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 볕 든 날의 이야기
재개발이 추진되고 있던 구도심의 비싸지 않고 조용한 작은 주택을 전세로 얻었다.
자동차 진입이 불가능한 골목 안쪽 집이었다.
그곳에서 둘째를 출산했다. 내 나이 34살이었다.
두 살 터울 큰아들이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까지 나는 아이들만 키웠다.
열심히 키운 아이들이 유치원을 다니면서 나에게는 혼자 있어도 되는 시간이 늘었다.
걱정도 늘고 있었다. 나는 무엇을, 어떻게든... 해야만 했다. 쓰지 않고 아껴쓴다고 해도
외벌이 남편의 수입으로는 한 달을 살고 나면 제로였으니까.
30살이 되도록 나는 돈이 없었다.
아주 오랫동안 돈이 없는 채로 살아오신 가난한 엄마와 아빠...
거기다가 아빠는 뇌출혈로 쓰러진 뒤 그 후유증 편마비로 종일 누워계셔야 했다.
웃음도 기쁨도 희망도 꿈도 없었다. 불필요하고 거추장스러운 젊은 시간들은
그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달마다 날아오는 공과금을 처리해야 했고,
가난으로부터 시작된 고된 불행은 중졸이었던 나를 어른스럽게 키우지 못했다.
30년.... 성장과 성숙의 과정을 거치지 못한 작은 인간, 여자, 생명체였을 뿐
그렇게 모자란 채로 남자를 만났다. 내가 조명, 배선기구를 판매하는 작은 조명가게에서 일할 때였다.
남자는 전기배선작업을 위해 며칠동안만 고용된 작업자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자연스럽고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우리는 서로 전기가 통했다.
다행히 남자는 전세 800만 원짜리 작은방을 얻어서 혼자 살고 있었고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에게는 그 남자의 자취방이 나의 피난처가 되어줄 천국 같았다.
남편과 나의 짧은 연애... 긴 동거가 시작됐다.
함께 살기 위해 나는 최선을 다했다. 최선을 다해 이뻐지려고 했고, 최선을 다해 착했다.
그리고 많은 이해심과 배려심이 요구되는 동거였지만
착하고 예쁘게 요리 잘하는 여자이면서 친절하고 다정하게 구는... 그런 여자 역할에 충실했다.
큰아이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나는 용기를 내기로 했다.
큰가방을 둘러메고 학교로 향하는 아이의 뒷모습이 어쩌면 나에게 용기를 주었는지도 모른다.
저 작은아이가 세상으로 당당히 걸어가고 있구나!
엄마도 용감하게 도전해볼게.
내가 잘 해낼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과연 잘 할수 있을까? '나' 라는 사람이 뭘 할 수 있을까?
두렵고 어렵고 무서윘다.. 나를 믿을 수 없는 내가... 나에게 허락해야만 하는 일을 결정하기로 했다.
소자본 투자여야 하고, 아이들을 돌보면서 할 수 있어야 하고, 집과 가까워야 하고,
월세 없이 전세로 구할 수 있는 곳이면서, 입지에 크게 영향 받지 않을 수 있는 일...
남편은 보너스로 받아서 모아 둔 700만 원을 나에게 건넸다.
아마도 그 돈은 전세금을 빼면 우리의 전재산이었을 것이다. 남편 또한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다행히 재개발은 늦어지고 있었고, 구도심의 낙후된 동네이다 보니 오래된 빈점포들이 많았다.
집과 가까운 8평 작은 점포를 전세 500만 원에 구할 수 있었다.
밀가루 20키로, 18리터짜리 식용유 한 통, 튀김솥... 그리고 구청허가, 작은 간판, 가스설비 등등
엄마가 어릴 적 만들어주셨던 약과를 만들어 팔아보기로 했다. 배운 적은 없는데 먹어본 과자..
엄마의 눈대중 레시피로 반죽을 하고, 발효를 거쳐 밀대로 밀어 잘라서 튀기고, 시럽에 버무려 포장을 했다.
10키로 밀가루를 손반죽 하고, 반죽을 밀대로 밀어대며 자르는 일과, 200도가 넘는 기름 앞에서
50분 가까이 튀겨 내는 일은 꼼지락 거리면서 예쁘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뜨거운 시럽에 과자를 버무리고 나면 내 얼굴도 함께 튀겨지고,
뜨거운 열기에 버무려진 것처럼 화끈거리며 빨개졌다.
그 조용한 동네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걱정어린 눈길을 받아가며 떡도 돌렸다.
3월 12일 개업식날 나에 첫 수입은 40,600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