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경 <여행자의 철학법>
#아이디어 한 문장
살루테 성당 아래에 박혀 있는 것은
100만 개의 나무 기둥이라기보다는
도시를 재건하려는 시민의 의지이자 다짐
<여행자의 철학법> p. 211 (웅진지식하우스)
김효경 작가는 서른셋이 되는 해에 회사를 그만두고 훌쩍 여행을 떠났지요. 그러고 나서 지은 책이 바로 <여행자의 철학법>이에요. 이 책에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이 많이 나오는데 저는 그중에도 베네치아를 여행하고 적은 부분을 좋아해요.
4세기 경 아시아의 훈족은 로마로 진격했고 삽시간에 이탈리아의 요충지인 아퀼레이아를 함락했다고 합니다. “훈족이 어찌나 무서웠던지 말을 타고 낫을 흔드는 악마의 전설이 이때 생겨났”다고 할 정도니 아퀼레이아가 얼마나 처참히 짓밟혔을지 상상이 안 갈 정도지요. 아퀼레이아 사람들은 훈족이 쫓아올 것이 두려워 해안가로 도망쳤고 마침내 뻘밭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그 뻘밭에 수천 만개의 말뚝을 박아 도시를 세우는 데 그곳이 바로 물의 도시 베네치아에요.
역경 속에서 태어난 도시 베네치아는 17세기에 패스트라는 또 다른 시련에 맞닥뜨려요. 패스트로 베네치아 인구 1/3이 사망하자 베네치아 공화국 의회는 흑사병을 극복하기만 한다면 교회를 지어 성모 마리아에게 바치겠다고 선포하지요. 마침내 패스트가 물러가고 베네치아 공화국 의회는 100만 개에 달하는 나무 기둥을 박아 살루테 성당을 건설합니다.
살루테 성당을 포함한 베네치아의 땅 아래에 박힌 도합 수천 만개의 말뚝은 누군가에게는 물리적으로 그저 나무일 뿐이에요. 그렇지만 작가가 ‘그것은 나무가 아니라 도시를 재건하고 삶을 이어가려는 사람들의 의지이자 다짐’이라고 의미를 부여한 순간 베네치아가 지니는 의미는 다른 차원이 되어 버리지요.
김춘수 시인은 너무나도 유명한 작품 <꽃>에서 이렇게 노래하지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김효경 작가가 베네치아 아래에 박힌 말뚝을 “도시를 재건하려는 시민의 의지이자 다짐”이라고 알아봐 준 것처럼, 김춘수 시인이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누군가 나의 존재를 알아주고 나의 가치를 오롯이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기쁨은 얼마나 크고 깊을까요. 김효경 작가와 김춘수 시인 덕분에 저는 제 주변을 더 신중히 둘러보고 숨은 의미와 가치를 찾으려고 힘써요. 그 대상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현상이든 상관 없이 말이지요.
예전에 친구에게 어느 택시 기사님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그 기사분은 택시를 모는 일이 단순히 사람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태워주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해요. 그분이 정의한 택시운전의 본질은 그저 운임료를 받고 누군가를 태워주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을 그리워하는 누군가에게로 여행시켜주는 것’이었다고 해요. 이 이야기는 아직도 제 가슴 한 켠에 자리 잡고 큰 울림을 주고 있어요.
그리고 어디 그것뿐일까요. 택시운전이라는 건 때로는 임산부를 병원으로 데려가 생명을 구하고, 수능에 늦은 수험생을 학교에 태워줘 한 젊음의 미래를 구하고, 외국 사람을 목적지까지 편하고 안전하게 내려줘 국위선양을 하고, 어떤 면에서는 엄청 영웅적인 일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지요.
이게 비단 택시운전사만의 이야기는 아니지요. 금 세공사는 그저 반지 하나 만드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고백을 세공하는 것이고, 헤어스타일리스트는 단지 머리를 꾸며주는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자신감을 세팅해 주지요. 회사원도 의사도 교사도 치킨집 사장님도 누구 하나 중요하지 않고 고귀하지 않은 일이 어디 있을까요.
세상에 드러나 있는 사람과 사물, 현상의 표면을 보는 게 아니라 그 아래에 숨어 있는 가치를 찾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름을 붙이는 일, 저는 이런 일련의 일이 곧 아이디어를 내는 일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해요. 그냥 아이디어가 아니라 세상을 더 풍요롭게 만드는 아이디어 말이지요.
그렇다고 그 아이디어가 꼭 거창할 필요는 없어요. 길에 굴러다니는 돌을 주워 애완용 돌멩이로 삼아 위안을 얻는 일이나 태풍에 사과 농사가 망하자 몇몇 살아남은 사과에 태풍을 이겨낸 사과라고 의미를 부여하는 일, 뉴욕의 처치곤란인 쓰레기를 작은 팩에 담아 쓰레기 기념품으로 만들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일도 비슷한 맥락에서의 아이디어겠지요.
쉽게 지나쳤던 흔하디 흔한 우리 주변을 둘러보아요. 그리고 일상의 겉모습 아래 감춰진 가치들을 숨은 그림 찾기 하듯 들춰보세요. 그리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름을 붙여주어요. 그 순간이 바로 반짝거리는 아이디어가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영감 충전 지수(오점만점) : ★★★★
여행기이자 무겁지 않게 읽을 수 있는 철학서입니다.
유럽의 여러 지역의 이야기와 철학자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데다, 소소하고 재미있는 정보도 많아
(서양의 대표 아침 식사인 오므라이스가 알고 보면
15세기 피렌체 공의회 때 동양에서 서양으로 넘어간 거란 사실 등)
즐겁게 읽기에 충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