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과 신사회운동의 만남
런던코뮌
서영표 지음/이매진
읽을수록 진보정당의 과제가 무겁게 느껴진다. 미처 다 읽지도 않고 이 글을 쓰는 것은 얼마전 한 정당활동가의 푸념(진보정당활동가는 우러러보지만 그 정당을 보는 시선은 차갑다는 말)과 분당 사는 후배가 이재명 시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자신 주변의 기자녀석들은 그를 또라이로 본다는 말)는 질문 때문이었다.
서평을 찾아보니 과거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 후보로 연달아 출마한 노회찬 의원과 김종철씨가 이 런던 지방정부의 실험을 자신의 주요한 정책방향으로 삼았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런던지방정부의 실험은 한마디로 신사회운동과 정당운동의 결합이다. 70년대말 영국의 중앙정부는 마가렛 대처가 집권하면서 복지국가의 해체와 공기업의 민영화가 이어졌다. 이에 대항해 지방정부를 장악한 노동당(내 신좌파)은 급진민주주의의 실험을 시도한다. 중앙정부의 민영화 시도에 대항해 필수적 사회서비스의 공급과 시민사회단체들과 풀뿌리 조직 등과 함께 자신들의 정책 집행 계획을 검토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당사자위원회’의 광범한 운영이다. 이를 위해 시민사회단체들에게 지급된 예산이 상당한 규모에 이른다고 한다.
다시 한국 상황으로 돌아오면, 이런 영국 급진적 지방정부의 실험은 아이러니하게도 박원순 서울시장 등과 같은 단체장을 통해 재연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영국의 그것만큼 급진적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은 것이 청년, 마을, 사회적경제, 공유경제 등의 한정된 분야가 아닌 주택과 교통 같은 공공인프라를 공급, 운영하는 과정에 광범한 이해관계자들을 참여시키지는 못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피상적인 수준에서 만족할 수밖에 없는 것은 구조적으로 시민사회가 미약하다는 것과 제도적으로 정당-지방정부 간 연계가 약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역시 자본주의의 발전과 시민사회의 형성이 병행된 유럽의 상황을 권위주의적 산업화와 정치적 민주화(라고 쓰고 탈규제라 읽는 것)을 압축적으로 겪은 한국의 2010년대와 단순 비교하긴 힘들다. 비교를 하려면 사회적 신뢰 수준과 협력의 정도가 우경화된 노동당을 노동조합의 반대편에서 끌어올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 그 정도 수준이면 사실 노동운동 자체가 신사회운동의 이슈와 접합되지 않을 수 없을 듯 하다.) 과연 한국에서 민주당이 아니라 그 어떤 정당이 시민사회의 결사들로부터 그런 변화의 압력을 받고 있는지 궁금하다. 무소속 시의원 배출한 과천 정도 될까? 서울에서 뺨 맞고 경남가서 화풀이 한 홍준표 도지사가 있는 경남은 어떨까? 공공성을 둘러싼 주민 공동체들의 요구는 정당을 변화시키고 권력을 변화시킬 정도가 되었나?
서울시 사례는 2010년 무상급식 이슈와 보궐선거라는 시기에 정당의 힘이 약한 상태(박영선 의원과의 경선에서 박원순 변호사의 승리)에서 우리나라 선거가 그렇듯 후보와 캠프가 주도한 선거였다. 시민사회의 많은 활동가들이 그의 선거에 합류했고 그후 시장선거의 승리와 시정의 변화로 시민들의 박수를 받았다. 그런데 소속 정당은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저 런던지방정부의 실험은 지방정부도 중앙정부와 마찬가지로 내각제(다수당이 집권하는 구조)라는 조건에서 가능했다. 즉 자치단체장의 교체가 의미하는 것이 한국 상황과 많이 다르다는 것. 영국 노동당의 치열한 당내 논쟁이 지방정부의 정책변화에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 이 책의 함의다. 그리고 그 당내 논쟁에 참여한 그룹이 당내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당 바깥의 여러 시민사회단체였다는 것.
따라서 한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문제는 박원순 시장의 이념적 한계가 아니라 정치를 다시 구성할 정당과 시민사회단체의 역할이다. 현 시장이 덜 급진적(그분들 표현대로 덜 혁신적)이라서가 아니라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정당을 비롯한 사회 결사체들의 형성이 지체되고 있어서다. 왜 그걸 꼭 기성정당이 해야하냐고 묻는다면 변화는 결국 현실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는 거 아니냐고 나는 말할 수밖에 없다. 무소속 의원이 많이 배출되고 군소정당이 숨 좀 쉬게 정치관계법을 바꾸지 않는 한 기성정당이 그 역할을 맡을 수밖에 없다는 거다. 선거제도를 바꾸고 헌법을 고칠 날을 기다릴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