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리뷰 (下)
스탠퍼드 학장 자리에서 물러난 조던은 우생학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는 인류의 쇠퇴를 방지하기 위해, 열등한 유전자들을 가진 부적합자들을 몰살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어떤 우생학자들은 유전자 풀에 “우월한” 유전자가 흘러넘치도록, 엘리트들에게 더 많은 아기를 낳도록 돈을 지급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또 다른 우생학자들은 상류층이 여러 배우자를 갖는 걸 합법화하는 방법을 제안하기도 했다. 조던의 생각은 이들과는 달랐다. 그는 “박멸”을 실현하고자 했다. 그는 “부적합”해 보이는 사람들의 생식기를 잘라내, 부적합자들을 불임화시키고자 했다. 이러한 초기 우생학자들의 주장이 퍼지게 되면서, 미국 전역의 뒷골목에서 불임화 수술이 은밀히 행해지고, 때로는 처형까지 자행되었다. 조던은 여기서 더 나아가 우생학적 불임화의 합법화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1907년 블루밍턴에서 사귄 그의 친구들 몇 명이 인디애나주에서 우생학적 강제 불임화를 법제화하는 데 성공했다. 2년 뒤 조던은 캘리포니아주에서도 그 법이 통과되도록 도왔다. 우생학의 대의에 대한 조던의 헌신이 어찌나 눈에 띄었던지, 미국양육가협회 우생학위원회가 그에게 위원장을 맡아달라고 요청했을 정도였다.
물론 모든 미국인이 유전적 정화를 통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들자는 계획에 열성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미국변호사협회, 가톨릭교회 등이 반대의 목소리를 냈고, 과학적으로 우생학에 반박하는 의견들도 점점 쌓여갔다. 무엇보다 이견의 핵심은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에 있었다. 다윈은 한 종이 여러 가지 위협에 버틸 수 있게 만드는 가장 큰 무기가 '변이'라고 생각했다. 동질성은 사형선고와 같다. 한 종에서 돌연변이와 특이한 존재들을 모두 제거하는 것은 그 종이 자연의 힘에 취약하게 노출되도록 만들어 위험을 초래한다. 다윈은 다양성이 있는 유전자 풀이 얼마나 건강하고 강력한지, 서로 다른 유형 개체 간의 이종교배가 그 자손에게 얼마나 큰 “활력과 번식력”을 만들어주는지, 심지어 완벽하게 자기 복제할 수 있는 벌레들과 식물들까지도 새로운 변이형을 만들어낼 수 있게끔 유성생식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것에 놀라고는 했다.
다윈의 말을 달리 표현하자면 “당신의 유전자 포트폴리오를 다양화하라”가 될 것이다. 상황이 바뀌면 그 상황에 어떤 특징이 더 유용하게 적용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다. 다윈은 간섭하지 말라고 특별히 강력하게 경고한다. 그가 위험히게 여기는 것은, 인간의 눈에서 비롯된 오류 가능성, 그리고 자연의 복잡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이다. “적합성에 대한 우리의 관점에서는 불쾌하게” 보일 수 있는 특징들이 사실 종 전체나 생태계에는 이로울 수도 있고, 혹은 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바뀌면 이로운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기린에게 경쟁자에 대한 우위를 갖춰준 것은 거추장스러운 목이었고, 바다표범이 심한 추위에도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움직이지 못할 만큼 무거워 보이는 체지방 덕분이었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외부 형질에만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 자연은 외양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 자연은 모든 내부 기관과 모든 미세한 체질적 차이에, 생명의 전체 조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다윈은 지구의 수많은 생명들의 순위를 정하지 말라고 그토록 뚜렷이 경고한다. 그 이유는 어느 무리가 승리하게 될지 인간은 결코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생학자들은 이런 단순한 상대성의 원칙을 고려하지 못한 것이다. 유전자 풀에서 “필수 불가결한” 다양성을 제거하려고 노력함으로써 그들은 사실상 지배자 인종을 구축할 최선의 기회를 망쳐버리고 있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조던은 왜, 우생학이라는 잘못된 학문, 그리고 사상을 그렇게 끝까지 몰아붙였던 것일까? 가장 눈에 띄는 원흉은 그가 스스로의 장점으로 여겼던 "자기기만"으로 볼 수 있다. 조던은 “자기가 원하는 것은 다 옳은 것이라고 자신을 설득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고, 그 능력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 강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운명의 형태를 만드는 것은 사람의 의지다.'라는 그의 생각이, 그에게 삶의 원동력을 부여했을지는 몰라도, 많은 사람들의 삶을 절망 속에 빠뜨리고 있었다.
하지만 작가인 룰루 밀러는, 이 '자기기만'만으로 조던이 우생학에 그렇게까지 광적으로 몰두한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조던의 생애를 다시 한번 돌아보면서, 어떤 요인이 그를 해당 방향으로 몰고 갔는지를 찾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젊은 조던의 정신에 심어져 있던 관념의 씨앗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자연 속에 사다리가 내재해 있다는 믿음이었다. 자연의 사다리. 박테리아에서 시작해 인간에까지 이르는, 객관적으로 더 나은 방향으로 향하는 신성한 계층구조말이다. 그 관념은 그가 하나의 재앙을 헤쳐나가고 이어서 다음 재앙을 헤쳐나가는 연료가 되어주었다. 그는 자연을 탐구하다 보면 인류를 더 나은 존재로 발전시킬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인류가 쇠퇴해 가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생각했을 때, 필요하다면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인류를 구출해야 한다는 소명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인류를 구원할 유일한 방법은 불임화라고 사람들을 설득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틀렸다. 그 근거는 그가 그토록 몰두했던 자연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동물은 인간이 스스로 우월하다고 가정하는 거의 모든 기준에서 인간보다 더 우수할 수 있다. 인간은 생물 중에서 가장 뇌가 큰 것도 아니고, 번식력이 가장 좋은 것도 아니며, 가장 빠르지도, 힘이 가장 세지도 않다. 지구에 사는 모든 생물들을 검토해 볼 때, 인간을 꼭대기에 두는 계층구조를 그려내기 위해서는 상당한 무리가 필요하다. 다윈은 "자연은 비약하지 않는다"라고 외쳤다. 우리가 보는 사다리와 계층은 상상의 산물일 뿐이며, 진실보다는 편리함을 위한 것이다.
평생 동안 자연을 연구해 온 조던이 이러한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 사실을 알고도 외면했을까? 조던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 보자. 그의 삶은 '혼돈에 맞서 질서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질서 추구는 그에게 삶의 전부였다. 만약에 자연에 질서라는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고 혼돈만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인정해 버리면, 그의 삶은 아무런 의미가 남지 않게 된다. 그래서 그는 인정할 수 없었다.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순간, 세상을 이해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혼돈에 빠진 어린아이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인생이라는 항해에서 절망이라는 파도에 집어삼켜져 표류하게 된 작가 룰루 밀러는, 조던의 삶을 항해의 나침반으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그 나침반은 처음부터 오작동하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다시 안내자를 잃어버린, 혼돈으로 가득 찬 원래의 삶으로 되돌아와야 한다.
그러나 조던, 그리고 작가인 룰루 밀러가 받게 될 충격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80년, 분류학자들이 타당한 생물 범주로서 "어류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분류학에는 두 가지 큰 원칙이 있다. 첫 번째는 "타당한 하나의 진화적 집단은 특정한 한 조상의 모든 자손을 포함해야 하며, 다른 것은 하나도 포함해서는 안된다." 두 번째는 "누가 누구와 가장 가까운 관계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법칙을 따라 분류를 하다 보면, 우리들이 그동안 수많은 미묘한 차이들을 '어류'라는 하나의 범주 아래 몰아넣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생물 진화의 분기를 연구하는 분기학자들에 따르면, 물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생긴 생물들 중 다수가 포유류와 더 가까운 관계다. 폐어와 실러캔스는 허파와 심장 구조가 우리와 비슷하다. 연어, 농어, 송어, 장어, 가아 등은 겉보기에 물고기처럼 미끌미끌하고 비늘이 있어 육기어류와 쌍둥이 같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그렇게 다를 수가 없다. 연골어강이라 불리는 상어와 가오리들은 비늘이 있는 송어와 장어보다 진화상으로 우리와 훨씬 더 거리가 멀다. 생명의 나무를 더 아래로 훑어 내려가면 먹장어 같은 무악류도 있고, 진화 분기상 척삭이라는 구조물을 가장 먼저 선구적으로 갖추었던 피낭동물인 멍게도 있다. "어류"라는 범주가 이 모든 차이를 가리고 있다.
물론 폐어와 실러캔스를 송어와 금붕어의 분류에 함께 밀어 넣어 "어류"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단,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과 공통 조상을 지닌 모든 후손이 함께 포함될 수 있도록 몇몇 다른 생물들도 어류라는 집단에 집어넣어야 할 것이다. 물가에 걸터앉아 있는 개구리, 하늘 높이 나는 새들, 당신의 엄마까지, 모조리 어류라는 집단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면, 어류란 내내 우리의 망상이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어류"라는 범주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조던에게 너무나도 소중했던 그 생물의 범주, 그가 역경의 시간이 닥쳐올 때마다 의지했던 범주, 그가 명료히 보기 위해 평생을 바쳤던 그 범주는 결코, 단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
물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그 생물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 보다도 훨씬 복잡하다. 그 “어류”라는 말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경멸적인 단어다. 우리가 그 복잡성을 감추기 위해, 계속 속 편히 살기 위해, 우리가 실제보다 그들과 훨씬 더 멀다고 느끼기 위해 사용하는 단어다. 이와 같은 수많은 언어적 수법을, 영장류 학자 드 발은 “언어적 거세”라고 표현했다. 즉 그것은 우리가 언어를 사용해 동물들의 중요성을 박탈하는 방식이자, 우리 인간이 정상의 자리에 머물기 위해 단어들을 발명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어류라는 범주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작가 룰루 밀러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향해, 무한한 가능성의 장소로 눈을 돌린다. 그녀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 그녀는 줄곧 스스로가 찾고 있었던 것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은 파괴와 상실과 마찬가지로, 좋은 것들 역시 혼돈의 일부라는 깨달음이었다. 죽음의 이면인 삶. 부패의 이면인 성장처럼. 그 좋은 것들을 절대 놓치지 않을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매 순간 인정하는 것이다. 산사태처럼 닥쳐오는 혼돈 속에서 모든 대상을 호기심과 의심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그녀는 해골 열쇠를 하나 얻었다. 이 세계의 규칙들이라는 격자를 부수고 더 거침없는 곳으로 들어가게 해주는 물고기 모양의 해골 열쇠. 이 세계 안에 있는 또 다른 세계.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고 하늘에서 다이아몬드 비가 내리며 모든 민들레가 가능성으로 진동하고 있는, 저 창밖, 격자가 없는 곳.
이어서 그녀는 “질서”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평가를 내린다. "질서"는 오르디넴ordinem이라는 라틴어에서 왔는데, 이 단어는 베틀에 단정하게 줄지어 선 실의 가닥들을 묘사하는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단어는 사람들이 왕이나 장군 혹은 대통령의 지배 아래 얌전히 앉아 있는 모습을 묘사하는 은유로 확장되었다. 1700년대에 와서야 이 단어가 자연에 적용되었는데, 그것은 자연에 질서 정연한 계급구조가 존재한다는 추측에 따른 것이었다. 그녀는 이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 계속 그것을 잡아당겨 그 질서의 짜임을 풀어내고, 그 밑에 갇혀 있는 생물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우리가 인생을 걸고 해야 할 일이라고 믿게 되었다. 우리가 쓰는 척도들을 불신하는 것이 우리가 인생을 걸고 해야 할 일이며, 특히 도덕적·정신적 상태에 관한 척도들을 의심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녀는 “모든 ruler(자) 뒤에는 Ruler(지배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하나의 범주는 잘 봐주면 단순한 대용물일 뿐이지만, 최악의 경우 그것은 존재를 옭아매는 족쇄가 된다고 경고한다.
다만 필자는 이 작품의 마무리가 썩 마음에 들지만은 않는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의 전반부는 '혼돈에 맞서 질서를 추구해 왔던 조던의 생애'에 대해서 다루고 있고, 후반부는 '그 조던의 삶이 말기에 어떻게 망가졌는지'와, '그로부터 깨달음을 얻은 작가 룰루 밀러의 혼돈예찬'이라고 볼 수 있다. 정리하자면, "질서"와 "혼돈"이라는 두 가지 개념에 대해 논한 뒤 후자를 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전자에 대한 고려가 너무 적은 것 같은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변증법적으로, 정(定)과 반(反)을 합쳐 합(合)의 결론을 이끌어낸 것이 아니라, 정과 반 중에 그저 하나를 택하는 방식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또한, "질서"대신 "혼돈"을 택하는 것이 과연 무조건적으로 좋은 삶인지, 그리고 그 삶이 과연 실현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남는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 그리고 해당 책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책 <이미지란 무엇인가>에는 다음과 같은 서술이 나온다.
우리의 정체성은 결코 고정될 수 없다. 의식의 부정적 본성에 따라 우리가 발을 디디는 모든 지반은 흔들린다. 무게를 실으려 시도하는 순간 바닥은 힘없이 꺼져 들어간다.
우리에게 주어진 어떤 고정된 바탕도 없다는 것, 우리 스스로 그 어떤 본질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 이것이 자유의 진정한 의미이며, 이와 같은 자유에 대한 감각이 불안이다. "불안이란 자유 자체에 의한 자유의 반성적인 파악이다."(존재와 무, 99) 불안은 발밑에 무게를 실어 의지할 단단한 토대가 없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 우리가 느끼게 되는 현기증인 것이다. 그리고 상상은 바로 이와 같은 불안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몸짓이다.
(이솔, <이미지란 무엇인가> 中)
즉, '그 어떤 본질도 가지고 있지 않은' 혼돈의 상태는 필연적으로 불안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불안에서 벗어나 혼돈을 지우려는 '상상'이 질서의 추구일 것이다. 자신의 발 밑에 어떤 지반도 고정되지 않은 혼돈과 불안의 상태를, 우리는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을까? 작가인 룰루 밀러의 주장은 언뜻 듣기에는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애초에, 왜 조던을 포함한 많은 과학자, 분류학자들이 뻔히 보이는 사실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생각해 보자. 혼돈에 맞서 질서를 추구하고자 하는 행동을 아예 포기해 버린다면, 인간의 삶은 어떠한 의미도 없는 ‘무(無)’의 세계로 돌아가버리는 것 아닐까? 자연 속에 사다리가 내재해 있을 거란 조던의 믿음은 물론 잘못된 것이지만, 그와 비슷한 지지대가 없다면 인간의 삶은 혼돈의 무게를 쉽사리 버텨낼 수 있을까?
이 작품의 결말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필자가 이 책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이렇게까지 긴 리뷰를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만 앞서 언급한 결말부의 설득력 부족, 그리고 ‘고정된 지각 혹은 질서라는 체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이 책의 핵심 주제가, 이미 여러 예술 영화나 철학적 텍스트에서 반복되어 온 논지라는 점은 아쉽게 다가온다. 그만큼 이 책의 메시지가 필자에게는 다소 익숙하고, 참신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그 해 최고의 책’이라고 평가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혼돈과 질서, 자유와 불안의 문제를 처음 접하는 독자들에게는 이 책이 그 복잡한 주제를 단정하고도 쉽게 전달하는 훌륭한 입문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