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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재해석

선택의 힘

by 어니스트 정

헬스장에서 러닝머신 위를 달리며 숨이 차오른다. 땀이 흘러내리고 다리가 아파오는데도 계속 달린다. 멈출 수 있는데 멈추지 않는다. 김영하 작가의 말처럼 "스스로 부과하는 고통"이다. 러닝머신은 19세기에 죄수들을 고문하기 위한 기구였다. 같은 기계가 고문에서 건강을 위한 도구로 바뀐 것이다. 무엇이 변화를 만들었을까? 바로 '선택'이다.


죄수들에게는 강제였지만, 우리에게는 선택이다. 차이가 모든 것을 바꾼다. 같은 고통이라도 내가 선택했을 때는 성장의 계단이 되고, 강요당했을 때는 파괴의 도구가 된다.


고통을 무조건 피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영하 작가는 '잘 통제된 고통'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끝이 있고, 멈출 수 있고,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의 고통 말이다.

바디프로필을 찍기 위해 탄수화물을 줄일 때, 집에서 쉬고 싶지만 가족을 위해 여행을 가야 할 때, 해야 할 업무가 산더미지만 내 생각을 정리하여 글로 옮기고 싶을 때. 모두 '잘 통제된 고통'이다. 사람들이 고통이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도 분명하다. 내가 선택했기 때문이다.


삶이 늘 선택권을 주는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 천주교도들이 마주한 박해, 성경 속 욥이 겪은 시련처럼 우리가 원하지 않는 고통이 찾아온다. 김영하 작가는 천주교도들을 "인간 정신의 불가해한 영역"을 가진 존재라고 표현했다. 무언가를 믿었기에 고통도 견딜 수 있는 "무시무시한 존재"라고 말이다.


의미를 알 수 없는 고통이 다가왔을 때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


요람에서 무덤까지, 고통은 우리 삶의 일부다. 스스로 선택한 고통은 나를 강하게 만들어준다. 하지만 이별, 실패,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들 앞에서는 다른 종류의 힘이 필요하다.

우리에게도 "불가해한 영역의 힘"이 필요하지 않을까? 조선시대 천주교도들에게는 신앙이었고, 욥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었다.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일 수도 있고, 더 나은 세상에 대한 희망일 수도 있다. 아니면 단순히 내일이 오늘보다 조금이라도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일 수도 있다.


고통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고통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중요하다. 19세기 고문 기구가 21세기 건강 기구가 된 것처럼, 우리도 고통을 다시 읽을 수 있다.


선택할 수 있는 고통은 성장의 도구로 활용하고, 선택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는 나만의 "불가해한 영역"을 찾아 견뎌내는 것. 김영하 작가가 던진 메시지를 통해 얻은 답이다.


고통은 여전히 아프다. 때로는 내가 선택한 성장의 증거이고, 때로는 견뎌내야 할 인생의 시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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