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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을 향해 진격할 것인가? "설국열차"

열어야 하는 문에 대하여

by CRANKWITHME


직선에는 방향이 없다.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뒤인지 그냥 직선만 놓고 보면 사람은 알 길이 없다. 이건 아마 그 직선에 앞뒤가 필요하지 않아서 그럴 것이다. 그리고 그런 직선이 원이 되면 이젠 시작점이 어디인지도 모른다. 그저 모든 곳이 시작점이고 모든 곳이 끝점일 뿐이다.


설국열차도 그러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지구를 도는 노선에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기차의 앞이나 뒤가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인간의 욕망과 통제가 더해지면서 원 위에 있으면서도 앞 뒤가 중요해졌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이 중요성을 앞에서 즉 머리칸과 엔진에서 역설했다는 것이다. 뒤는 즉 꼬리칸은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며 그럴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기 때문에 머리칸에서 그들을 구제해준 것이라고 역설한다. 그렇기 때문에 타고난 운명에 순응하고 머리칸에 감사하며 그들의 자리를 지킬 것을 종용한다.


그런데 과연 머리칸은 꼬리칸을 챙겨주는 것일까? 그들에게 식량으로 배급되던 단백질 블록은 더러운 곤충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제대로 된 잠자리조차 제공되지 않았다. 심지어 혼란을 일으킨 죄에 대한 처벌은 굉장히 잔인하기도 했으며 5살 미만의 아동을 엔진의 부품처럼 사용하기 위해 끌고 가기도 했다. 그렇다. 머리칸은 꼬리칸에게 지속적으로 자신들이 없으면 꼬리칸은 살아갈 수 없다고 말하지만 그건 머리칸도 비슷했다. 서로가 공생해야 하는 앞 뒤가 중요하지 않은 직선에서 누군가는 앞 뒤에 중요성을 부여했고 이를 사람들에게 믿게 했으며 이를 통해 한 사회를 구축했다. 그러고는 지금 위치에 만족하라고 말한다. 너희들에게는 이 사회만이 유일한 길이며 이 자리만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들은 17년간 그 말을 믿으며 그 기차의 머리칸이 되기 위해 노력을 해왔다.


여기서 “봉준호” 감독은 이 문제의 답을 “송강호” 배우의 입을 빌려 말한다. 너무 오랫동안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아서 벽처럼 느껴지는 저 문을 열고 싶다고. 이게 이 영화의 핵심이었다. 한 사회에서 한가지 길의 경쟁에 열을 올리다 보면 다른 길을 보지 못하는데 오히려 해답은 다른 길에 있다. 엔진을 차지하고 또 머리칸과 끊임없이 싸우고 다시 꼬리칸이 생기는 악순환의 길보다는 가면 안된다고 교육받은 곳의 문을 열어 사회의 크기를 키우는 길이 더 많은 사람을 살리며 더 많은 길을 만들어 낼 것이라는 말이다.


이게 우리의 현재에도 큰 의미를 준다. 모두가 다 같이 몰두하고 이게 아니면 인생에서 뒤쳐진다고 말하는 어떤 길을 우리는 똑똑히 바라봐야 한다. 실제로 그런 위험이 있어서 남들과 맞춰 가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기우에 불과한 말인지 우리는 날카롭게 바라보고 제대로 판단해야 한다. 남들이 다 뛰기 때문에 뛰는 사람이 많고, 허상일 뿐인 위험이 많기에 우리는 좀 더 신경을 써서 들여다보고 그 길에 냉정한 평가를 내리고 또 다른 문을 열 필요가 있다.


물론 그 여파로 영화에서는 한 사회가 멸망에 이르렀지만 이건 굉장히 큰 문을 열었을 때의 결과이고 현실에서는 정말 많은 작은 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 문을 발견했을 때 우리가 나아가야할 직선이라고 생각했던 사회는 수많은 가지를 가진 나무로 변할 것이고, 사회적인 소모로 이어지던 무의미한 경쟁이 나무를 풍성하게 만드는 물과 흙으로 변해 이 사회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놓쳐오던 내가 좋아하는 무언가 혹은 다른 중요한 것을 만나게 될 것이고 이를 통해 건강한 하나의 국가를 구성하게 될 것이다.


P.S. “이게 이제 무슨 벽처럼 생각하게 됐는데, 사실은 조또 문이란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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