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겨울 빛이 어스름한 교실. 앞문을 열고 들어오는 선생님이 옆구리에 낀 것이 성적표라는 걸 알아본 순간 아, 하는 탄식과 함께 교실 안이 술렁거렸다.
매달 시험을 보고 결과가 나오고 평가를 받는 일이 도돌이표처럼 계속되었다. 어느 과정 하나 수월한 게 없다. 시험을 준비하고 치를 때는 피가 마르고, 결과가 나오면 마음이 아픈데 매타작으로 몸까지 아프다. 그리고 성적표를 받아 전 과목의 점수를 확인하고 반 석차와 전교 석차란에 찍힌 낙인을 보면 가슴에 납덩이가 내려앉는다. 후회와 죄책감으로 괴로운 나날을 보내다 보면 다음 시험 날짜가 발표된다. 다시 피 마르는 시간. 학생은 그런 일상을 보내는 사람이다.
성적표를 교탁 위에 올려놓은 선생님이 맨 위의 장을 들고 ‘1번!’ 하고 불렀다. 왜 선생님들은 이름을 놔두고 번호로 부르는 걸 좋아할까? 영화에서 보듯 감옥 같은 집단 수용소에서나 번호로 부르는 거지. 거기서야 개인의 고유성을 지우고 모두가 동등한 죄수임을 알게 하려는 것일 테다. 그런데, 생생하게 자신의 빛깔을 드러내야 할 아이들에게는 왜? 우리도 1번부터 66번까지 일사불란하게 통제하고 관리해야 하는 대상에 불과했을까?
선생님이 점 찍어서 만든 1번인 나는 앞으로 나갔다. 성적표를 훑어본 선생님이 나를 돌아보았다. 겁먹은 얼굴로 움츠리고 있었을 나. 여느 때처럼 어깨는 굽고 고개는 떨어져 있었으리라. 늘 어깨를 구부정하게 하고 다녔다. 세상에 대한 방어 자세였을까. 등굣길에 교문을 들어설 때면 체육 담당이라 생활 지도라는 명목으로 교문 앞에 서 있곤 했던 선생님이 'ooo, 어깨 좀 펴!' 라고 했다. 같은 반의 어떤 아이도 날 보고 '야, 너는 어깨 좀 펴라.' 했다.
선생님은 엄한 표정으로 ‘왜 자꾸 성적이 떨어져?’라고 했다. 대답할 말이 없어 고개가 더 떨어졌다. 지난 달에 이어 또 떨어졌구나, 기운도 푹 떨어졌다. 그 때 선생님이 말을 더했다.
“넌 교복이 왜 이렇게 커? 아버지 양복 입었나?”
그 말에 폭죽이 터진 듯 아이들의 웃음보가 터졌다. 책상을 치는 애도 있었다. 교실 내 긴장감이 일시에 풀어졌다. 그 말이 그리도 재미있었을까? 내 일이 아니면 그럴 수 있겠지. 아이들의 호응에 선생님도 빙글빙글 웃었다. 웃음 버튼을 제대로 눌렀다고 여겼겠지만 선생님은 나의 아킬레스 건을 눌렀다. 내가 교복으로 얼마나 심하게 마음 고생을 하고 있는 줄 알았다면 그리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언니의 교복을 물려받아 입었다.
아이들의 떠들썩한 웃음소리에 교실 안은 활기가 넘쳤지만 혼자 앞에 나가 서 있던 내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성적이 떨어졌다는 사실, 물려받은 교복 때문에 이렇게 놀림거리가 된 것 모두 아프고 서러웠다. 눈물이 두 볼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그제야 선생님은 성적표를 주며 들어가라고 했다.
입학해서 하복을 입기 전까지는 사복을 입었다. 입학할 때 동복을 맞추면 두 달밖에 못 입고 금세 하복을 입게 된다. 그때부터 다시 동복을 입는 10월까지 자랄 사람은 많이 자란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자란 뒤에 동복을 맞추라고 배려해 준 방식이다. 모든 학교가 그렇게 했다. 5월에 들어서자 하복을 맞추라는 안내장이 나왔다. 나도 응당 새로 맞출 줄 알았는데 엄마는 따로 계획이 있었다. 언니의 교복을 입힌다는 것이었다. 바로 위의 언니는 나보다 5살이 많다. 언니가 졸업하고도 2년 동안 입지 않았던 교복을 찾아 꺼내어 보니 흰색 상의는 누렇게 변해 있었다. 청록색 반 주름치마도 색이 바래고 낡은 티가 났다. 치마 아랫단은 늘인 표시까지 있었다. 그 옷이 너무 입기 싫어 새로 맞춰주면 안 되냐고 했지만 있는데 뭐하러 새로 하느냐는 엄마를 도저히 설득할 수 없었다.
하복을 입고 등교한 첫날, 처음으로 교복을 입어 진짜 중학생이 된 기분을 실감하며 아이들은 환한 얼굴로 서로의 옷을 품평했다. ‘치마가 너무 길잖아.’ 하는 말에 ‘우리 엄마가 오래 입으라고 크게 맞춰 줬어’ 하고 대답하는 말, ‘네 윗도리는 약간 푸르스름한 것 같네. 내 건 그냥 흰색인데’, ‘네 옷은 내 거랑 천이 좀 다르네. 네 옷은 잘 안 구겨질 것 같아.’ 하는 말이 들렸다. 나는 거기서 멀리 떨어졌다. 그리고 등을 돌리고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체했다. 아무도 내 교복에 주목하지 않기를 바랐다. ‘네 교복은’ 하고 누군가가 말해서 ‘언니 거 입은 거야’라고 내 입으로 말하는 상황만은 죽어도 피하고 싶었다.
아이들의 새 교복은 얼마나 산뜻하던지. 희다 못해 푸른 빛이 돈다는 말의 의미를 그 아이들의 하복 셔츠를 보고 알았다. 잉크 푼 물에 옷을 담가 두었다는 아이도 있었다.
모두가 새 옷을 입어 반짝거렸으나 나는 그렇지 못했다. 나는 누가 봐도 ‘남의 옷을 입은 듯’해 보였다. 남의 옷을 입었으니까. 새 교복을 입지 않은 아이는 우리 반에 나밖에 없었다. 척 보면 때깔로 바로 알 수 있다. 그럼 전교에 두 명도 되지 않았을지 모른다. 가끔 여벌로 가지고 있어서 이건 언니 치마라느니 언니 바지라느니 하는 애는 보았다. 3학년 때 키가 커져서 자기 것이 작아 언니 걸 입었다는 아이도. 그러나 처음부터 새 하복을 입지 않은 아이는 한 명도 보지 못했다.
나는 되도록 눈에 띄지 않고 싶었는데 교실에 앉아 있으면 내 옷만 누렇게 보여 선생님 눈에 쉽게 띌 것 같아 겁이 났다. 조회하러 운동장에 모여 있으면 눈처럼 하얀 옷들 사이에서 나는 세상에서 가장 초라하고 남루한 아이가 된 것 같았다.
소풍 때 찍은 단체 사진 속에서 흰색 셔츠와 초록색 치마는 색이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았지만 내 눈에는 보인다. 조금 다른 내 교복의 명암과 채도가. 자신을 꼭꼭 숨기고 싶어하는 마음까지도.
10월부터 동복을 입으라고 하자 아이들은 날마다 교복 맞추는 이야기를 했다. 이번에도 나는 그 이야기에 낄 수 없었다. 아무리 졸라도 엄마는 여전히 옷이 있는데 왜 맞추느냐는 논리를 들이댈 뿐이었다. 왜 버리지 않아서 그게 집에 있는지 한스러웠다. 이 세상 맏이들은 모를 테다. 형이나 언니가 입고 쓰던 것만 물려받는 동생의 비애를. 또 언니 교복을 입었다. 짙은 감색이었을 동복은 햇볕과 시간에 바래 거의 보랏빛이 났다. 진한 감색의 새 교복 사이에서 몹시 튀었다.
언니보다 몸이 작아 하복도 컸지만 동복은 겨울 옷이라 더했다. 언니 몸에 맞춰 3학년 때까지 입었으니 1학년인 나에게 맞을 리 없었다. 상의는 몸 반 개는 더 들어가도 될 정도로 컸다. 아버지 양복에 빗댈 만도 했다. 바지도 컸다. 2학년 음악 시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난다.
선생님은, 1학년 때 음악 선생님이 결혼하여 떠나시며 인기 있던 TV 외화의 주인공인 소머즈를 닮았다고 소개한 분이다. 키 큰 것 말고는 동의할 수 없었다. 1학년 때 음악 선생님이 훨씬 더 좋았기 때문이다. 그 선생님도 키가 크고 스타일이 멋있었다. 초등학교 음악 시간에 나이 든 남자 선생님이 가르치는 노래를 듣다가 정식으로 음악을 전공한 선생님의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눈이 번쩍 뜨이는 느낌이었다. 노래를 정말 잘 부르셨다. 2학년 선생님의 노래를 듣고는 음악을 전공했다고 다 노래를 잘하는 건 아니구나, 생각했다.
시험을 보고 난 다음 시간이었다. 고등학교 입시 과목에 음악도 있었다. 선생님은 문제마다 틀린 사람을 불러내어 회초리로 다스렸다. 나도 나가서 엉덩이를 빼고 맞을 자세를 취했다. 곧 떨어질 아픔을 상상하며 눈을 질끈 감고 있는데 매 대신 선생님의 손이 내 옷을 정리하는 게 느껴졌다. 친절도 하시지. 아픔을 한 방울이라도 흘릴까 봐 선생님은 바지와 엉덩이 사이의 남아도는 옷감을 바짝 잡아당겼다.
그렇게 큰 옷이었으니 담임 선생님도 당연히 물려받은 헌 옷인 줄 알았을 텐데 보듬어 주지는 못할망정 어찌 그런 말을 했을까? 그 말에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의 여학생이 어떤 마음이 될지 정녕 몰랐단 말인가? 본인은 남자라서 그게 그렇게 창피한 일이라 여기지 않았다고 할지 모른다. 그래서 그저 농담으로, 웃으라고 말했다고. 그렇지만 자신이 1년 가까이 봐 온 나라는 애가 그 말에 하하, 같이 웃으며 머리 한 번 긁적이고 말 위인이 못 되는 줄은 그도 알고 있었을 테다. 그렇다면 함부로 쿡쿡 찔러서 다른 아이들에게 웃음거리로 제공하지 말았어야지. 모르고 했다 해도 나에게는 가장 아픈 부분이었다. 내가 그토록 드러내고 싶지 않은 사실을 끄집어내어 만인 앞에 나쁜 방식으로 펴 보인 선생님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어른이 되어 한 친구와 이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다. 자신은 고등학교 때 하복은 새로 맞추었는데 동복을 세 살 위인 언니 걸 입었단다. 그런데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애들 앞에서 그걸 착하다고 칭찬해서 그게 더 부끄러웠다고 했다. 말 안 하면 모를 수도 있는데 굳이 말했다며. 내 경우보다는 낫지 않느냐고 했다. 같은 일을 두고 어떤 선생님은 칭찬할 거리로 삼았고 우리 선생님은 비참해지도록 했다. 나도 만약 칭찬을 받았다면 그토록 부끄럽던 마음이 조금은 가셨을지 모른다. 좋은 말 할 게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게 예의다. 그 친구는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는데 그 애의 동복 상의가 커 보였던 게 아직 기억나서 놀랐다. 누군가의 머릿속에도 크고 바랜 교복을 입은 내 모습이 남아 있을지 모른다.
이제 와 생각하니 그렇게 헌 교복을 입기 싫었으면 단식 투쟁이라도 해서 원하던 바를 얻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일주일간 단식 투쟁하여 부모에게 결혼 승낙을 받아낸 사람을 안다. 일생에 한 번은 그렇게 단식 투쟁도 불사하며 밀어붙여야 할 때가 있지 않을까? 내게는 그때가 그때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불행히도 나는 염치를 아는 아이였다. 형제가 많았다. 할머니는 우리 집에서 먹고 나머지는 다 학교로 간다고 말했다. 아침마다 우리가 학용품 산다고, 수업료 달라고, 수재의연금 낸다고 아버지 앞에 손 내밀고 서 있으면 더 깊어지던 아버지 이마의 주름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엄마 말대로 ‘있는데’ 교복을 사달라고 끝까지 고집하기가 미안했다. 그렇게 갸륵한 마음이었으면 좀 떳떳하고 당당하게 행동했으면 금상첨화 아니었냐고 뒤늦게 자신을 나무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