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 리뷰 및 분석 下
※ '제2회 우주리뷰상'에 지원했던 글입니다.
이전 글에서 이어집니다.
독자들을 고통 속에 빠뜨렸던 1부와 2부가 끝나면, 그들은 브라이어니의 속죄 이야기가 나오는 3부와 마주한다. 브라이어니는 간호사로 일하면서 스스로의 죄책감을 덜고자 한다. 이에 더해, 그녀는 본인이 저질렀던 과오를 수습하고자 했다. 브라이어니는 세실리아, 그리고 로비와 만나 본인의 잘못에 대해 사과를 건넨다. 브라이어니는 이들과의 만남에서, 스스로의 증언을 번복함으로써 로비의 누명을 벗겨줄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렇게 독자들의 기대감이 증폭될 무렵, 이어지는 에필로그에서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난다. 사실 1부에서 3부까지 우리가 봐온 이야기는 모두 브라이어니가 현실을 바탕으로 창작한 허구였다. 로비와 세실리아는 로비가 누명을 쓰면서 헤어진 이후, 다시 만난 적이 없었을뿐더러, 둘 다 전쟁의 여파로 사망한 상태였다. 또한, 브라이어니는 본인이 저지른 과오와 직업 마주할 용기가 없어 그들을 만나러 가지도 못했다. 한편, 사건의 가해자인 폴 마샬과 롤라 부부는 막대한 재력을 통해 본인들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모든 일들을 무력화시키고 있었다.
이런 냉혹한 현실 속에서, 브라이어니의 속죄에는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 냉정히 말하자면, 브라이어니의 속죄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속죄를 통해 그녀 스스로의 죄책감은 덜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현실을 바꿀 수는 없다. 그녀가 자신이 저지른 일이 일종의 '범죄'임을 깨달았을 때는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었고, 그녀가 장성한 예술가가 되었을 때 로비와 세실리아는 이미 죽은 상태였다. 이 이야기를 바꾸기 위해서는 시간을 되돌리는 방법밖에 없었지만, 브라이어니는 신이 아니라 한 명의 무력한 인간이다.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 속죄가 불완전하다고 해서 브라이어니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의 속죄를 조금이라도 완전함에 가까운 형태로 만들기 위해, 그녀는 속죄의 새로운 의미를 찾아낸다. 그녀는 더 이상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 앞에서, 허구를 만들어내서라도 스스로 책임을 지겠다는 결심을 내린다. 3부 시점의 브라이어니는 <분수대 옆의 두 사람>이라는 단편을 쓴 뒤 잡지사에 기고한다. 이는 브라이어니가 분수대에서 세실리아와 로비의 일을 목격한 것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었다. 이 작품에는 브라이어니가 둘의 행동을 보고 나서 생긴 오해, 그리고 그 오해로 인해 발생한 그 이후의 '범죄'에 대한 내용은 들어있지 않았고, 오직 분수대에서 일어난 일에만 이야기한 채로 마무리되었다. 잡지사에서는 그녀의 작품에 대해 "풍경과 인물의 감정 묘사는 아주 훌륭하지만, 이야기가 결여돼 있다. 독자들은 그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궁금해하며, 작품을 읽으며 긴장과 스릴을 느끼고 싶어 하는데, 이 작품에서는 그런 것을 느낄 수 없다."는 평을 내리며 작품을 게재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이 장면은 문학과 윤리의 역설을 드러낸다. 독자들을 매혹시키기 위해 작가는 고통과 갈등을 생생하게 표현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는 현실을 바탕으로 작품을 쓰는 작가의 입장에서 쉽지 않은 일이다. 작가는 본인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다시금 떠올려야 하고, 창작물을 만드는 과정에서 그때의 감정과 직면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런 역설과 모순에 빠져있던 브라이어니는, 예술의 생동감을 억압한 채, 현실과 예술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에필로그 시점에서, 마침내 브라이어니는 방황을 끝내고 결론을 내린다. 자신이 저질렀던 범죄를 제대로 직면함과 동시에, 현실에 허구를 결합하여 가상의 세계에서만큼은 피해자들에게 안식을 내려주기로 말이다. 더 이상 바꿀 수 없는 현실의 세계를 뒤로하고, 그녀는 어린 시절 자신이 했던 것처럼 공상의 세계로 떠난다. 하지만 그녀는 어린 시절의 자신과 엄연히 다르다. 그녀는 이제 공상으로 도피하지 않는다. 공상으로 진실을 왜곡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공상을 통해 현실을 더 아름답게 꾸며내고, 타인의 고통을 기억하며, 자신의 죄가 가진 무게를 견뎌낼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브라이어니가 자신의 죄를 깨달았을 때는, 자신의 과오를 수습하기에 너무 뒤늦은 시각이었다. 본인의 죄책감을 덜어낼 수 있을지는 몰라도, 현실을 바꿀 수는 없다. 그래서 그녀는 일반적인 속죄의 의미를 따르기보다, 속죄의 새로운 의미를 끄집어내기로 결심한다. 그것은 바로 '아름다움'과 '불멸'이다. 활자란 아주 신기한 존재이다. 활자는 독자에게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며, 그들에게 살아갈 의지를 만들어준다. 활자는 생명 없는 무생물이지만, 그것을 소비하는 자들에게 생명력을 부여하는 특이한 속성이 있다. 작가 스스로가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는 현시점에, 그녀는 자신의 생명력과 뒤바꿔 영생의 작품을 창조했다. 실제 로비와 세실리아의 사랑은 연기처럼 피어올랐다가, 바로 사라지고 마는 아주 짧은 생명력을 지닌 사랑이었다. 그들이 정말 열렬하게 서로를 좋아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사랑은 잊히게 되었을 것이다. 그와 더불어, 브라이어니, 그리고 폴 마샬과 롤라가 저지른 범죄도 영원히 기억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브라이어니의 작품을 통해 이 사건은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았다. 작가인 브라이어니 또한 로비와 세실리아의 뒤를 이어 언젠가 죽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속죄는 사건 관계자들이 모두 사라져도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속죄>의 맨 처음 부분에 등장했던 <아라벨라의 시련>이라는 희곡이, 64년의 시간이 흐른 에필로그 시점에서 다시 나타나는 것은 단순한 우연으로 볼 수 없다. <아라벨라의 시련>은 13살의 어린아이였던 브라이어니가 썼던 희곡으로, '아라벨라'라는 여성의 이야기였다. 아라벨라는 외국에서 온 백작에게 열렬하게 사랑에 빠진다. 그녀는 백작과 결혼한 뒤 작은 마을로 도피하지만, 그곳에서 콜레라에 걸리는 불행을 겪음으로써 벌을 받게 된다. 백작에게 버림받은 그녀는 재기의 기회를 잡는다. 우연히 만난 가난한 의사의 정체가, 궁핍한 사람들을 돕는 왕자였던 것이다. 그와의 만남 덕분에 병이 나은 아라벨라는 가족과 화해하고, 마침내 사랑과 명예를 모두 되찾는다. 브라이어니가 이 희곡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이성에 근거하지 않는 무모한 사랑은 불행하게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13살의 브라이어니는 이 희곡이 가진 메시지를 실현시켜 버린다. 당시 시대상과 맞지 않는, 무모한 사랑을 했던 로비와 세실리아 커플에게 불행을 내려줌으로써 말이다. 그러나 이때 현실에서 이뤄진 <아라벨라의 시련>은 반쪽짜리였다. 원작처럼, 주인공이 구원받는 이야기가 아직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구원의 서사는, 64년이 지나 브라이어니의 손에 의해 마침내 완성된다. 노년의 브라이어니가 창조한 마지막 소설 속에서, 로비와 세실리아는 다시 만나 사랑하고, 끝끝내 함께한다. 현실에서는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지만, 허구의 힘으로 구원받게 된 것이다. 그렇게 <아라벨라의 시련>은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비로소 완전한 형태로 완성된다.
몇몇 독자들은 책장을 덮고 나서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본인들이 생각했던 아름다운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었고, 조물주의 자리에 올라 자기변명을 늘어놓고 있으며, 브라이어니 결국 현실을 바꾸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들의 심기를 끝까지 불편하게 만들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속죄>의 구조를 생각해 보자. 독자들은 왜 화가 났을까? 그것은 독자들이 브라이어니가 창조한 허구의 이야기에 깊이 몰입했고, 그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그 허구의 세계에서 위안을 받았고, 희망을 보았다. 그러니 독자들은 브라이어니의 속죄로부터 결코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브라이어니가 속죄의 '생산자'라면, 독자들은 속죄를 '관찰자' 혹은 '소비자'의 위치에서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독자들은 그녀와 같은 죄의식을 간접적으로나마 공유하게 되고, 마침내 <속죄>의 작가인 이언 매큐언이 던지는 질문에 도달한다. '브라이어니가 만들어낸 환상 속 사랑, 그 속죄의 서사를 아름답다고 느낀 그 순간, 나는 로비와 세실리아의 불행을 일종의 서사적 장치로 소비한 것은 아닐까?' 이언 매큐언은 이에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질문을 던졌을 뿐이다. 이제 이 질문은 독자들의 마음속 어딘가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속죄>라는 작품의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 그리고 그 안의 죄의식이 영원하듯이. 독자들에게 남은 과제는,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최대한 완전에 가까운 대답을 찾아내는 것이다. 결코 완전함이라는 프레임에서 도달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브라이어니가 그에 가까운 속죄를 하기 위해 끝까지 노력했듯이 말이다.
이렇게 '황홀한 비극'인 <속죄>의 내면을 깊숙하게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처음에 필자가 책장을 덮었을 때 느낀 감정은 크게 2가지였다. 결말을 바로 이해할 수 없어서 느끼는 당혹스러움과, 잠시나마 얻었던 희망을 다시 빼앗긴 것에 대한 분노였다. 인간은 스스로의 이해 범위를 넘어가는 사건과 마주했을 때, 대게 그 사건을 단순화해 이해의 틀 안에 억지로 끼워 맞추고자 한다. 필자 역시 그랬다. 처음 <속죄>를 다 읽었을 때는, 이 사건을 단순히 '브라이어니라는 특정한 가해자가 저지른 잘못'로 받아들이고자 했다. 하지만, 한 세계에서 선과 악의 경계가 분명하다면, 우리가 그 세계를 받아들이기는 쉬워질지 몰라도, 그 세계를 우리의 삶과 연결 지어 생각할 수는 없게 된다.[4] 브라이어니가 속죄의 새로운 의미를 끄집어냈듯이, 필자는 이 책을 읽으며 독서의 새로운 의미를 끄집어낼 수 있었다. 사건을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의미를 최대한으로 끌어낼 수 있는 나만의 독서법과 분석법을 구축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그제야, 이 책이 지니고 있는 황홀함은 온전히 내 것이 되었다.
참고 문헌
[4]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들』, 바다출판사, 2016
이미지 출처 : TM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