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2일 월요일
D-15,580
지금은 새벽 1시 20분.
오랜만에 쓴다.
일상기록을 잠시 멈추는 동안에 많은 이벤트가 있었다.
양도 양이지만 질적으로도 밀도 있는 일이 많았다.
먼저 회사 일. 꽤나 바빴다. 근 몇 년 만에 이렇게 바쁜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바빴다. 사실 작년에 좋은 제안이 있었다. 몇 해 전 다른 회사의 임원으로 이직한 이전 팀장님이 나에게 팀장직을 줄 테니 새로운 팀을 꾸려 같이 일해보자는 거였다. ‘회사보다는 사생활과 가정에 충실하자, 회사의 발전이 나의 발전을 책임지지 않는다’는 다분히 밀레니얼세대적 마인드로 감사한 제안을 거절했다. 몸값이 뛰고 성취감도 크겠지만, 이직하는 순간 지오가 커나가는 중요한 순간을 통째로 놓칠 것만 같은 불안감이 나를 지금의 회사 – 워라밸이 참 좋은 이회사 – 에 남게 했다.
그런데 지금 다 지난 이 얘기를 꺼낸 이유는, 연초부터 지금까지 눈코 뜰새 없이 바빴고 그 억울함을 여기에서라도 풀고 싶어서다. 아무튼 3월이 되면서 급한 불은 껐고 이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 그걸로 됐다. 이 바쁨이 우리 가족을 지킬 중요한 자양분이 됐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두 번째로 설이 있었다. 코로나로 고향을 안 간다는 집이 주변에 심심찮게 보였는데, 나는 다녀 왔다. 설날이 지나서라도 언제고 가족들 얼굴을 보고와야 나도 소영이도 마음이 놓이는 스타일이라 나중에 따로 휴가를 내서 다녀오느니 보장 받은 연휴에 다녀오자고 마음을 먹었다. 일년에 길어야 열흘도 채 보지 못하는 부모님, 여전히 보면 반갑고 여전히 헤어질 땐 헛헛함이 크다. 헤어지고 집에 돌아오면 마음정리가 느린 만큼 짐 정리도 느려서 짐을 며칠씩이나 쌓아두고 하나씩 정리한다. 그러다 보니 명절 연휴 후유증이 상대적으로 더 긴 편이다. 항상 명절은 일상의 항상성을 위협하고 깨뜨린다.
마지막으로 2월 18일 목요일, 가장 큰 이벤트가 있었다. 그주 초반부터 소영이가 자꾸 소화가 안되고 몸살 기운이 있다고 축 늘어져 있었다. 명절 때 기름진 음식을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가 싶어서 소화제도 사다 주고 해열제도 사다 줬다. 그런데 도통 차도가 안 보이는 거다. 소영이가 “혹시…”라며 조심스럽게 임신테스트기를 사다 달라고 하길래 목요일 아침에 편집실을 다녀오면서 별 생각 없이 집 앞 약국에서 테스트기를 샀다. 그리고 소영이 손에 건네주며
“내일 아침까지 기다리지 말고 지금 그냥 해봐. 이걸 봐야 빨리 병원 가서 검사 받고 위장약이든 감기약이든 타오지.”
라고 말했다. 당연히 아닐 거란 생각에.
그런데 웬걸, 너무나 선명하게 보이는 테스트기의 두 줄. 지오 때는 줄이 정말 희미하게 보여서 병원에서 결과를 받기 까지도 긴가민가 마음을 졸였었는데 이번엔 100미터 뒤에서 봐도 보일 정도로 두 줄이 선명했다.
얼떨떨했다. 웃음이 터졌다. 여전히 믿기지 않다가 놀라움에 입을 틀어막았다가 기뻤다가 웃음이 터졌다. 그러고 나서는 요즘 몸관리도 썩 못했는데 어떡하나 걱정이 앞섰다. 그러다가도 웃음이 터졌다. 좀더 넓은 평수로 이사를 가야 하나, 유모차랑 모빌은 처분 안 하길 잘했네, 범보의자는 팔아버렸는데 어쩌지, 카시트랑 아기띠는 좀 낡았는데 새걸 살까 따위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리곤 또 웃음이 터졌다.
이 놀랍고 감사한 소식을 들은 지도 벌써 2주가 지났다. 여전히 우리집은 얼떨떨함과 자꾸만 터지는 웃음이 공존하고 있다. 지금은 뱃속에 아기가 건강하고 소영이의 입덧이 빨리 진정되었으면 하는 게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