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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개인의 정의 "미키 17 (Mickey 17)"

우리는 무엇으로 인간이 되고 개인으로서 존재하는가

by CRANKWITHME


영화 “미키 17”은 “봉준호” 감독의 SF 할리우드 영화로 “미키 7”이라는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이 영화는 “미키 반스”라는 한 사람이 우주 식민지를 건축하기 위한 프로젝트에 “익스펜더블”로 참여하면서 겪게 되는 일을 그리고 있다. 여기서 익스펜더블이란 죽음 이후에 다시 프린트되어 살아갈 수 있는 존재로,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위험한 일에 나서면서 그들의 생명을 지키고 안전을 도모하는 아주 중요한 역할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러하지 않았다.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두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먼저 “미키 17과 18은 과연 인간인가?”라는 질문인데, 이 질문에 답한 이후에야 두 번째 질문인 “미키 17과 18은 과연 미키 반스인가?”에 답할 수 있다. 그렇다면 첫 질문부터 살펴보자.

“미키 17과 미키 18은 과연 인간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우리는 그동안 역사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정의되어 왔는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전공 지식이 아니니 큰 틀에서 생각해 보자면 계급 사회에서는 인간을 계급으로 정의 내렸다. 그래서 계급이 충족되지 못하면 그것만으로 핍박받고 고통받았으며 불합리한 삶이 지속되더라도 그걸 보상받을 길이 없었다. 그 이후에는 제국주의 시대가 펼쳐지고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일이 빈번히 일어났다. 그 속에서 인간의 정의는 국가였다. 강대국에서 태어나 식민지배를 자행하던 국가의 국민들은 식민지의 국민들을 이용해 편리한 삶을 살았을뿐더러 그들의 고혈을 짜고 고문을 자행했다. 그렇게 태어난 국가에 따라 죽음을 직면하고 있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기도 하고 그들의 타의적인 희생으로 인해 편하게 살아가기도 했다. 그 이후는 우리나라로 한정 지으면 색깔 혹은 줄로 인간을 정의 내릴 수 있었다. 국가의 방향과 맞는 색깔이면 큰 문제없이 살아갈 수 있고 줄까지 잘 선다면 승승장구할 수 있지만 자신의 소신대로 국가의 방향과 반대로 선다면 가차 없이 공격받았고 정상적인 삶을 이어가기 어려워지기도 했다. 그렇게 21세기에 들어섰다. 지금까지 살펴본 21세기 이전의 역사에서는 인간은 인간으로서 존중받기 위해 무언갈 타고나거나 남과 다름을 증명할 수 있어야 했다. 이 두 가지 방법 다 내가 남보다 월등히 나은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방법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남보다 월등히 나은 존재여야만 인간으로서 존중받고 인간의 권리를 누릴 수 있었다.

그렇다면 21세기는 어떠한가? 이 글을 보며 느꼈을지 모르지만 어느 순간부터 인간은 선택의 폭이 점점 넓어지고 있었다. 21세기는 그 선택의 폭이 절정으로 넓어진 시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21세기는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이다. 우리는 과거와 다르게 선택을 할 수 있다. 선택을 해서 학교를 가고 선택을 해서 직업을 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선택을 할까? 우리가 남들보다 뛰어남을 증명하기 위해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왜 뛰어나야 할까? 과거부터 지금까지 왜 우리는 남들보다 뛰어나야 할까? 그것은 아마 우월함이 안정적이며 누릴 수 있는 삶을 높은 확률로 보장해 주기 때문일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부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부”라는 가치로 인간을 나누고 정의하기 시작했다.

자 그럼 질문으로 다시 돌아와서 미키 17과 미키 18은 과연 인간일까? 그들은 미키 반스라는 모체에서 태어난 생명체로, 뿌리는 이상하지만 엄연히 신체라고 볼 수 있는 것과 기억, 영혼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을 인간이라고 볼 수 있을까? 뭐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이들은 그 우주선 속에서 인간으로 분류되었을까? 그렇지 않았다. 위에 말했듯이 18명의 미키들은 다른 인원들의 우월함을 증명하는 존재였다. 위험한 일을 하며 죽어도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그이기에 미키는 다른 누구보다 생명의 소중함을 존중받지 못했다. 이는 다른 인원들이 미키를 무시하는 이유가 되었다. 내 목숨은 하나이고 내 죽음은 아름답고 소중한데 미키는 그렇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내 우월함은 미키로 인해 보장된다. 이 마인드는 미키를 대하는 태도가 되었고 그를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는 모습들로 나타났다. 이러한 것들로 봤을 때 미키 17과 18은 인간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 말한 것처럼 미키 17과 18은 신체, 기억, 영혼을 가지고 있다. 신체와 영혼은 재생 가능하며 기억은 벽돌 USB에 저장되어 있어 항상 새로운 미키에게 업로드되기 때문에 미키는 인간의 형태는 다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들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미키는 그들과 같이 인간의 기본 조건은 비슷하게 충족하고 있으니 유사 인간정도로 볼 수 있지는 않을까?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한번 다른 걸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유사 인간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역사 속에서 수많은 인간과 유사 인간이 있었고, 유사 인간은 항상 고통받아왔다. 여기서도 미키는 고통받고 있다. 과연 우리는 유사 인간에게 무엇을 제공하고 무엇을 원할 수 있을까? 그건 과연 어디까지 그리고 언제까지 허용될까? 그리고 지금의 우리는 부를 위해 우리가 스스로 유사 인간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모르겠다. 그런데 그것은 알겠다. 이 질문은 항상 반복되어 왔다. 그리고 그 반복의 이유에는 언제 어디서나 유사 인간은 고통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 우리는 이제 확실히 답할 수 있을까? 미키 17과 미키 18은 과연 미키 반스가 맞는 것일까? 먼저 미키 반스는 재생이 되지 않는 인간이다. 기억은 연속적이며 영혼은 분리되지 않는다. 하지만 익스펜더블이 되고 난 이후에는 미키 1부터 18까지 총 19개의 객체를 경험한다. 여기서 경험한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미키의 기억은 어찌 됐건 미키 17까지 연속적이기 때문이다. 총 17개의 객체가 있어 왔고, 반스라는 주체가 있었는데 이들 모두 하나의 연속된 기억을 가진다. 기억을 기준으로 본다면 이들 모두 미키 반스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17과 18은 기억이 나뉜다. 17이 한 일을 18은 모르고 반대로 18이 한 일도 17은 모른다. 그렇다면 이 둘은 같은 미키 반스라고 할 수 있을까?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연속적인 기억은 한 주체에게 정말 중요한 요소이다. 그걸 알기에 “마샬”도 미키의 기억을 지우려고 하는 것이다. 신체와 영혼은 재생 가능하나 기억은 벽돌 USB를 없애면 재생할 수 없으니 미키를 미키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각자의 미키가 성격이 달랐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다. 미키 반스는 한 명의 인간으로 우리 모두가 그러하듯이 수많은 성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수많은 성향은 각각의 미키들로 드러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17과 18이 큰 차이를 보였다고 생각한다. 반스가 가지고 있는 모든 성향을 각각의 미키는 전부 다 가지고 있지 않고 하나씩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미키 1부터 18까지 모든 미키 각각이 미키 반스 그 자체가 될 수 있을까? 그건 아닐 것이다. 모든 미키의 총합이 미키 반스가 될 수는 있지만, 분명히 미키 반스와 다른 미키들 각각에는 차이가 있다.
이 두 요소를 놓고 보자면 미키 17과 18은 미키 반스가 아니다. 영화의 엔딩에서는 결국 미키 17이 반스가 되지만 과거의 반스 그 자체는 아닐 것이다. 이러한 것을 봤을 때 인간의 중요한 요소는 결국 기억이 될 것이고, 개인을 개인으로 만들어 주는 요소에는 성격, 성향이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미키 17은 결국 반스가 될 수 없다. 반스라고 생각하는 것뿐.

이렇게 미키 17을 두 가지 질문으로 살펴봤다. 두 질문으로 통해 인간의 정의와 인간, 개인으로서의 중요한 요소를 생각했다. 물론 미키 17은 이것 말고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정말 많다. 하지만 “기억”이라는 테마와 “인간다움”이라는 테마로 한번 미키 17을 살펴보고 싶었다. 이걸 통해 과연 나는 미래에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나는 무엇으로 내가 되는지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P.S. “죽는 건 어떤 느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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