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리뷰 (上)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과학전문기자인 룰루 밀러가 쓴 과학 및 철학 에세이 책이다. 출간 직후 큰 반향을 일으켜 한국에서도 이미 수십 쇄를 찍었을 만큼 많은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처음에는 이 책이 허구의 이야기를 다뤘다고 알고 있었는데, 실존 인물을 다뤘다는 걸 알고 나서 상당히 놀랐고, 책의 형식이 소설이 아닌 에세이라는 것을 깨닫고 또 한 번 놀랐다.
책의 제목은 상당히 도발적이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어 왔던 것을 전면에서 부정하는 이 제목, 과연 정말일까? 책의 내용을 지금부터 제대로 알아보도록 하자.
혼돈은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이라는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 일어나는가’ 하는 시기의 문제다. 이 세계에서 확실한 단 하나이며, 우리 모두를 지배하는 주인이다.
똑똑한 인간은 이 진리를 받아들인다.
똑똑한 인간은 이 진리에 맞서 싸우려 하지 않는다.
(본문 中)
책은 혼돈에 대한 이야기로 포문을 연다. 혼돈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고, 세계를 지배할 수 있을 정도의 아주 강대한 힘을 가졌다. 그러니 그 혼돈이라는 존재에 맞서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이런 혼돈과 맞서 싸우는 이들이 존재한다. '혼돈'과 반대되는 개념, '질서'를 정립하기 위해서.
이 '혼돈', 그리고 '질서'와 관련된 이야기는 알베르 까뮈의 <시지프 신화>를 강하게 연상시킨다. 까뮈에 따르면, 인간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세계에 인간의 낙인을 찍고자 한다. 이들은 현실을 인간의 언어로 환원시켜야 스스로 만족할 수 있다. 하지만, 세계는 기본적으로 비합리적인 존재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완벽히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 인간의 낙인을 찍고자 하지만, 세계는 완벽하게 인간화시킬 수 없다. 이때 부조리가 생겨난다.
<시지프 신화>에서 나오는 '비합리적인 세계'와 '인간의 낙인'은 각각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나오는 혼돈과 질서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세계를 모두 인간의 언어로 환원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 바꿔 말하자면, 혼돈을 모두 질서로 정립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 그 행위를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타고난 인간의 욕망이다.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혼돈과 맞서 싸워 질서를 정립시키고자 노력한, 한 남자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 남자의 이름은 바로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하 조던)으로, 19세기 ~ 20세기 동안 활동한 어류 전문 분류학자이다. 그는 이 혼돈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질서라는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그가 얼마나 질서라는 교리를 열렬하게 신봉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일화가 있다. 그는 새로운 종들을 수천 종 낚아 올린 뒤, 각각의 종들마다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 이름들을 반짝이는 주석 꼬리표에 펀치로 새기고, 에탄올이 담긴 유리단지에 표본과 함께 이름표를 넣었다. 그런데, 1906년 어느 봄날 아침, 난데없이 지진이 일어나 그가 수집한 표본들이 바닥에 떨어져 박살이 나게 되었다. 그가 꼼꼼하게 이름을 붙인 수천 마리의 물고기들이 다시 미지의 존재로 돌아가고만 것이다. 이는 혼돈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질서를 세우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할 운명이라는 경고 메시지와도 같았다. 하지만, 조던은 그런 경고에 굴하지 않았다. 그는 바늘과 실을 이용해, 형체를 알아볼 수 있는 물고기들의 목살에 이름표를 꿰매 붙였다. 질서를 세우려는 시도는 무용하다는 세계의 경고에, 질서를 더 강하게 신봉하는 모습으로 대응한 것이다. 이처럼 혼돈이 그를 찾아올 때마다, 그는 조건반사적으로 질서를 추구했다. 그는 친형이 죽었을 때도 수집에 몰두하여 상실감을 극복하고자 했고, 첫 아내가 죽었을 때도 바로 새 아내를 들여 안정을 찾고자 했다.
조던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던 흐름 속, 갑작스럽게 작가인 룰루 밀러의 이야기가 틈입한다. 작가 룰루 밀러의 학창 시절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절망이 해소되지는 않고 쌓여가기만 하던 찰나, 16살의 그녀는 자살을 기도하지만 그마저도 실패로 돌아간다. 그러던 중, 대학에 들어온 그녀에게 빛을 발하는 존재가 찾아온다. 계피 냄새를 풍기고, 다정하고도 엉뚱한 매력이 있는 남자가 그녀의 인생에 들어온 것이다. 그와 사귀게 되고, 동거를 하게 되면서, 그녀는 자신에게 절대 존재하지 않으리라 생각한 안식처를 찾게 된다. 하지만 그와 사귄 지 7년째에 접어들었을 때, 룰루 밀러가 한 소녀에게 관심을 가졌다는 게 그에게 알려지면서, 둘의 사이에 균열이 발생한다. 룰루 밀러는, 안정세에 접어든 자신에게 찾아온 혼돈의 유혹에 넘어간 나머지, 그동안 세워놓은 질서의 탑을 무너뜨릴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녀는 남자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애를 쓴다. 편지를 쓰고, 기다리고, 기대했다. 하지만 3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믿음을 버리지 않으려고 애를 쓰던 룰루 밀러는 조던의 이야기를 알게 된다. 혼돈의 지배를 거부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룰루 밀러는 희망을 얻는다. 그녀는 조던이 어쩌면 무언가 핵심적인 비결 - 아무 약속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희망을 품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 - 을 찾아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었다.
룰루 밀러는 조던이 절망에 빠졌을 때 스스로에게 속삭인, '운명의 형태를 만드는 것은 사람의 의지다.'라는 말에서 힌트를 얻는다. 그녀는 조던의 이 말을 일종의 '자기기만'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이런 형태의 자기기만이 인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전문가적인 견해를 조사해 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흥미로운 연구 결과들이 드러났다. 임상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인생에서 황금기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자기기만적인 특징이 발견되었다. 1980년대 말에 이르자 약간의 자기기만은 강한 정신력에 더 유익하다는 사실이 널리 받아들여졌다. 별 근거는 없더라도 막연하게 자신의 미래가 낙관적일 거라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심리적으로 긍정적인 혜택이 따른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상당히 많다. 이때 핵심은 자기기만이 적당한 수준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수의 연구가 밝혀낸바, 극단적 부인이나 기만은 오히려 적응에 해롭다고 나타났다. 그러나 순한 거짓말, 하얀 거짓말, 작은 장미봉오리 같은 거짓말은 무척 이로운 효과를 낼 수 있다고 한다.
이는 '그릿 Grit'이라는 개념과도 연결된다. '그릿'이라는 단어의 의미와 그 탄생에 얽힌 비화를 알아보려면, 시간을 2000년대 초로 되돌려야 한다. 2000년대 초, 앤절라 더크워스Angela Duckworth라는 한 고등학교 수학교사가 심리학 박사가 되겠다는 결심을 한다. 여러 해 동안 더크워스는 왜 어떤 학생은 다른 학생들보다 공부를 더 힘들어하는지, 성취도가 높은 학생들에게는 무슨 비밀이 있는지 알아내고 싶어 했다. 몇 년 뒤 더크워스는 그 비밀의 요소라 여겨지는 한 가지 특징을 발견하고 그 특징에 ‘그릿 Grit’(끈질긴 투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릿이란, '긍정적 피드백이 없는데도 매우 장기적인 목표에 로봇처럼 뛰어들게 해주는 것'이다. 더크워스는 웨스트포인트(미 육군사관학교) 사관생, 최고경영자, 뮤지션, 운동선수, 셰프 등 거의 모든 직업에서 정상에 선 사람들에게서 그릿을 발견했다.
이 그릿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놀랍게도 자기기만이라고 불리는 긍정적 착각이 그릿의 획득에 도움이 된다. 다른 연구들도 마찬가지로 긍정적 착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좌절을 겪은 뒤에 낙담할 가능성이 적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좌절을 겪은 뒤에도 계속 나아갈 수 있는 능력,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는 증거가 전혀 없는데도 계속해나갈 수 있는 능력, 또는 더크워스의 표현을 빌리면 '실패와 역경, 정체에도 불구하고 수년간 노력과 흥미를 유지하는 것' 말이다.
실제로 조던의 생애를 들여다보면 벌어지는 불행을 실시간으로 막아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는 어떤 거부나 모욕이나 실패도 받아들여 그것을 칭찬으로 바꿀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이미지를 해칠 수 있는 정보는 교묘하게 편집하거나 삭제하는 재주도 가지고 있었다. 그의 행보는, 지속적으로 오만을 복용하는 것이야말로 실패할 운명을 극복하는 최선의 방법임을 보여주는 증거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자기기만의 행위에 긍정적인 결과만 존재하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세계 곳곳의 연구자 집단도 이 의문을 풀기 위해 여러 가지 조사를 수행했다. 그 결과를 보면, 긍정적 착각이 순전히 좋은 결과만 가져온다고 믿기가 꺼림칙해진다. 델로이 폴허스Delroy Paulhus는 대학생들이 처음에는 자존감이 높은 학생들에게 끌리지만 시간이 가면서 그들에게 싫증을 내고 그들을 더 부정적으로 평가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토마스 차모로-프레무지크Tomas Chamorro-Premuzic는 직장에서 과도한 자신감을 보이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고용 안정성을 더 떨어뜨릴 수 있음을 알게 됐다. 또한, 긍정적 착각이 더 나은 신체 건강과 상관관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연구들 중 가장 널리 인용되던 한 연구는 그 결과를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많은 오류를 담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자기 고양self-enhancement”에 관한 수백 건의 연구를 메타 분석한 마이클 더프너Michael Dufner는 과도한 자신감을 보이는 사람들의 자기 과시가 다른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지만 정작 자신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결국 공동체 안에서 좋은 평판을 받을 때 얻을 수 있는 혜택을 놓치기도 한다는 걸 발견했다. 사회적인 측면에서만 손해를 보는 게 아니다. 자기기만의 두꺼운 거품벽 안에 있으면 고통이 서서히 축적될 수 있다. 윌버타 도노반Wilberta Donovan은 아기 엄마들이 자신에게 통제력이 있다는 착각이 심할수록 아기가 울음을 그치지 않을 때 우울한 엄마들보다 막막함을 더 심하게 느낀다는 것을 알아냈다. 리처드 로빈스Richard Robins와 제니퍼 E. 비어Jennifer E. Beer는 4년에 걸쳐 대학생들을 관찰하면서, 긍정적 착각을 더 많이 하는 학생들이 단기적으로는 (자신이 과제에서 실제로 낼 수 있는 것보다 더 좋은 결과를 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 행복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평온 지수는 급감한다는 걸 밝혀냈다. 로빈스와 비어는 그들이 스스로 실망을 자초하는 것이라고, 즉 “단기적으로 혜택을 얻는 대신 장기적으로 비용을 치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서 기만은 나중에라도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이다. 장밋빛 렌즈의 힘에는 한계가 수반된다. 그리고 그 힘이 떨어지면 자신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정말로 따끔하게 받아들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