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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학년 1반 1번

by 미소 Mar 11. 2025

  나는 1학년 1반 1번이었다. 수업료를 내러 서무실에 가면

 “몇 학년 몇 반 몇 번?”

 하고 묻는다. 나는 쭈뼛거리며 대답한다.

 “1학년 1반 1번”

 그럼 바로 이런 반응이 나온다.

 “야~ 너는 1등이네!”

 그럴 때마다 민망하여 몸 둘 바를 몰랐다. 소속과 출석 번호가 그럴 뿐 공부든 달리기든 그 무엇으로도 1등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미모 1등도 아니고. 심지어 내 키조차 1등으로 작지 않았다. 출석 번호는 키가 작은 사람부터 큰 순서대로 정해졌지만 나는 특별한 1번이었다. 특별한 선생님 덕분이었다.

 

  중학교에 들어간 첫날 첫 시간, 출석 번호를 받기 위해 우리는 선생님이 명하는 대로 운동장으로 나갔다. 다른 반은 대충 복도에 서서 정하는데 체육 담당인 젊은 남자 선생님은 넓은 운동장이 편했던 모양이다. 스스로 키가 작다고 생각되면 앞으로, 큰 애는 뒤로, 우리는 알아서 적당한 자리에 가 섰다. ‘네가 더 커. 얘랑 바꿔.’ 이런 말도 하면서. 그러나 선생님은 여러 차례 아이들을 행렬에서 뺐다 넣었다 했다. 키가 작은 아이가 큰 아이보다 뒷번호가 되면 무슨 큰일이나 나는 것처럼.

 

  내 앞에도 여러 명이 서고, 다 되었다 싶을 때 선생님이 주머니에서 긴 종이를 꺼내어 폈다. 그리고는 이름 부르는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대여섯 명쯤 불린 이름 중에 내 이름이 있었다. 영문을 몰라 머뭇머뭇 앞으로 나간 아이들을 선생님은 한 사람씩 자세히 살폈다. 내 앞에 선 선생님이 한 손으로 내 어깨를 잡고 얼굴을 빤히 들여다볼 때 몹시 긴장되고 불안했다. 왠지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분명 겁에 질렸을 내 눈을 보던 선생님이 ‘네가 1번 해라.’ 하고 말했다. 그리고는 내 등을 밀어 손수 행렬의 맨 앞자리에 데려다 놓았다. 처음에는 무슨 일인지 몰라 얼떨떨하다가 내가 1번으로 확정되었음을 이해하고 나자 아, 정말 싫었다.

 

  초등학생일 때, 중학교 가면 키대로 번호를 정한다는데 1번 되면 어쩌느냐고 친구들과 우는 시늉을 했지만 정말로 그리 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내가 그렇게 작지 않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로 그리 되지 않았는가. 그렇게 작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반 아이들은 내가 1번이 된 경위를 알지만 그걸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1번이라고 말하나 싶었다. 10번 안이기는 해도 1번은 아닌데 사람들은 내가 제일 작아서 1번이 되었다고 볼 게 아닌가. 그게 너무 억울했다. 정말은 최소 7, 8번은 된다고 힘주어 말하면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리고 ‘1번이나 7번이나!’ 했다. 그들에겐 그럴지 모르나 나에게 1번과 7번은 하늘과 땅만큼 달랐다. 7번이라 하면 그냥 ‘7번이구나.’ 하겠지만 1번이라 하면 누구나 ‘아주 작군. 제일 작네.’ 하고 여길 테니까. 누군가가 몇 번이냐고 물어볼 때마다 나는 1번이지만 사실 1번은 아니라며 1번이 된 이유를 열심히 설명했다. 하지만 그럴 때 진정으로 안 됐다는 얼굴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참 안 된 일이었다.

 

  나는 한동안 내가 1번임을 믿을 수 없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어느 날 수학 시간에 선생님이 ‘1, 2, 3번 나와.’라고 해서 나갔다. ‘순열과 조합’이라는 단원을 배울 때였다. 우리를 여러 방법으로 섞을 참인지 번호대로 서라는데 내가 제일 크고 2번이 그동안 자랐는지 3번이 제일 작았다. 선생님은 3번이 1번인 줄 알았다가 아니라 하고 제일 큰 내가 1번이라고 애들이 말하니까 어리둥절해서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했다. 선생님은 내가 1번이라는 걸 믿지 못했다. 나도 내가 큰 게 멋쩍었다. 나는 결코 제일 작지 않았다.

 

  우리 선생님이 1번을 뽑는 데 그리 신중했던 이유는 1번이 그 반의 얼굴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맨 앞에 있으니 간판과 같다고. 일종의 허영심이었다. 선생님이 펴들었던 종이에는 우리의 이름과 입학 전 배치 고사 성적이 씌어있었다. 1번이 된 후 교무실에서 선생님이 그걸 들여다보며 내 배치 고사 성적을 말해주었다. 선생님은 공부를 어느 정도 하면서 키가 터무니없이 크지 않은 아이를 1번으로 삼으려 했다. 불린 이름 중 내 앞에 있던 애는 없었다. 맨 앞에 세워도 툭 튀어나올 만큼 크지 않아서 내가 선택되었다. 선생님은 흔연히 나를 1번으로 발탁했지만 곧 잘못된 선택임을 알게 되었다. 적당한 성적과 키만으로는 좋은 간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1번이라 2번과 함께 제일 먼저 주번을 했다. 시작하던 날 선생님이 ‘학급일지’를 주시며 앞으로 내가 계속 쓸 거라고 했다. ‘왜 내가 계속? 주번이 아닐 때도 쓴다고?’ 하고 나는 의아했다. 매시간 공부한 과목 이름과 배운 내용, 조례와 종례 때 선생님이 하신 말씀을 적고, 지각이나 결석자 수도 기록하는 게 ‘학급일지’다. 주번 활동이 끝나면 그걸 들고 교무실의 선생님께 가서 검사를 받아야 했다. 주번 한 지 사흘째던가? ‘학급일지’를 검사 맡으러 교무실에 갔더니 선생님이 펴보고 ‘좀 깨끗하게 써!’라고 하는 게 아닌가? 나는 깜짝 놀랐다. 그때까지 내가 글씨를 못 쓴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때 공책 검사를 하면 늘 잘했다 소리를 들었고, 교실 환경 미화 심사가 있으면 게시판에 뭘 쓰거나 그려서 붙이는 일도 여러 번 했다. 방과 후에 선생님의 지시로 다음 날 아침에 아이들이 풀 자습 문제를 칠판에 써놓기도 했다.

 

  그런데 선생님 말씀을 듣고 보니 정말 내가 일지에 써놓은 글씨가 깨끗해 보이지 않았다. 중학생이 되어 처음 잡은 볼펜으로 글씨 쓰기가 자리 잡히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학급일지를 계속 쓰고 싶지 않은 마음이 반영된 게 아니었을까 싶다. 날마다 교무실에 가는 게 싫었다. 담임 선생님과 일대일로 보는 것도 편하지 않은데 다른 선생님들까지 오며 가며 한 번씩 쳐다보는 게 몹시 부담스러웠다. 또, 나도 친한 친구랑 같이 빨리 집에 가고 싶은데 왜 주번이 아닐 때조차 ‘학급일지’를 쓰고 늦게 가야 한단 말인가, 하는 불만이 있었다. 그래서 공들여 쓰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선생님은 그때 처음으로 나에게 실망했을 것이다. 당황했을지도 모른다.

 

  어느 날 학급일지를 들고 교무실에 갔더니 선생님이 날 보며 말했다.

 “ooo, 나한테 싹싹하게 안 하면 맞아!”

 주번 하는 중이었으니 선생님과 만난 지 1주일도 안 되었을 때다. 그 짧은 기간 동안 선생님은 내 성정까지 다 파악했던가? 나는 싹싹한 게 뭔지도 잘 몰랐지만 남자 선생님께 그리 싹싹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 말이 참 불쾌하게 들렸다. 마침 옆에 있던 5반 담임인 가정 선생님이 이렇게 거들었다.

 “우리 반 1번은 얼마나 싹싹한데......”

 그때 5반 선생님의 얼굴에 어린 자부심과 우리 선생님의 얼굴에 비친 아쉬움과 자괴감을 나는 분명히 보았다. 나중에 보니 그 반 1번은 전교에서 키가 가장 작지 않을까 싶을 만큼 작았다. 그런데 친구들과 노는 모습을 보니 땅콩만한 애가 진짜 땅콩처럼 야무졌다. ‘와, 저런 애가 1번이라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나와는 완전히 다른 애였다. 우리 선생님이야 내가 따라 했으면 할지 모르지만 나는 따라 할 수도 없을뿐더러 따라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애는 그 애고 나는 나니까. 싹싹하지 않은 게 나의 정체성이라는 건 아니지만. 선생님은 다시 한번 나에게 실망했을 것이다. 간판이 말이 아니라고 여겼을지 모른다.

 

  1주일간의 주번이 끝난 뒤 나는 학급일지를 3, 4번 아이들에게 넘겼다. 내가 계속 써야 한다는 선생님 말씀을 깜빡 잊어버린 듯이. 선생님이 뭐라 할까 눈치를 보고 있었는데 별 말이 없었다. 알고 보니 4번인 아이가 글씨를 깨끗하게 써서 그 아이가 계속 쓰기로 정해졌다고 한다. 그 아이는 나처럼 교무실 드나드는 걸 죽도록 싫어하지 않았다. 선생님에게 살살 잘 웃는 걸 보면 싹싹하기도 한 모양이었다. 교무실에 들락거리면서 다른 선생님들과도 친해졌는지 공부 시간이 끝나면 과목 선생님이 그 애를 이름만으로 ‘oo야’ 하고 다정하게 부르기도 했다. 나는 그런 게 빼앗긴 기회인 양 아깝거나 샘나지 않았다. 주목받는 걸 싫어했기 때문이다.

 

  나는 칭찬받는 게 부담스러워 공부를 적당히 한 적도 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던가. 받아쓰기인지 산수 시험인지 별 대수롭지 않은 시험에서 혼자 100점을 받아 남는 급식 빵을 상으로 받게 되었다.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부르며 앞으로 나오라고 하는데 너무너무 부끄러웠다. 모든 아이가 돌아보고 쳐다보는데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시뻘게졌을 테다. 벌 받으러 나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칭찬받으러 사람들 앞으로 나가는 것이 내게는 벌이었나 보다. 그때 속으로 ‘하나만 틀리게 쓸걸.’ 했다.

 

  나는 익명의 자유를 좋아했다. 가끔 어느 선생님이 내게 관심을 보이면 나는 어쩔 줄 몰라 했다. 그 선생님 시간이면 언제 이름이 불릴지 몰라 항상 불안했다.

 3학년 때 좀 나이든 남자 사회 선생님도 수업 시간에 자주 나를 불렀다. 무언가를 설명하다 갑자기 ‘ooo, 너는 어떻게 생각해?’라고 해 나를 소스라치게 했다. 되도록 눈을 맞추지 않고 숨어 있으려 해도 어느 틈에 발견했는지 대뜸 ‘ooo, 너도 이렇게 생각해? 너라면 이럴 경우 어떻게 하겠어?’라고 물어대서 무척 곤혹스러웠다. 신통한 대답도 안 나오는데 왜 자꾸 반장도 아닌 나에게 묻는지. 한 번은 학교에서 단체로 영화 관람을 갔는데 의자에 앉아 상영을 기다리고 있던 그 선생님이 나를 보고 표나게 알은체를 해서 옆에 있던 친구들에게 미안한 적도 있었다. 좀머씨처럼 ‘제발 날 좀 내버려 두시오.’ 라 외치고 싶었다.

 

  ‘학급일지’를 쓰지 않게 되어 매일 교무실에 가서 선생님들을 만나는 일은 면했지만 1번이 하는 일은 많았다. 무언가를 나눠줄 때도 1번 나오라 했고 시범을 보일 때도 1번 나와 보라고 했다. 체육 교실 수업 때 선생님이 어떤 운동 법칙을 설명하려고 1번인 나를 불러내어 교실 앞 구석에 있던 물이 든 양동이를 들고 오게 한 일이 생각난다. 선생님이 교무실에 출석부나 교재를 두고 왔을 때도 왜 반장이나 주번이 아닌 1번을 불러 시키는지 모를 일이었다. 반장은 어디에 써먹으려고.

 

  담임 선생님은 반장 아이를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오죽하면 2학기가 되었는데도 ‘우리 반은 반장을 그대로 해도 불만 없지?’ 하며 선거도 없이 유임시켰을까. 차분하게 아이들을 잘 이끌던 그 아이도 그리 키가 크지 않았으니 그 애를 1번이자 반장으로 삼았으면 좋았을 텐데. 선생님도 후회하셨을지 모른다.

 

  1번은 주번도 으레 두 번 한다. 1번부터 시작하니 그렇다. 한 반이 66명쯤 되고 한 주에 두 명씩 하니 뒷번호 아이들은 한 번만 하면 끝이다. 키가 갑자기 쑥 커지는 애는 많지 않은데 해마다 두 번씩 하는 키 작은 아이를 생각해서 뒷번호부터 주번을 시작하게 하는 선생님은 잘 없었다. 어떤 반이 그런다는 소문만 들었다. 그나마 공평하게 한다고 한 바퀴 돈 다음에 두 번째는 3일씩 하게 한 선생님은 6년 중에 딱 한 번 만났다. 그렇게 해도 하지 않는 뒷번호도 있지만 1번은 무조건 한다. 처음부터 3일씩 하게 한 선생님은 아예 없었다. 종업식이나 졸업식 때 1번에게 봉사상이라도 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 시절 1년에 두 번씩 주번을 했던, 1번을 포함한 모든 앞번호 친구들에게 수고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일주일에 두 번, 운동장 조회를 했다. 조회 때 맨 앞에서 구령을 붙이던 선배가 매번 했던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비가 오지 않는 한 월요일, 토요일에는 운동장 조회가 있으니 선생님들 직원 조회 종이 울리면 바로 운동장으로 나와 정렬해 주시기 바랍니다.”

 조회 시간에 맨 앞에 서 있기는 힘든 일이었다. 서너 발 앞에 담임 선생님이 눈을 부라리고 서 있어서 옆의 아이(2번)와 말 한마디 못 하고, 교장 선생님의 긴긴 훈화 동안 졸거나 몸을 움직여서도 안 된다. 누가 상을 받으면 뒤의 아이들보다 더 열심히 손뼉을 쳐야 한다. 가끔 땡볕에 쓰러지는 애가 있었다. 그러면 교장 선생님이 ‘요즘 애들’은 체력이 너무 약하다고 했는데 지금 ‘요즘 애들’을 보면 뭐라 하실지. 운동장 조회라고는 일 년에 한 번 할까 말까, 입학식과 졸업식도 교실에 앉아서 하고 거의 학교 옆에 붙어있는 아파트에 살며 운동하고는 담쌓고 사는 요즘 애들을.

 

  조회하지 않는 날은 3교시 수업이 끝나면 운동장에 나가 하루는 국민 체조, 하루는 음악에 맞춘 무용을 했다. 매일 운동장의 모래바람을 맞았다. 조회나 체조가 끝나 교실로 들어가는 행진을 할 때는 1번으로서 정신을 바짝 차려야지 까딱하면 반 전체를 잘못 인도하는 수가 있다. 넋 놓고 있다가 한 번 그런 적이 있어 줄이 꼬이고 행렬이 섞여 일대 혼란이 일어났었다. 다행히 선생님들은 교무실로 먼저 들어가셔서 그 난장판을 보지 못했다. 그런 일이 생기지 않으려면 다른 반 아이들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가 차례가 되면 얼른 꼬리를 물고 따라가야 한다.

소풍 갔을 때도 마찬가지다. 항상 선생님의 구령에 신경을 쓰고 있다가 정확하게 이행해야 한다. 잘못 알아들어 엉뚱하게 행동하면 맨 앞에 선 나와 짝이 혼나니까. 똘똘한 1번을 뽑으려는 선생님의 마음도 이해가 간다.

 

  예체능 실기 시험을 볼 때는 제일 먼저 치러야 하니 얼마나 무서운지 모른다. 수업 전 쉬는 시간부터 떨었다. 노래 시험 때는 목소리가 안 나오고 체육 시험 때는 다리가 잘 안 움직였다. 다른 아이들이 어느 정도 수준일지 선생님도 몰라 상대적으로 박한 점수를 받기도 했다.

 

  고입 체력장을 대비해 1학년 때부터 연습했다. 100M 달리기를 하러 맨 먼저 나가 출발선 앞에 서면 도착지가 세상의 끝처럼 아득해 보였다. 가슴이 쿵쿵거리는 소리를 진정시키지 못한 채 총소리가 들리면 놀라서 움찔, 상체가 뒤로 물러났다. 힘겹게 다리를 앞으로 내밀어 죽을힘을 다해 달려도 18초 3 정도였던가. 특급을 받지 못한 체력장 날의 화약 냄새가 코에 스미는 듯하다.

 

  단체 기합을 받을 때도 1번은 불리하다. 선생님이 있는 대로 화가 나서 ‘1번부터 나와!’ 하고 몽둥이 찜질을 할 때 선생님의 화가 최고조로 올라있던 것이 폭발하므로 1번인 내가 맞는 매가 가장 파괴력이 크다. 누가 먼저 맞는 매가 낫다고 했나? 시키는 대로 교탁을 두 손으로 잡고 엉덩이를 뒤로 빼고 있으면 빡, 소리와 함께 엉덩이에 불이 났다. 자리로 돌아오려고 걸음을 옮기기도 힘들었다. 선생님의 폭력이 ‘사랑의 매’라는 이름으로 미화되던 시절이었다. 너무 아파 자지러질 정도였던 그 매가 정말 사랑의 매였을까?

 

  고달픈 한 해가 가고 2학년으로 올라갔다. 1번의 옷을 벗는 게 얼마나 홀가분하던지. 2학년이 되는 첫날 학교에 가면서 ‘이제 나는 1번이 아니다. 다시는 1번 하는 날이 없겠지. 몇 번이 될까?’라고 생각했는데 두고 볼 일이었다.

 

  우리 선생님이 아직 안 오셨다며 무용 선생님이 오셔서 1주일간 임시 담임을 맡는다고 했다. 출석 번호를 정해야 하니 모두 복도로 나가 키대로 서라고 했다. 1학년 때 뒤에 앉았던 애와 친해져서 짝하려고 붙어 섰다. 그 애는 16번이었는데 1년간 키가 거의 자라지 않아 나보다도 작았다. 7, 8번이나 10번은 될 텐데 그 아이에 맞추어 5, 6번째에 섰다. 선생님은 까다롭게 키를 맞추지 않고 그대로 교실에 들어가 앞줄부터 앉게 했다.

 

  5번도 만족스러운 번호는 아니지만 그래도 1번은 아니니까, 하며 스스로를 달래고 있는데 느닷없이 선생님이 ‘작년에 1번 한 사람?’ 하고 물어보는 게 아닌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가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어쩌나 싶었지만 가만히 있어 보았다. 그랬더니 작년에 같은 반이었던 애들이 내 이름을 부르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난리를 쳤다. 다가와 옆구리를 찌른 애도 있었다. 급기야 선생님도 날 쳐다보아서 할 수 없이 손을 조금 들어 올렸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상되어 정말 들기 싫었는데. 선생님은 바로 ‘그럼 네가 1번 하고’ 하더니 1번 자리에 앉아있는 애한테 ‘너, 얘하고 자리 바꿔.’라고 했다. 잠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더니 선생님은 내가 짝이랑 헤어지기 싫어 그러는 줄 알고 옆의 친구한테 ‘너희 둘이 같이 바꿔.’라고 했다. 세 명의 아이들이 일어나 움직이니 나도 어쩔 수 없이 일어났다. 처음의 1, 2번은 5, 6번이 되고 나는 다시 1번이 되었다. 나는 평생 1번만 해야 하나 싶어 몹시 우울했다.

 

 1주일 후에 온 초임 담임 선생님은 아무 것도 모르고 나를 나면서부터 1번인 아이처럼 자연스럽게 1번으로 대했다. 1번으로 정해진 건 맞지만. 1번으로 살기는 여전히 힘들었다. 어느 날 선생님은 나에게 지난 달 성적표를 왜 안 냈느냐고 했다. 냈다고 하자 ‘냈는데 왜 없어?’ 했다. 내가 어찌 아누? 맨 위에 얹혀 있어서 어디다 흘리기도 쉬운 게 1번의 성적표였다. 월말에 그 달 성적만 달랑 적힌 새 성적표를 받았다. 그러다 어디서 나왔는지 그 다음 달에는 다시 원래의 성적표를 받았다. 66명의 성적표를 쌓아놓고 그 위에서 받침으로 대고 뭘 썼는지 내 성적표에는 볼펜으로 눌린 자국도 있고 빨간 인주 얼룩도 묻어있고 여러모로 깨끗하지 않았다.

 

  2박 3일간 수학여행을 갔을 때는 소풍 때보다 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기차를 타거나, 버스를 타거나 이동할 때마다 신경을 곤두세웠다. 선생님은 줄 세우고 인원 점검할 때마다 1번을 찾았다. 항상 1번이 기준이었다. 선생님의 기분이 좋지 않을 때도 맨 앞에 있는 사람에게 가장 큰 화가 미친다. 바로 앞에 있어 선생님의 화가 100% 흡수된다. 2학년 때는 행사가 많았다. 합창 대회, 체육 대회, 무용 경연 대회 등등. 그때마다 내 할 일을 제대로 해내려고 노력했다.

 

  3학년 때 선생님은 1번에 대한 아무런 기대나 환상이 없었던지 1번 경력자를 찾지 않았다. 나는 12번이 되었다. 모르는 사람들은 ‘1번에서 12번이 되다니 많이 컸네.’라고 했다. 그런 게 아니라고 설명하기도 입 아팠다. 그렇게 1번 시절이 막을 내렸다.

 

  1번임을 내내 치욕으로 여겼다. 1번으로 살기는 앞에 나서기 싫어하는 나에게 고역이었다. 하지만 1번 노릇은 소극적이고 행동도 느린 나를 빠릿빠릿한 아이가 되도록  만들었다. 수많은 피곤한 일로 신경이 많이 쓰였지만 그때는 내가 가장 생생하게 깨어있던 때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자잘한 봉사를 그때만큼 많이 한 적도 없다. 또, 내가 1번이었을 때는 선생님과 아이들의 관심과 사랑을 많이 받은 것 같다. 아이들은 9번이나 27번이 누군지는 몰라도 1번인 나는 다 기억했다. 이름 대신 1번이라고 부를 때 싫기도 했지만 애칭으로 부를 때면 참아줄 만했다. ‘키는 작아도 어른스럽다.’며 나를 인정해준 친구들이 고맙다.

 

  3학년 때, 1번이 아닌 나는 원하던 대로 푹 묻혀 지냈다. 편했지만 긴장감이 떨어졌다. 담임 선생님은 나에게 관심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냉담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유형의 아이가 아니라고 해서 꼭 그래야 했는지. 입시를 앞두었지만 공부가 잘 되지 않았다. 그런 일을 겪고서야 나도 관심과 애정이 필요한 사람임을 알았다. 2년 동안 1번이어서 과분한 사랑을 받은 줄도. 그래도 다시 1번을 하겠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세차게 고개를 저을 것이다. 그만하면 충분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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