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아요.
(한강, <희랍어 시간> 中)
최근에 한 모임에서 나오게 되었다.
속해있던 기간은 3년. 절대 짧다고 볼 수 없는 시간을 뒤로하며 든 생각은, 시원섭섭함보다는 안타까움과 불안의 감정이었다.
이런 식으로 밖에 결별할 수 없었던 것일까.
그 사람들이 나에게 나간 이유를 물어본다면, 난 뭐라고 답해야할까.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단 한 가지의 원인을 꼽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인간관계에 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A가 싫어서 나간거에요"라는 답변은 당장 듣는 사람들을 납득시키기는 좋을 수 있겠지만, 사건의 본질로부터 눈을 돌리는 일이 될 수 밖에 없다.
A 외의 문제, B와 C, D 등이 분명이 존재할 뿐더러, 탈퇴를 결심한 나에게도 잘못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탈퇴 이후 2주 정도가 지난 지금, 나는 이 사건을 회고하고 있다.
그 사람들에게 잘못을 빌기위해서가 아니다.
내가 떠난 이유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저, 사건을 직시하면서 이후에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함이다.
언젠가부터 나는 모임에서 소외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나 이외에 따로 만나서 술자리를 갖는 사람들, 공식 단톡방 외에 따로 공간을 마련해 나를 제외하고 이야기하는 사람들. 분명히 나와 같은 공간에 있는데, 나를 제외한채로 이야기하는 사람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가장 모임에 헌신하고 있었던 나의 자리는 어디로 갔을까.
물론, 내향적인 내 입장에서 술자리 요청을 받는다면, 거절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사람들도 그걸 알고 나에게 묻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번의 요청을 주는 것이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이었을까. 서운한 감정이 날로 쌓여갔다.
해소되지 못한 소외감은 내 마음 속에서 점차 굳어져 하나의 씨앗이 되었다. 그 씨앗은 피해의식이라는 나무
의 형태로 자라났다.
'이 모임에서는 더 이상 내가 필요없는 것일까?'
그 즈음 한 모임 구성원과 나누었던 몇 번의 대화는 피해의식의 성장을 가속화시켰다.
"왜 그런 걸 나한테 물어봐?"
"너는 왜 그런걸로 속상해하니?"
나의 고민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으로 치부하는 그 가벼운 태도, 불이해의 감정은 점차 증오로 변모하여 내 안에서 보이지 않는 가시를 생성하고 있었다. 차마 그 가시를 몸 밖으로 내보일 수 없었던 나는, 스스로를 찌르면서 아무도 모르는 고통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내 가시는 점점 더 뾰족해지고 있었고, 내 몸 속의 상처의 개수도 늘어나고 있었다.
영화모임, '영화'와 '모임'이라는 두 단어가 합쳐져 만들어진 합성어이다.
그런데 나와 다른 모임원들 사이에서, 두 단어에 두는 가중치가 점차 달라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내가 영화를 더 우선시한 반면,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우선시한 것은 '모임'이었다.
"우리가 뭐 딥하게 영화 다루려고 만나는 건 아니잖아? 그냥 일주일에 한 번씩 스트레스 푸는 거지."
"아, 너무 바빠서 영화 볼 시간이 잘 안나길래 2배속으로 대충 봤어요."
물론 나도 영화모임에 들어오기 전에는 영화를 딱히 좋아하지 않았던 사람이라, 그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예술을 전혀 존중하지 않고, 가볍게 오락으로만 소비하려하며, 소비하고 난 이후에 사유는 필요없다는 듯한 그 태도, 전혀 변하지 않을 것만 같은 그 완고한 모습은 나를 점점 지치게 만들었다.
내 안에서 뾰족해진 가시가, 내 몸 바깥으로 뚫고 나올것만 같았다.
이제는 한계였다. 어떤 선택을 내려야만 했다.
내게는 세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첫 번째, 그 가시의 존재를 인정하고 모임원들에게 변화를 요구하는 것.
두 번째, 그 가시로 모임원들을 찌른채 자폭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혼자 가시를 끌어안은채 사라지는 것.
내 선택은 세 번째였다.
나에게는 변화를 요구할 용기도, 누군가를 상처 입힐 용기도 없었다.
나는 단체채팅방에서 '조용히 나가기'를 택했다.
나간 이유를 묻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침묵으로 일관하거나, '이제 그냥 혼자 영화를 보고 싶어서' 라는 대답을 돌려주었다.
슬기로운 대처는 아니었다. 몇년동안 학교에서 지나가면서 얼굴을 볼 수도 있는 사람들인데, 조금 더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을까.
가장 미안한 사람들은 1), 2), 3)의 이유에 아예 해당되지 않는 몇몇 사람들, 그리고 내가 나갈 마음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나를 붙잡아줬던 한 분이다.
그 분들께는 따로 사과의 카톡을 보냈다. 하지만 그 한 분은 내 카톡을 아직까지 읽지 않았다. 아무래도 나를 차단해버린 모양이다. 섭섭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이해는 된다. 그만큼 내 대처가 실망스러웠다는 뜻이겠지.
분명히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해 이 선택을 한 것인데, 지금 내 마음은 상처투성이다. 시간이 지나면 가시가 뭉툭해지기는 할까. 확실한 것은, 모임으로 인해 가시가 더 뾰족해지는 일은 없다는 것뿐이다.
잘못을 정당화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글을 쓰고보니 온통 변명투성이다.
변명이라는 건 내 상처를 어루만지는 일이다. 상처가 조금은 아물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잘못된 자리를 더듬어 상처의 크기를 키우는 일일지도 모른다.
혼란에 빠져 있다.
누군가를 탓하지 않으려는 마음과, 그래도 이해받고 싶은 마음이 뒤섞여 있다.
나는 여전히 내 선택이 옳았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다만 그때의 나로서는, 그것이 최선이었다는 사실만은 받아들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