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은 자연에 필적할 수 있는가

괴테의 <파우스트>

by 수련

계몽주의는 이성을 인간 최고의 가치로 끌어올리며 이성을 통해 세상을 보다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혁명에 가까운 인류의 발전을 이끌 것이라고 믿었다. 계몽주의의 태동 속에서 근대인들은 인간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인본적인 개념을 논의하기 시작했고, 독립된 인간이라는 가능성에 눈을 뜨면서 신의 계시나 구원과 같은 구질서에서 본격적으로 벗어났다. 신의 그림자에서 벗어난 인간은 왕권신수설 같은 종교적 개념보다 삼권분립을 이상적인 정치 형태로 보았고, 이는 오늘날 정치에서 강조되는 권력의 상호 견제와 균형 유지라는 중요한 이념의 모체가 되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희미한 빛처럼 주어진 이성은 단순히 밝은 면만 존재하지 않았다.

계몽주의 당시 근대인들의 정신을 사로잡은 또 다른 믿음은 이성의 힘으로 자연이라는 악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자연재해나 질병과 같은 악은 가시적이고, 파괴적이고, 초인간적이다. 이성에 힘에 기대어 자연이 주는 악에 필적하리라는 인간의 기대. 그것과는 반대로 인간 역사는 이성이 초래하는 악에 의해 지독한 고통을 겪었다.

자연이 주는 악은 눈으로 볼 수 있다. 지진이 건물과 도로를 내려앉게 만들고 페스트가 온 마을을 덮칠 때, 공포스럽고도 위협적인 악의 잔상은 우리의 머릿속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이성이 초래한 악은 어떠한가. 괴테의 <파우스트> 속 표현을 빌리자면, ‘천상의 빛’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허상에 가까운 관념이다. 하지만 인간의 정신을 사로잡는 광기, 집착, 욕망의 상태는 이성에서 비롯되었으나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를 곪고 병들게 하는 새로운 악의 형태를 낳는다.


자연이 주는 악은 물리적인 파괴를 동반한다. 해일은 온 마을을 덮쳐 모든 삶의 근거지를 파괴하고 재산을 모두 앗아간다. 역시 이성은 도구로 전락했을 때 선악의 가치판단을 흐리게 만드는 자기 파괴적 성격을 가진다. 파우스트 박사는 자신의 욕망이 선인지 악인지 도덕적으로 따지지 않은 채 메피스토와 계약을 맺었고, 무한한 불만족의 상태로 자신의 미래를 내던졌다. 이처럼 이성이 초래하는 악은 그 힘의 방향이 인간 내부로 향해있을 뿐, 자연만큼이나 파괴적으로 속을 헐어 버린다.


자연의 흐름은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전복시킬 수 없다. 특히 계몽주의 이전의 인간은 설명할 수 없는 재앙을 신과 하늘의 심판 따위로 이해했다. 그렇다면 이성은 인간이 완벽히 통제할 수 있는가. “이성의 끈을 놓는다.”라는 표현으로 대번에 이해되듯이, 인간은 때로 통제할 수 없는 외부 자극이나 본능적인 욕구에 의해 비이성적인 행위를 하게 마련이다. 메피스토는 이를 “인간은 신성과 동물적 본능 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하는 존재이다.”라고 표현했다.


파우스트는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파헤치고 자신의 안에서 세상의 최종적인 질서를 마무리하려 하는, 다시 말해 지상의 '신'의 경지에 도전하는 사람이다. 괴테는 무한하고 영원한 지식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파우스트를 통해 신에 대한 경외감에서 벗어난 근대인의 표상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성은 자연에 대응하는 또 다른 악일 뿐 자연을 완전히 정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긍정하게 된다. 아무리 지식을 좇으며 살아도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파우스트를 도리어 고통스럽게 만들지 않았는가.


하지만 우리가 안도할 수 있는 사실은, 신은 파우스트에 대한 믿음이 있다. 메피스토는 신의 완벽한 창조물인 인간은 오히려 신의 오점이며 자신이 얼마든지 경멸해줄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 무릇 완벽한 존재라면, 저토록 불만족의 상태에 젖어 살 수는 없을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신에게 인간은 본디 완전무결한 존재가 아닌 형성의 과정이다. 되어가는 것에 의미가 있고 선이 있는 존재라는 믿음이 불확실한 내일을 딛는 우리에게 위로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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