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 한 소녀의 공상세계가 현실을 파괴하다

<속죄> 리뷰 및 분석 上

by 조종인

※ '제2회 우주리뷰상'에 지원했던 글입니다.


9788954690799.jpg


양귀자 작가의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이라는 소설에는 '황홀한 비극'이라는 말이 나온다. 작중의 서술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희극이 허용하는 감정은 페이소스가 고작이다. 하지만 비극에는 절정, 오르가즘이 있다. 다른 모든 것은 다 절대자가 관장한다 하더라도, 감정만은 우리의 것이다. 그 감정은 인간이 움켜쥘 수 있는 유일한 것이고, 모든 비극은 황홀감을 지향한다." <속죄>는 그 '황홀한 비극'이라는 개념에 딱 들어맞는 작품이다. 독자들은 <속죄>를 읽으면서 큰 감정변화를 경험한다. 등장인물들이 불행의 극단으로 추락하는 걸 보면서 가슴 아파하고, 허구의 세계에서나마 그들에게 허락된 안식의 세계를 보며 절정을 경험한다. 이 이야기는 <속죄>의 작가 이안 매큐언이 총괄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개입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소설을 읽으면서 느끼는 감정은 오롯이 우리의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독자의 감정을 거세게 요동치게 만드는 서사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들이 필요할까?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이언 매큐언의 작품들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작품 <체실 비치에서>에서는 시대의 억압, 그리고 두 남녀의 상반된 욕망이 겹쳐지며 신혼 첫날밤이 파국으로 치닫는 상황이 묘사된다. 또 다른 작품, <칠드런 액트>에서는 종교와 법, 아이와 어른 사이의 경계에서 맞닿을 듯하면서도 합치되지 않는 인물들 간의 관계 사이에서 비극이 탄생한다. 매큐언의 이야기들은 여러 가닥의 와이어가 얽혀 독자와 인물들을 가두는 그물이자, 우연과 시대상이 벽돌처럼 쌓여 만들어진 비극의 바벨탑과 같다.


하지만 많은 대중은 이러한 ‘황홀한 비극’을 피상적으로만 받아들인다. 거대하고도 복잡한 구조를 가진 이 이야기를 제대로 해체하려면, 상당한 시간과 집중력이 요구된다. 그러나 지금은 바야흐로 숏폼의 시대다. 모두가 짧고 간단한 콘텐츠를 선호하며, 이야기의 길이는 물론, 그것에 대한 감상과 해석의 밀도마저 점점 얇아지고 있다. 소비자들은 ‘고구마’를 원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즉각적인 해소감을 주는 ‘사이다’를 원한다.


이 <속죄>는 독자들의 그런 기대에는 맞지 않는 책이다. 약 500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읽으면서 끊임없이 고구마를 목구멍으로 밀어 넣은 독자들은, 결말에서 사이다 한 모금조차 얻지 못한 채, 분노에 질식하고 만다. 긴 시간 동안 불쾌하고도 무력한 감정을 견뎌낸 독자들에게는, 이 작품이 그저 ‘철없는 여자아이가 한 커플을 파멸시킨 이야기’쯤으로 기억될지 모른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반응일지 모르지만, <속죄>라는 복잡한 이야기를 너무나 단편적으로 해석했다는 인상을 남긴다. 수박 겉핱기 같은 해석에 그치지 않으려면, 이야기를 구성하는 그물망의 와이어, 혹은 비극을 떠받치는 벽돌 하나하나를 해체해보아야 한다. 그것이 어떤 재료로 만들어졌고, 어떤 방식으로 얽혀 있는지를 이해하는 순간, 우리는 마침내 진정으로 황홀한 <속죄>와 마주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브라이어니 : 한 소녀의 공상세계가 현실을 파괴하다

yZRuLH5gqlDZjPN1hKUQtqHtPAq.jpg


브라이어니 탈리스는 이언 매큐언의 <속죄>에서 가장 많은 독자들의 분노를 유발하는 인물이다. 그녀의 치명적인 오해는 죄 없는 두 사람을 비극의 소용돌이로 밀어 넣은 뒤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했다. 그녀의 ‘속죄’는 소설의 제목이기도 하지만, 독자들에게는 쉽게 납득되지 않는 변명처럼 들리기도 한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까지도 브라이어니를 용서하지 못한 독자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그녀의 행위가 심리적·도덕적으로 쉽게 감당될 수 없는 무게를 지녔다는 걸 말해준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왜 그녀가 그런 오해를 했는지, 왜 그녀는 그렇게밖에 속죄할 수 없었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 작품이 던지는 근본적인 질문을 외면하는 셈이 된다. 이 책이 <누명>이 아닌 <속죄> 여야만 했던 이유, 그리고 그녀가 이야기의 마지막 장을 쓰는 ‘작가’로 자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브라이어니가 어떤 인물이고, 왜 그런 엄청난 ‘오해’를 범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브라이어니는 기본적으로 현실 세계보다 '공상'의 세계를 더 동경하는 인물이다. 그녀의 공상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은 누구나 공상의 논리를 이길 수 없다는 환상이었다. 그녀는 영원히 공상 속에 머무르고 싶어 했으며, 결코 현실로 돌아오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녀는 공상과 예술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을 타인에게 설파함으로써, 그 공상 속으로 타인을 끌어들임과 동시에 그들에게 인정받는 자가 되고 싶다는 심리를 가지고 있다. 즉, 그녀는 내심 본인이 구원자의 자리에 위치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브라이어니와 같은 생각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어머니처럼 그녀의 공상으로 만들어진 예술 작품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있는 반면, 그녀의 친척인 피에로와 잭슨처럼 그녀의 공상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인물들도 있었다. 브라이어니는 자신과 뜻이 다른 이들의 의사를 존중하기보다, 협박을 통해 그들을 억지로 연극에 참여시키는 모습을 보인다. 이를 통해, 브라이어니가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강제로 끌고 가는 면모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요컨대, 브라이어니는 (1) 현실보다 공상, 혹은 예술의 세계를 더 선호하며, (2) 자신이 만들어낸 서사 속 질서에 다른 이들을 끌어들이며, (3) 목적을 위해 강제적인 수단도 불사하는 인물이다.


nYdsgySIEn2AFdqid6MNE68x5Bk.jpg


브라이어니는 세실리아, 그리고 로비와 관련된 총 3가지 사건을 목격한다. (1) 꽃병이 깨지고 세실리아가 분수대에 뛰어들어 그 조각을 꺼내온다. (2) 로비가 세실리아에게 성적인 뉘앙스가 담긴 편지를 보낸다. (3) 그 직후 로비와 세실리아가 사랑을 나눈다. 브라이어니는 이 3가지 사건을 목격한 뒤 '로비는 정신병자이며, 세실리아에게 어떤 폭력을 가하고 있다'라는 본인 나름의 해석을 내린다. 여러 사건들의 톱니바퀴가 현실과는 다른 방향으로 회전하다가, 브라이어니의 머릿속에서 이상한 방식으로 맞물리면서 뜻밖의 결론을 도출하게 된 것이다. 이런 톱니바퀴의 오작동에는 여러 가지 외부 요인이 개입되었다.


첫 번째 요인은 브라이어니가 로비에게 품고 있던 동경, 혹은 연정의 감정이다. 소설 2부에서 로비는 전쟁터에서 과거를 회상한다. 그리고, '브라이어니는 어린 시절 자신을 짝사랑했고, 자신과 세실리아가 사랑을 나누는 것을 목격한 뒤 배신감을 느꼈기 때문에 자신에게 누명을 씌웠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사춘기 소녀의 질투와 배신감은, 한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리는 이유가 되기에는 너무 가벼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당시 시대상이라는 '두 번째 요인'이 개입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전혀 이상하지 않다.


1930년대 영국은 성적 억압과 계급 질서가 공고한 사회였다. 질서와 통제를 중시했고, 스스로가 만든 아름다운 공상 속에서 살아오던 브라이어니는, 갑작스럽게 그 밖에 있는 현실을 마주하고 크게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전까지 아름다움으로만 가득했던 세계가, 갑작스럽게 낯설고 위협적인 존재로 변모한 것이다. 그녀의 세상에 로비와 세실리아가 보여준 것 같은 난폭한 사랑의 형태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브라이어니에게 그 장면은 폭력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었다. [1][2]


fsjfLn3x6RGii72SdO6ejX75mwi.jpg


이런 상황에서 롤라가 누군가에게 강간당하는 일이 벌어지자, 브라이어니는 한 가지 결심을 하게 된다. '모두를 이 추악한 세계에서 벗어나게 만들기 위해, 자신이 만든 공상 속 세계로 모두를 끌어들이겠다'라고 말이다. 스스로 구원자의 위치에 서겠다는 그녀의 욕망이 이 시점에서 발현된 것이다. 그녀가 스스로가 만든 무대에서 구원자가 되기 위해서는, '피해자'와 '악당'이 필요했다. 그녀는 피해자 역할로 롤라를, 악당 역할로 로비를 세웠다. 브라이어니는 맹목적으로 공상의 미로 속으로 걸어 들어갔으며, 그 미로 속으로 다른 이들을 끌고 갔다. 미로에 들어오고 나서 많은 시간이 흐르자, 그녀의 마음속에서 '정말 이 길이 맞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싹튼다. 그녀는 더 큰 확신을 통해 그 의구심을 덮어씌워버리는 방법을 택했다. 유일하게 증언할 수 있는 사건 당사자 롤라는 침묵했고, 믿을 수 있는 것은 한 어린아이의 증언 밖에 없는 상황. 마침내 경찰들은 브라이어니의 공상을 현실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수사가 종결되고 재판과 선고 과정이 마무리되자, 출발지점으로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 이것이 한 순수한 소녀가, 아무 죄 없는 한 청년을 죄인으로 만들기까지의 과정이었다.



로비와 세실리아 : 브라이어니의 잘못된 증언이 나온 파급효과

kPU4W7XpXlgwljkbhHqRWEF8PFU.jpg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로비와 세실리아의 관계는 시작부터 위태로웠다. 당시 영국에서는, 신분제가 법적으로는 폐지되었지만,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계급 사회적 인식은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은 상태였다.[3] 그런 상황에서, 하녀의 아들인 로비와 상류층 집안의 여성 세실리아의 사랑은 사회 체제에 대한 저항으로 느껴질 여지가 충분했다. 그들의 저항은 한 소녀의 밀고에 의해, 제대로 시작도 해보기 전에 무너지고 만다. 또한, 브라이어니와 세실리아의 가문인 텔레스 가(家)는, 자신들의 권위에 흠집을 내가면서까지 브라이어니의 주장을 번복할 이유가 없었다. 그들을 둘러싼 사회가 그들의 사랑을 처음부터 탐탁지 않게 여겼기에, 로비에게 씌워진 누명을 벗겨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브라이어니의 행동은 한 쌍의 커플을 와해시킴과 동시에, 두 남녀 개인의 삶도 비극으로 몰고 갔다.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더라면, 로비는 의대에 진학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면, 2차 세계대전 때 위험한 전투 요원으로 복무하는 대신, 군의관으로 비교적 안전하게 복무할 가능성도 존재했다. 하지만 강간범으로 몰린 로비에게는, 직접 전쟁에 나간다는 것 이외의 선택지는 없었다. 결국 그는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고 만다. 로비의 삶뿐만 아니라, 세실리아의 삶도 무너졌다. 세실리아도 가족과의 관계를 끊어버리게 되었고, 피난 중 폭격으로 인해 사망하게 된다. 에필로그에서 리언, 브라이어니 등이 모두 생존해 있는 것을 볼 때, 그녀가 가족과의 관계를 유지했고 그들과 함께 행동했다면, 폭격으로 인해 사망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브라이어니가 로비에게 누명을 씌운 순간, 로비와 세실리아의 삶에서 존재했을지도 모르는 가능성은 모두 0이 되었다. 그들의 사랑은 잠시 피어오른 향 연기처럼, 형체를 이루려는 찰나, 바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들의 사랑에서 더 이상 미래는 존재하지 않았고, 그들 개개인의 삶도 사라졌다. 이 시점에서, 브라이어니의 행동은 단순한 현실의 왜곡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간 간접적 살인이 된다.



롤라와 폴 마샬 : 반쪽짜리 속죄

x4LtCyMioc61of6jRmJ0xQ78rbd.jpg


브라이어니의 간접적 살인에는 눈에 잘 띄지 않는 공범 두 명이 존재했다. 바로 강간 사건의 피해자인 롤라, 그리고 가해자인 폴 마샬이다. 폴 마샬은 범인에 대해 밝히지 않는 대가로, 그녀에게 자신의 인생의 동반자가 되어달라는 제안을 건넨다. 둘의 이해관계가 일치했고, 마침내 롤라는 폴 마샬의 재력을 공유하는 인생의 동반자가 될 수 있었다. 정말로 사랑했던 커플, 로비와 세실리아 간의 사랑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반면, 폴 마샬과 롤라는 서로 맺어질 수 있었다. 진실이어야 했던 것은 거짓이 되었고, 거짓이어야 했던 것은 진실이 된 것이다.


롤라는 강간 사건의 피해자이다. 하지만 그녀는 브라이어니가 로비에게 누명을 씌우는 행동에 침묵으로 동조함으로써, 피해자임과 동시에 가해자라는, 특이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이들은 어려운 사람들에게 '기부'를 하는 방식으로 속죄를 한다. 하지만, 그 속죄는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속죄는 두 가지 방식으로 의미를 가진다. 첫 번째는 본인이 저지른 과오를 수습하는 일이고, 두 번째는 스스로의 죄책감을 덜어내는 것이다. 폴 마샬과 롤라 부부의 속죄는 사건의 현실을 외면하고 있으며, 현실을 전혀 바꿀 수 없다. 그렇기에, 그들의 속죄는 반쪽짜리다.




참고 문헌

[1] Hera Cook, No turning back: Family forms and sexual mores in modern Britain, History & Policy

[2] Reiss, Michael. A Brief History of Sex Education. Open University.

[3] Cannadine, David. Beyond Class? Social Structures and Social Perceptions in Modern England. British Academy lecture.


이미지 출처 : TMDB

keyword
이전 07화<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혼돈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