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
오늘 아침, 팔뚝에 생긴 좁쌀만 한 수포가 어제보다 더 커져 있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화요일 아침 팔뚝이 간질거리길래, 그냥 모기에 물렸겠거니 했다. 수요일이면 가라앉겠지, 설마 큰일이야 있겠나 싶었다. 하지만 목요일 아침, 선명히 커져 있는 수포를 보니 마음이 불편해졌다. 나이 들며 몸의 작은 변화에도 괜히 예민해지는 게 사실이다. 젊을 때는 대충 넘겼던 일도 이제는 ‘혹시 큰 병의 전조가 아닐까?’ 하는 불안이 스며든다.
얼마 전 뉴스에서 사람들이 GPT에게 의학적 조언을 묻는다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었다. 호기심 반, 걱정 반으로 팔뚝 사진을 찍어 GPT에게 보여주었다. 질문이 이어졌고, 나는 성심껏 답했다. 결과는 ‘대상포진보다는 알레르기나 벌레에 물린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참고용일 뿐이니 최종 판단은 의료진에게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통증이 없으니 대상포진은 아닐 것 같다는 말에 잠시 안도했고, 포비돈을 바른 뒤 출근길에 올랐다. 그러나 금요일 아침에도 수포는 여전했고, 오히려 더 커진 것 같았다. ‘이거 왜 이러지?’ 하며 또다시 포비돈을 듬뿍 발랐다.
점심 무렵, 어깨가 뻐근해졌다. ‘설마 대상포진이 이제 시작되는 건가? 아니면 단순한 근육통일 뿐일까?’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오른쪽 귓불마저 뜨끈한 기분이 들어 마음은 더 뒤숭숭했다. 동료가 내 팔뚝의 갈색 소독약 자국을 보며 물었다.
"왜 그래요, 팔이?", 그간의 ‘병세(?)’를 줄줄이 늘어놓았다. 동료는 “얼른 병원에 가보라”고 권했다. 내가 “GPT가 괜찮다던데”라고 하자, 그는 “통증 없는 대상포진도 있다”며 다시 한 번 단호히 말했다. 그 말에 불안은 곧바로 공포로 바뀌었다.
칼퇴 후 동네 피부과로 향했다. 예약이 없으면 두 시간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대기실은 한산했지만 예약자들이 15분 단위로 줄줄이 들어갔다. 나도 5시 10분에 도착해 7시 20분이 되어서야 진료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두 시간 넘게 기다린 끝에 받은 진료는 고작 30초 남짓. 의사는 통증 여부와 다른 부위 증상 유무만 묻고는 약을 처방하며 “월요일에 다시 내원하세요. 지금은 대상포진인지 판단하기 이릅니다.”라 했다. 허탈했지만, 한편으로는 ‘아직은 아니다’라는 말에 안도도 느꼈다.
집에 들어온 건 8시 10분. 아내는 회식으로 아직 귀가 전이었다. 아침에 만들어둔 유부초밥 세 덩이는 식탁 위에 그대로 굳어 있었고, 싱크대엔 라면 그릇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딸은 복숭아를 깎아달라며 칭얼대고, 아들은 유튜브에 빠져 있었다. 지쳐 있던 탓일까, 내 목소리는 점점 날카로워졌다. 결국 아들의 닌텐도를 빼앗고, 안방에서 TV를 보던 딸에게는 TV를 아예 치워버렸다. 짜증내는 아이들과 더는 말을 섞지 않고, 빨랫감을 세탁기에 몽땅 밀어 넣고 돌렸다. 설거지를 하고, 방 구석 먼지를 닦았다. 스스로도 왜 이렇게 예민해졌는지 알면서도, 감정의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았다.
돌이켜보니 지난 한 주간이 문제였다. 새로운 자동화 코드를 짜느라 매일 새벽까지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고, 하루 다섯 시간 남짓 자는 게 고작이었다. 성취감은 컸다. 코드가 돌아가고, 복잡한 업무가 자동화되는 순간은 묘한 쾌감과 보람을 줬다. 하지만 그 대가는 혹독했다. 몸은 정직했다. 작은 수포 하나가 나를 무너뜨렸다. 불혹을 넘기고 이제 50을 바라보는 나이. 더는 잠과 건강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건강은 눈에 보이는 성과물과 달리 당장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놓치기 쉽다. 젊을 때는 야근도, 밤샘도, 커피로 버티는 생활도 대수롭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작은 수포 하나에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어깨 뻐근함에도 온갖 병명을 떠올리게 된다. 이 불안은 단순히 몸의 신호 때문만은 아니다. 가족을 책임지는 가장으로서의 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혹여 내가 쓰러지면, 남은 가족들은 어떻게 될까. 아이들 학비, 대출금, 생활비…. 그 무게를 떠올릴수록 사소한 증상 하나에도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집안의 풍경 역시 나를 비추는 거울 같다. 퇴근 후 집에 들어와 맞닥뜨리는 식탁 위의 유부초밥, 싱크대의 설거지감, 유튜브에 몰입한 아이들…. 이런 모습은 아마 많은 아버지들이 공감할 것이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와 안식처를 기대하지만, 오히려 또 다른 전쟁이 기다리고 있다. 순간 욱하는 마음에 아이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기기를 빼앗고, 뒤돌아서는 나 자신을 보면 씁쓸하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예민해졌을까? 아이들에게 상처 주고 있는 건 아닐까?’ 자책이 밀려온다. 그러나 동시에 ‘이게 현실이지’라는 체념도 스며든다.
아무리 바쁘고 재미있는 일이 있어도, 수면을 희생하면서까지 몰입하는 건 위험하다. 건강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 전체의 문제다. 아버지의 건강이 무너지면, 가족 전체가 흔들린다. 내가 잘 버티는 게 가족을 위한 최소한의 책임이라는 걸 이제야 뼈저리게 실감한다.
처방받은 약이 잘 듣기를 바란다. 내일 아침엔 수포가 줄어들었으면 좋겠다. 이제는 무엇보다 나 자신을 돌보는 일이야말로, 가족을 지키는 길이라는 걸 잊지 않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