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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장찌개

딸이 좋아하는 음식

by 어니스트 정

추석 연휴 마지막 날, 고향에서 돌아온 저녁 9시. 현관문을 여는 순간 와이프가 소파에 그대로 쓰러졌다. 고향에서 3일간 아침 7시에 기상, 음식 준비, 설거지, 다시 음식 준비. 내가 뭘 도울 수 있었을까. 최소한 내일 아침만큼은 내가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오전 8시,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딸아이가 배고프다고 아우성이다. 먹성 좋은 딸은 식사 중에도 배고프다고 하니, 한창 크려나 보다. 부엌으로 향하면서 냉장고 문을 열었다. 김치, 계란, 두부 한 모, 애호박 반쪽. 추석 전에 장을 보지 않아 냉장고가 텅 비어 있었다.


“된장찌개 어때?”

“좋아!”


딸은 파스타, 피자, 떡볶이를 좋아하지만 한식 중에선 된장찌개만큼은 거부하지 않는다. 추석 동안 기름진 음식을 먹었으니 오늘은 구수한 게 당길 때다.


뚝배기를 꺼내고 물을 붓는다. 된장 한 숟가락 반, 다진 마늘 반 스푼, 야채 코인 육수 하나. 그리고 냉동실 깊숙이 있던 원형 청국장 1/4조각을 꺼낸다. 나의 된장찌개 비법은 5년 전 어머니로부터 전해 들은 청국장 활용법을 고수하는 것이다. “엄마 된장찌개가 왜 이렇게 구수해요?” “청국장 조금 넣어. 그럼 맛이 나.” 그날 이후 나는 청국장을 냉동실에 항상 보관한다. 4등분 해서 한 조각씩 쓰면 한 달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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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글보글 끓기 시작하면 두부를 1.5cm 정육면체로 자른다. 딸이 숟가락으로 먹기 좋은 크기다. 두부를 넣고 2분 더 끓인 후 애호박을 0.5cm 반달 모양으로 썰어 넣는다. 대파는 어슷하게. 마지막으로 청양고추 반 개를 넣었다.


딸이 거실 책상에 앉아 수학 문제집을 펼쳐 놓고 있었다. “다 됐어. 밥 먹자.” 딸이 식탁에 앉고, 뚝배기 뚜껑을 열었다. 하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가장자리가 부글부글 끓는다. 두부가 국물을 머금고 부푼 모습이 보인다. 애호박은 초록빛을 유지한 채 말랑해졌다. 딸이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서 호호 불어 맛본다.


“맛있다.”


딸의 짧은 한마디가 내가 요리를 계속하게 되는 마법의 언어가 된다.


된장찌개를 끓이며 나는 ‘때’라는 단어를 다시 생각했다. 외국에서는 된장을 약처럼 먹는다는데, 아이들은 아직 된장찌개를 ‘영양가 있는 음식’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그저 “오늘 먹고 싶은 음식” 목록에 가끔 들어갈 뿐이다. 하지만 언젠가 아이들에게 된장찌개가 '아빠를 기억하게 되는 맛'이 될 거라는 걸 안다.


나도 초등학생 때는 비엔나소시지, 라면, 떡볶이만 좋아했다. 나물은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된장찌개보다는 김치찌개에 라면 사리를 넣어달라고 조르던 아이였다.


그런데 대학교 1학년 겨울, 기숙사에서 혼자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친구들은 모두 집으로 내려가고 나만 남아 있던 날, 학교 앞 김밥천국에 들어갔다. 메뉴판을 보다가 문득 된장찌개가 눈에 들어왔다. “된장찌개 하나요.” 뚝배기가 나오고,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된장찌개를 첫 숟가락을 떴다. “이게 이렇게 맛있었나?”


입맛에도 때가 있다. 아이들이 지금 좋아하는 음식이 평생 좋아하는 음식은 아니다. 반대로 지금 먹기 싫어하는 음식이 10년 후에는 가장 그리운 음식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이 조금씩 건강한 음식을 찾아가기를 바라본다. 지금은 그때가 아닐 뿐이다.


하지만 부모로서 할 수 있는 건, 그 ‘때’가 왔을 때 아이들이 기억할 수 있는 맛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딸이 20대가 되어 혼자 자취하다가 문득 "아빠가 끓여준 된장찌개"를 떠올릴 수 있도록, 나는 쌀뜬물로 된장찌개를 끓이며 깊은 구수함을 만든다. 그리고 청국장 1/4조각을 잊지 않고 넣는다. 어머니가 내게 준 맛을, 나는 딸에게 전달한다.


추석 연휴를 보내고 온 당신도, 냉장고가 텅 비어 있다면 된장찌개를 권한다. 기름진 음식으로 무거워진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을 받을 거다. 레시피는 간단하다. 물 500ml, 된장 1.5스푼, 청국장 1/4조각(선택), 다진 마늘 반 스푼, 두부 1/3모, 애호박 1/4개, 대파 10cm. 끓이는 시간 10분. 바쁜 아침에도 충분히 가능하다.


와이프는 오전 11시에 일어났다. 나는 뚝배기에 남은 된장찌개를 데워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 추석 연휴 동안 고생했어.” 와이프가 숟가락을 들고 한 입 먹더니 말했다. “구수하다.” 그 한마디가 내겐 보상이었다. 건강한 음식을 만들어 가족이 먹는 모습을 보는 것. 이게 내가 아침 식사 당번을 자처하는 이유다.


바쁜 당신을 위한 3줄 팁

• 청국장 1/4조각을 넣으면 구수함이 2배가 된다.

• 쌀뜬물로 끓이면 국물이 텁텁하지 않고 깊은 맛이 난다.

• 두부는 아이 입 크기에 맞춰 1.5cm 정육면체로. 숟가락으로 먹기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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