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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종지부를 찍고

사직서 쓴 날

by Kidcook

2017년 9월부터 시작해서 약 7년가량 근무를 했다. 중간에 갑상선암 수술을 위해 큰 아이 때 사용하지 못한 육아휴직 1년을 쓰고, 복직해서 6개월을 채우고 퇴사하고자 했으나 둘째 아이 육아휴직 7개월이 남아있어서 모두 사용 후 오늘 사직서를 쓰고 왔다. 이전 회사에서 15년가량을 다니고 사직서를 썼을 때는 시원하기도 하고 섭섭한 마음이 들었는데, 이번에는 그에 반이라서 그런 건가 섭섭한 마음이 1도 안 생긴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좋았던 기억보다 힘들고 마음 상했던 일들이 너무 많아서 그런 것 같다.


영양사라는 직업을 갖고 있다고 하면, 대부분이 '식단만 짜는 거 아닌가요?', 때로는 '배식만 하면 되지 않나요?'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은 걸 보면 아마도 사무직이라 편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일하는 곳에 따라 천차만별이고 모두 다르겠지만, 조리인력 관리, 위생관리, 식단관리, 클레임을 포함한 고객관리 등의 관리적인 업무는 기본이며, 나의 경우 인턴부터 시작하여 스파르타로 배웠던 시절이라 몸도 힘도 많이 쓰면서 배웠더랬다.


10킬로 김치박스를 들며 재고조사를 하고, 쌀 한 포대는 들 줄 알아야 한다며 20킬로짜리 쌀을 적재하기도 하고, 검수를 위해 감자 한 박스, 양파 한 망 등 무거운 야채 중량 체크를 위해 저울에 달아가며 혹독한 신입 시절을 보냈다. 그때는 젊어서 몰랐는데 그런 것들이 하나둘씩 쌓이며 관절에 무리가 가고 있었으리라.

덕분에 양팔 테니스엘보와 골프엘보(테니스는 고등학교 때 체육실기 시험 본 적이 다고, 골프는 골프채도 구경해 본 적 없다)라는 명예훈장을 달고 지금도 진료를 받고 있다.


암수술 할 때도 이렇게 우울하지 않았고, 방사성치료를 할 때도 눈물 한 번 흘린 적 없었건만 양쪽 팔이 아파서 아이들이 먹고 싶다는 요리를 해주지 못하는 상황이 되니 어느 날은 너무 서러워서 잠자리에 베개맡이 다 젖을 만큼 눈물이 났다. 그냥 서럽고 또 서러웠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몸 아끼지 않고 미련하게 열심히 한 내 잘못이련만, 그냥 열심히 살아온 것뿐인데 남들은 똑같이 일해도 다 괜찮은데 왜 나만 이런가 하는 생각도 들고.


사실은 작년 추석쯤 잠시 우울증도 왔었다. 너무 속이 상하니까 아무것도 하기가 싫고, 눈을 뜨면 자리에 누워있는 성격이 못 되는데 하루종일 의욕도 없고, 식욕도 없고, 누워만 있고 싶었다. 계속되는 이런 상황에 안 되겠다 싶어서 병원을 찾았더니 항우울제를 처방해 주셨다. 첫날 약을 먹으니 두통도 사라지고 개운한 느낌이 들면서 기분도 좀 향상되었는데 명절이라 시댁, 친정 방문하느라 약을 하루이틀 건너뛰자 3일째 되는 날 너무 심한 두통으로 서있기 조차 힘든 게 아닌가. 너무 무서워서 항우울제 부작용을 찾아보았는데, 장기복용 시 갑자기 중지하면 안 되고 의사 지시에 따라 용량을 줄이거나 약을 서서히 중단해야 되며 중단 시에도 심한 두통 외에 다른 부작용들이 많았다. 그쯤 되니 다시 복용하기가 너무 무서워졌다. 장기복용이 되기 전에 내가 노력해서 극복해보자 싶어 매일 같이 걷고 또 걷고 하면서 스트레스, 걱정, 무기력함을 날리려고 노력해서 지금은 약 복용 없이 우울함을 극복하게 되었다. 이제는 우울해지려고 하면 다른 생각을 하고, 기분전환을 위해 다른 활동을 하면서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일은 힘들어도 참고 견딜 수 있고, 안되면 밤을 새워서라도 할 수 있지만 사람들로 인해 마음이 상하고 힘든 것은 극복이 안되고 쌓이기만 하더라. 어쩌면 팔이 아픈 것이 아픈 것보다 마음에 상처가 깊어지고 곪아서 나아질 수 없는 것이었는 지도 모른다. 일을 쉬고 나니 신경과 약을 먹어야 사라지던 편두통도, 소화제를 달고 살았던 소화불량도, 환절기마다 달고 살던 목감기도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다. 결국 마음이 병이었던가. 더 이상 나에게 영양사는 없다고 생각하고 이 회사가 영양사로서 마지막이었다고 공표했는데, 3일 전 이상한 일이 있었다.


아침부터 납품업체 영업과장님이 잘 지내느냐고 안부문자를 보내주셨다. 나보다 어리지만 생각이 깊고 일반적인 영업사원의 느낌이 아니라(영업사원을 비하하거나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영업하시는 분들 특유의 말솜씨가 좋아 언변의 달인 같은 느낌이 드는 그런 부분을 말한다) 항상 밝고 긍정적이며 진솔하고 상대에 대해 공감을 잘해주시는, 만날 때마다 기분 좋아지는 그런 분이었는데 일을 쉰 지가 반년이 넘은 나에게 굳이 연락을 주셔서 너무 감사하고 기분 좋은 아침으로 시작했었다.

그리고 오후가 되어서는 사직서를 쓴 최근의 직장에 함께 일하던 총무과 직원이셨는데, 갑자기 부재중 전화가 와서 전화드렸더니 너무나 반갑게 잘 지내냐며 안부를 물으시고는 자기가 다른 회사로 이직을 했는데 이 회사 분위기도 좋고, 근무환경도 좋다면서 마침 책임영양사를 구인하고 있는데 함께 일해보지 않겠냐고 제의를 해주셨다. 솔직히 말하면 정말 전날까지도 이번 주 사직서를 쓰고 무슨 일을 할지, 자격증을 딸지, 이것저것 알아보려던 참이었다. 영양사라면 뒤도 돌아보지 않을 테다. 했는데 그 총무과 직원분도 인격적으로 참 좋은 분이고 성실하고 진실한 분이셔서 허튼 말하실 분이 아니었기에 이 또한 너무 감사한 일이었다. 아주 평온하고 아무 일 없던 일상에 하루동안 이런 좋은 분들에게 감사한 인사와 제의를 받으니 기분이 좋으면서도 묘했다.


최근 1~2년 사이 건강이 안 좋아서 수술도 하고, 이것저것 없던 병이 생겨서 입원도 하고, 몸과 마음이 많이 힘들고 지쳐있었는데 이런 좋을 날도 있구나 싶었다. 나쁜 인연으로 괴로운 날도 있었지만 좋은 인연으로 나에게 선물도 주는구나. 앞으로는 스치는 인연에도 함부로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그로 인해 그날 당일 갑작스레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적고, 다음날 메일로 서류발송을 하고, 또 그다음 날인 어제 면접을 보게 되었다. 사실 너무 갑작스러워서 이게 뭔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꿈인가 생신가 싶었는데 이 또한 다 뜻이 있겠지 싶다. 팔이 아파서 일도 못할 것 같은데 소개해주신 분 얼굴을 봐서 면접이라도 보고 오자 하고 갔는데, 결과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면접을 보신 대표님과 부장님이 내 상황을 전부 말씀드렸음에도 모두 긍정적으로 얘기해 주시고 출근 가능일자까지 물어보시니 정말 가야 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된다고 하면 출근을 해야 할 것 같고, 안된다고 해도 굳이 섭섭하지는 않을 것이다.

흔한 말로 '다 때가 있다.'라고 하는 것처럼 예전 같았으면 노심초사하며 기대하지 않았던 제의지만 되면 어떡하고, 안되면 또 어떡하나 싶어 불안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냥 흘러가는 데로 두고 매사에 마음 졸이지 않기로 했다. 내가 조바심 낸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없다면 그냥 닥치면 닥치는 대로 상황에 맞게 그때 가서 생각하고 행동하면 되더라. 그것을 이제야 깨닫다니. 벌써 내일모레 쉰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이제야 조금 더 어른이 되어가는 것 같다. 이제는 조금씩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물 흐르듯 흘러가는 데로 홀가분하게 살아갈 것이다. 모든 분들이 나를 응원해 주면 좋겠다. 기운을 받아서 힘을 내보자, 아자아자!(너무 옛날사람 멘트인가?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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