일에서도 잊지 말아야 할 시기다.


#6

기본값 (default)과 고정값 사이.

기본값은 컴퓨터의 설정값처럼 타고난대로 살아가는 값. 혹은 내가 아닌 타인의 표준이라고 생각한다. 전자라면 타고나길 완벽하지 않고서야 최초의 설정값으로 살아가기엔 한계가 있을테고, 후자라면 업계 표준, 타인의 설정값일테니 아차,하면 부작용이 따르기 쉽다. 이를 테면 기본값을 채우지 못해 오는 박탈감이라던가 인정욕구.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잃어버리는 것 같은. 


고정값은 내가 재조정한 나만의 정의다. 불과 얼마전까지 나는 타인에게 내 삶의 의미를 대신 부여해달라며 고민의 무게를, 의미를 찾는 과정을 미루고 있었다. 나의 고정값을 프로그래밍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다는 걸 몰랐을리가. 고민 대신 요행을 바랬다.


#7

'각각의 일을 빨리 처리한다'는 납작한 해결책 대신 확신을 키울 수 있는 고정값을 만들 때다. 이 글을 적고 있는 지금 내일부터 나의 삶에 고정값이 자리잡았다는 말은 못하겠지만 이 고정값을 단단하게 만드는 방법은 알 것 같다. 


기획자로서 나의 고정값은 '가장 많은 정보를 갖고 가장 많은 생각을 하는 사람'. 내가 생각하는 페르소나의 모습은 이랬어. 그들은 어떻게 행동할까. 절대 다수의 시선이 아닌 나의 생각을 더 뾰족하게 만들어줄 대상을 찾아보자. 많은 소스를 확보하고 구체적으로 그림을 그린다. 변태같이 인과관계에 매달려보자. 그건 내가 잘 하는 일이잖아. 무언가 더 나은 답이 있을 것 같다면, 기존의 방향이 맞는 이유, 아닌 이유를 또 찾아보자. 되게 만들 수 있겠어? 어디가 '적답'이지? 


나의 예상에 힘을 싣을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보자. 사람이든, 사례든, 시스템이든. 고군분투한 서사도 차곡차곡 자리를 만들어두었다가 꺼낼 수 있는 기획자이고 싶다.


#8

브랜드내러티브 플래너. 말과 글이 들어가는 브랜드 콘텐츠 전반의 내러티브를 만드는, 일관된 이야기를 전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점검하고, 구조를 그리는 사람. 지금 써내려갈 수 있는 기획자 쑥라떼의 모습이다. 


'규정'짓다에서 '만들어간다'고 생각해. 섣부르게 찾으려던 키워드의 함정을 벗어나 생각을 틀었다. 없는 단어를 만들어내기도, 지금 무엇이다 '최종'이라고 말하지 않겠다. 최종인 줄 알았더니 최종의_최종_최종... 일수도 있는 게 왜 이상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건 어쩌면 박수칠 일이잖아?


존재하지 않는 무의 상태에선 아무리 좋은 재료가 등장해도 0이 될 가능성이 크다. 무에서 유가 아닌, 불완전하게라도 존재하는 무언가에서 곱하기 1, 곱하기 2, 3을 덧붙여 자연스레 계속해서 몸집을 키우는 사람이 되겠다.


#8

얼마전 유병욱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님의 메모를 보고 곧장 필사를 해 모니터 옆에 붙여두었다. (책 '인생의 해상도'에도 나오는 문장)


"생각이 쌓이면 관점이 되고 관점이 쌓이면 덜 불안해진다."


기획자 그리고 인간으로 느끼는, 이 모든 불안은 아직 흔들리기 쉬운 고정값을 지키려는 과정이구나. 생각을 관점으로 바꿔가는 과정. 경험을 늘려가는 과정밖에 없다. 요령은 안 통한다. 한 고개씩 넘기며 확신의 무게를 키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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