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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무 Sep 13. 2024

샴페인 (1)

서울 강남,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고급 오피스텔 안. 알렉스 '올인' 김은 열두 개의 모니터 앞에 앉아 있다. 이리저리 날뛰는 다른 화면들을 뒤로한 채 그의 시선은 오직 하나의 화면, 호가창 가격만을 노려봤다.


"드디어 왔어, 1달러..."


계획대로다. 이제 거의 다 왔다.  0.01달러에서 시작한 6개월간의 긴 기획이 100배나 뛰어올라 눈앞에서 찰랑거린다. 0.98. 과 0.99 사이를 오가는 호가창을 보며 숨을 참는다. 'CIRTEM' 코인의 가격이 마침내 1달러를 돌파했다. 


"형! 1달러 됐어요!" 


총 발행량 10억 CIRTEM. 현재 유통량 2억 개. 현시점 시가총액 2억 달러. 엄청난 숫자들도 이 순간 얼마나 팔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매도! 빨리!" 


제이슨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알렉스는 흠칫 놀라 키보드로 얼른 돌아갔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매도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는 숫자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원룸 바닥에 주저앉아 노려봤던 CPA 2차 시험 결과. 또 4점 모자란 원가회계. 유예. 청춘과 인생 유예. 


"알렉스, 체결됐어?" 


다행히 주문이 모두 체결되어 있었다. 20만 달러. 한화로 약 2억 6천만 원. 순식간에 그의 거래소 계좌에 입금되어 있었다. 손에서 흐른 땀에 키보드가 젖었다. 이번엔 놓치지 않았다.  


"형. 20만 개 팔렸어요." 

"일일 거래량이 1천만 달러니까... 한 번에 너무 많이 팔면 안 돼." 


창밖으로 한강의 밤이 펼쳐져 있었다. 수많은 불빛들이 강물에 반사되어 거래소의 호가창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강물은 만질 수 있지만 반짝이는 빛을 퍼올릴 수는 없다. 


"좋아, 차근차근 해. 남은 180만 개도 조금씩 팔아나가자. 하루에 10만 달러 정도씩."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새로운 창을 열었다. "네, 형. 이제 팀 물량 분배를 시작할까요? 우리 계획대로 진행하면 될까요?" 


제이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계획대로 해. 개발 및 운영팀에 300만 개, 마케팅 및 파트너십 팀에 200만 개, 어드바이저들에게 100만 개. 그리고 잊지 마, 생태계 발전과 사용자 보상용으로 150만 개, 예비 물량으로 50만 개를 따로 설정해야 해." 


알렉스는 신중하게 각 항목을 메모했다. "네, 형. 총합 1000만 개도 맞아요. 숫자 잘 확인할게요." 

제이슨이 모니터를 눈에 고정한 채 대답했다. "한 번에 다 주지 말고 3개월에 걸쳐 천천히 풀어줘. 락업 기간을 두는 거지." 


알렉스는 신중하게 트랜잭션을 만들기 시작했다. 각 팀과 개인의 지갑 주소를 확인하고, 분배 계획을 세우는 데 집중했다. 


제이슨은 계속해서 지시를 내렸다. "PR팀에 연락해. 1달러 돌파 기념 프레스 릴리즈를 준비하라고 해. 그리고 앞으로 며칠간 더 적극적으로 대응하라고 전해. 우리가 얼마나 혁신적인 기술을 가졌는지, 어떤 대기업들과 파트너십을 논의 중인지 적절히 흘려야 해."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PR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형, 텔레그램 채널은 어떻게 할까요?" 

제이슨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커뮤니티 매니저들에게 연락해. 24시간 채널을 모니터링하고 긍정적인 분위기를 유지하라고 해. 가격 상승에 대한 근거 없는 루머는 삭제하되, 적당히 기대감은 유지시켜야 해. 그리고 가능하면 우리 팀원들이 익명으로 활동하면서 분위기를 띄우도록 해."  


알렉스는 먼저 텔레그램 앱을 열고 'CIRTEM 커뮤니티 매니저' 그룹 채팅방에 메시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지시사항 전달드립니다. 즉시 점검 바랍니다. 

1. 24/7 채널 모니터링 강화

2. 긍정적 분위기 유지 필수

3. 적정 수준의 기대감 유지

4. 가격 하락 루머 즉시 삭제

5. 팀원들 익명 활동으로 분위기 고조 필요


마지막으로, 그는 팀 내부 메신저에 접속해 개발팀, 마케팅팀, 그리고 어드바이저들에게 각각 메시지를 보냈다. CIRTEM이 1달러를 돌파했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트랜잭션 만들었고 수분 내로 전송됩니다. 하지만 아직 긴장을 풀 때가 아닙니다. 각자의 역할에 더욱 집중해 주시기 바랍니다. 모든 메시지를 발송하고, 이메일을 전송한 후 알렉스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다했어요. 드디어."  


자신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자신감에 알렉스는 스스로 놀랐다. CPA 시험 결과를 확인할 때의 그 떨리는 목소리와는 전혀 달랐다. 제이슨이 깊은숨을 내쉬었다.  


"배달시키자. 팁 많이 주고. 샴페인은 상황 봐서."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에는 피로와 긴장, 그리고 새로운 세계를 정복한 듯한 승리감이 어려 있었다. CPA 시험에서 느꼈던 그 무력감은 이제 찾아볼 수 없었다. 답지를 아는 시험, 하지만 부정행위는 아닌 합격증이 눈앞에서 나풀거렸다. 


창밖의 한강은 여전히 고요했다. 그 잔잔한 수면 위로 무수히 반짝이는 불빛들처럼, 알렉스의 마음속에서도 복잡한 감정들이 일렁였다.  알렉스가 짜지 않은 피자, 제로 콜라, 그리고 '인피니움 타워에 계신 분들은 배달팁 2,000 원 추가부탁 드립니다.'는 메뉴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출발하실 때 전화 주시면 내려가서 받겠다는 자동 저장 배달요청사항을 확인하고 주문 버튼을 누른다. 제이슨이 천천히 거실 쪽으로 걸어가며 양팔을 크게 돌렸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카펫이 발바닥에 푹신하게 눌렸다. 


"후..." 


깊은 한숨과 함께 그는 유리창 앞에 섰다.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창문을 열자 아우성이 뒤섞인 서울의 백색소음이 기다렸다는 듯이 들어왔다. 서울의 밤공기가 훅 들어왔다. 차가운 바람이 여전히 핸드폰 화면을 보고 있는 알렉스에게까지 닿았다. 


제이슨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밤공기에는 아직 여름의 끝자락이 남아있었지만, 어딘가 선선한 가을의 기운도 느껴졌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사무실 안을 바라보았다. 배달 주문을 마친 알렉스는 여전히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모니터의 푸른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야, 너도 좀 쉬어." 


알렉스는 고개를 들어 제이슨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피로 속에서 펄펄 끓었다. 


"네, 형. 이제 원화 계좌로 옮길게요." 


제이슨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차트 막대 같은 빌딩, 붉은색, 초록색 신호등에 맞춰 엉금엉금 기어가는 자동차 줄기들이 차트 그래프처럼 이어져 있었다. 작은 진동소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제이슨이 순식간에 꺼내 들었다. 화면을 확인한 제이슨이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알렉스의 휴대전화 화면에 배달 출발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알람이 깜빡였다. 


'팡!' 


샴페인 마개가 힘차게 날아갔다. 거품이 바닥까지 시원하게 흘러넘쳤다. 느닷없이 샴페인을 터뜨리고 실실 웃는 제이슨을 알렉스가 무표정하게 바라봤다. 


"봤냐?" 


한 마디 던진 제이슨의 모습이 유리창에 희미하게 비친다. 한강을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에 지금껏 한 번도 못 봤던 승리의 미소가 보였다. 알렉스는 컴퓨터 화면에는 CIRTEM 코인의 가격 차트가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고 있었다. CIRTEM의 차트가 그림을 그리며 1.5달러까지 치솟아 있었다. 제이슨이 휴대전화를 받아 들고 팀원들에게 넉살 좋게 덕담을 나눴다. 네, 그럼요. 다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제 좀 쉬겠다." 


제이슨이 환하게 웃으며 소파에 몸을 던져 누웠다. 


"형, 1.5달러에 5분할로 매도 걸어 놓은 것도 다 팔렸어요. 가격이 너무 빨리 오른 거 아니에요?" 


알렉스가 두려움과 설렘 사이를 바들바들 떨며 말했다.  


"내버려 둬. 개미들 몰려오는 거 뻔하지. 체결가 조금만 더 높게 올려놓고 이제 진짜 쉬자."


제이슨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거래소 계좌에 들어온 30만 달러를 보는 알렉스의 눈에 핏기가 올라왔다. 제이슨이 가죽 소파 위에서 부스럭거리며 중얼거렸다. 


"내가 사람은 잘 봤다니까."


알렉스가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의아한 표정으로 형을 바라보았다. 


"무슨 뜻이에요?"


제이슨은 잔에 남은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우리 고시준비반 휴게실에 같이 있었을 때 생각이 나서. 너 CPA 떨어지고 인생 망했다고 엎어져 있었잖아."


알렉스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근데 난 그때 네가 우리 팀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왜요?" 알렉스가 물었다. 


제이슨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올인해 봤잖아. 그리고 아쉬운 실패가 뭔지 알잖아." 


알렉스는 책상 위에 붙여뒀던 어떤 러시아 문학가의 인용구를 떠올렸다. <성공한 수험생은 모두 비슷하지만, 실패한 수험생들은 저마다 다른 이유로 불행하다.> 알렉스가 노려보는 눈빛을 순식간에 가렸다. 


"그래도 좋지 않냐? 회계사가 이제 네 을이잖아?" 


알렉스가 무슨 대답을 하려던 찰나 다시 제이슨의 전화기가 울렸다. 


"네. 네, 네, 알겠습니다. 네, 맞아요. 네, 그렇죠. 아 네, 네..." 


알렉스는 형의 반응을 보며 살짝 웃었다. 수화기 너머로도 들릴 정도로 크고 빠르게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렸다.  


"아 그래요? 대단하네요. 네, 계속 그렇게 해주세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네, 알겠습니다." 


겨우 전화를 끊은 제이슨이 한숨을 쉬었다. "누가 마케팅 팀장 아니랄까 봐." 


"여기까지 들려요." 알렉스가 웃으며 말했다. 


제이슨은 고개를 저었다. "사람은 잘 봤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 기업 회장님처럼 말을 하냐는 말을 꾹 눌러 담았다. 드디어 서울에 집 한 채. 그렇게 되고 싶었던 회계사로 수십 년 일해야 모을 수 있는 돈이 계좌에 들어온다. 제이슨은 계속해서 울리는 전화에 한숨을 쉬었다. 


"다들 돈 좀 벌었다고 난리네."


피곤한 표정으로 일어서는 제이슨의 몸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 


"방에 들어가서 전화 좀 받고 올 테니까 배달 오면 받아 놔. 팁 많이 주고." 


알겠다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제이슨의 방 문이 닫혔다. 제이슨이 방문을 닫자마자 알렉스는 휴대폰을 꺼내 부동산 앱을 열었다. 손가락으로 화면을 스크롤하며 둘러본 서울의 아파트 매매가 20억. 아직 조금 모자라다. 


"띵동!"


다른 동네에서는 볼 수 없었던, 유난히 친절하고 사려 깊은 배달원의 모습이 곧 현관문 카메라에 비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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