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집에 돌아왔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소파에 주저앉았다. 잠깐만 쉬었다 일어나려고 했다. 일어날 수가 없었다.
소파가 나의 체온으로 따뜻해졌고 그 따뜻함은 나를 더욱 붙잡았다. 호주머니 속 핸드폰을 꺼냈다. 핸드폰을 켜고 메시지를 확인한다. 아무 메시지도 없다. 회사를 그만둔 뒤로 특별히 자주 오는 메시지가 없다.
유튜브를 열었다. 어젯밤 손흥민의 축구 소식으로 영상이 가득하다. 하이라이트부터 분석 기사까지 이것저것 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국뽕에 차오른다. 축구의 본고장 영국에서 골을 기록하고, 한국선수로서 최고의 기록을 세우는 모습을 보면 정말 자랑스럽다. 독일에서 많은 차별과 편견을 이겨내고 세운 기록들이라 더 감동적이다. 내 일처럼 기쁘고, 자부심이 느껴진다.
영상을 보다가 문득 소파에 누워있는 내가 보였다. 부엌에는 아침 설거지가 쌓여 있었다. 청소기를 돌려야 하고, 계속 미루던 집안일들도 해야 한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싫었다.
'왜 이러지?‘
답이 없었다. 처음에는 괜찮았다. 새로 산 행주로 식탁을 닦을 때, 빨래를 개면서 아이 옷이 작아진 걸 발견할 때, 저녁상을 차리고 가족들이 "맛있다"라고 할 때. 주부로서 뭔가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것도 하루이틀이지.’
어제 설거지한 그릇에 오늘 또 밥을 먹었다. 오늘 빤 옷을 내일 또 빨 것이다. 방금 쓸었던 거실 바닥에 과자 부스러기가 다시 떨어져 있었다.
‘끝이 없다.’
생각이 많아지면 핸드폰에서 더 빠져나오지 못한다. 처음에는 목적이 있어서 핸드폰을 켰지만 알고리즘에 빠져 난 길을 잃고, 자극적인 영상들에 빠져있다.
'뭘 찾으려고 했지?‘
유튜브에, 인스타그램에, 페이스북에 나오는 스타와 이웃과 친구들과의 비교가 시작되면 난 더욱 방향을 잃고 소파에 붙어 버린다. 손흥민의 득점왕 소식에 더 열광하고, 스타들의 연예 기사에 평을 하고, 친구들의 여행 사진에 부러워한다.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아니, 핸드폰이 무릎 위로 떨어졌다. 손에 힘이 없었다.
부엌으로 갔다. 싱크대에 그릇들이 쌓여 있었다. 물을 틀었다. 미지근한 물이 나왔다. 겨우 설거지를 시작했다.
아침 먹고 물에 담가뒀던 탓에 설거지가 쉬웠다. 설거지를 마치고, 밥 먹었던 테이블을 닦고, 잠깐 식탁에 앉아 거실을 바라본다. 뱀이 허물 벗듯 벗어 놓고 간 아이들 잠옷, 어젯밤 놀다가 그냥 놓아둔 장난감, 읽다가 던져 놓은 책. 제자리로 가지 못하고 있는 것들이 보였다.
멍하니 그것들을 보고 있었다.
예전에 처음 주부아빠가 되었을 때 일이 생각났다.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이 바쁜 아침이었다. 아내는 일찍 출근하고 나는 아이들 셋을 밥 먹여서 학교와 어린이집에 보내야 했다. 그날 아침은 이상하게 기분이 우울했다.
첫째(9살, 남)는 느릿느릿 학교 갈 준비를 한다. 이웃에 계신 분이 학교까지 태워주셔서 늦으면 안 됐지만, 시간이 얼마 안 남아 초조한 나와는 달리 아이는 여유롭다. 둘째(7살, 여)는 옷 입는 것으로 한바탕 난리다. 어제 골라 놓은 옷이 맘에 안 든다며 아침부터 찡얼거린다. 어린이집 버스 올 시간은 다 되어 가는데 다른 옷을 갖다 달라고 한다. 난 셋째(3살, 남)를 붙들고 밥을 먹이느라 정신이 없다.
이 세 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나니 아비규환이 따로 없다. 다른 날 같으면 아이들을 시키거나 내가 하나씩 처리했을 텐데 그날은 나도 늦잠을 자서 미리 준비를 못한 탓에 더 엉망이었다.
갑자기 짜증이 폭발했다. 머리는 복잡하고, 감정은 혼란스러웠으며, 뭔가 큰 돌이 가슴을 누르고 있는 것처럼 답답했다. 난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소리 내어 울었다.
첫째는 무섭다고 밖으로 도망가고, 둘째는 조용해졌으며, 셋째는 웃고 있었다.
1분 정도의 시간이었다. 짧고 굵게 쌓인 감정을 토해냈다. 좀 마음이 후련해졌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추스르고 아이들을 챙겨서 학교와 어린이집에 보냈다.
갑자기 이날 일은 왜 생각난 거지? 식탁에 앉아서 그날 일을 생각하니 부끄럽기도 하고, 아이들의 반응이 웃기기도 하고, 다시 우울하기도 하고 많은 감정들이 교차했다.
회사에 다닐 때가 생각났다. 프로젝트를 끝내면 뿌듯했다. "수고했어요"라는 말을 서로 건넸고, 월급이 통장에 찍혔다. 숫자가 조금씩 올랐다. 내가 뭔가 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지금은? 한 달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뭐가 다른가. 일 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창밖을 봤다. 사람들이 걷고 있었다. 어딘가를 향해 가는 사람들. 나만 식탁에 앉아 멍하니 있었다. 시계를 봤다. 오후 2시였다. 이제 한 시간 후면 아이들이 돌아온다. 저녁을 준비해야 한다.
손흥민은 골든 부트(프리미어리그 득점왕에게 주는 트로피)를 받았다. 전 세계가 그를 축하했다. 나는 오늘 설거지를 했다. 아무도 모른다. 내일도 설거지를 할 것이다. 주부가 설거지했다고 뉴스에 나올 일도 없다.
몸을 일으켰다. 둘째가 내리는 어린이집 셔틀 정류장으로 갔다. 다른 아이 엄마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난 멀찍이 떨어져 아이를 기다린다. 아이가 버스에서 내리면 다른 엄마들과는 눈인사를 하고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온다.
냉동실을 열었다. 만두가 있었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만두를 올렸다. 뜨거운 기름에 차가운 만두가 닿으니 '촤~' 하고 소리가 났다. 프라이팬 뚜껑을 덮고 불을 줄인다.
"아빠, 배고파."
"응. 만두 굽고 있어. “
둘째의 간식을 챙겨주고, 셋째를 데리고 첫째를 픽업하러 간다. 그렇게 3명이 모두 집으로 돌아오고 마지막으로 바깥양반이 퇴근하면 저녁을 먹는다.
가족들은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다. 내가 하루 종일 소파에 누워 있었다는 것도, 내가 손흥민의 득점왕 소식에 얼마나 기뻐했는지도, 옛날을 생각하며 부끄러웠던 사실도.
"오늘 뭐 했어?"
바깥양반의 말에 흠칫 놀란다.
"뭐... 그냥... 이것저것 했지."
지레 찔려서 말소리가 흐릿하다.
"고생했어. “
아내는 전직 주부 출신이라 주부의 마음을 잘 안다. 미안하고 고맙다.
그날 밤,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봤다.
‘내일은 또 뭐 먹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