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걸까 깨어난 걸까?
영화 “조커”는 개봉 당시와 2020년, 그리고 “조커: 폴리아 되” 개봉을 앞두고 재개봉했을 당시, 이렇게 총 3번 보게 됐는데 그러다 보니 확실히 이전에는 놓쳤던 부분들을 확인하며 좀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먼저 고담시에는 길거리에 쓰레기가 넘쳐났다. 파업의 여파로 쓰레기를 수거해갈 사람이 없던 것인데, “깨진 유리창 이론”을 증명하듯 고담시는 사소한 범죄와 부도덕이 판을 치고 있었다.
실제로 영화는 성실히 일하고 있던 “아서 플렉”이 폭행을 당하며 시작한다. 그리고 그런 플랙의 주변에는 그를 존중하지 않고 무례한 태도를 일삼는 사람이 너무나도 많았고, 플렉은 그 안에서 심리 치료를 받으며 자신의 병든 곳을 고치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도 또 한 가지 놓쳤던 부분이 있었다. 시의 지원이 끊기자 플렉은 심리 치료를 더 이상 받지 못한다. 그러면서 더 많은 약의 처방을 요구하지만 현재도 너무 많은 약을 처방받았다며 거절당한다. 실제로 약을 너무 많이 처방했을 수 있지만 플렉의 현재 상태와 환경이 급격하게 더 악화되는 것을 봤을 때, “더 많은 약을 처방했어야 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과거에 조커를 보며 느낀 감상과 현재 새롭게 깨달은 점이 합쳐졌고, 영화 속에 생각보다 더 많은 메타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자 이 영화에 대한 평은 단순히 아서 플렉과 조커 개인에 관련된 평에서 어떤 사회와 사회 구성층에 대한 이야기로 확대됐다. 5년 전의 리뷰에서는 아서 플렉은 악을 타고났다고 썼지만, 영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장면은 아서 플렉이 태어난 이후부터 꾸준히 축적된 악이 터져 나오는 시간이었다.
거기에 “토드 필립스” 감독은 한 가지를 더 숨겨놓은 것 같다. 아서 플렉은 일반 대중이나 임금이 비교적 낮은 사회 구성층을 의미한다. 이들은 모두 악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다. 물론 이들만 그런 것은 아니다. 이 영화 속에서는 “머레이”나 “토마스 웨인”, 복지를 줄이는 고위직들과 같은 아서 플렉과 반대를 형성하는 사회 구성층도 악하게 표현된다. 이들은 파업으로 인해 쓰레기가 길거리에 넘쳐날 때 결국 제일 늦게 피해를 보는데, 그래서 협상을 질질 끌어도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리고 지하철에서 가만히 있던 이주민을 상대로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했던 것도 임금이 높은 금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다.
이처럼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은 악이 조금씩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면서 그 악이 서로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사회 시스템과 복지가 있으며 여기에 다들 동참해야 사회가 유지된다는 것을 반대의 사례로 보여준다. 위에서 말했듯 고담시는 공공시설의 청결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신 상담과 같은 복지가 줄어들기 시작했으며, 그 안에서 상황이 악화되는 사람들을 토마스 웨인이나 다른 사람들은 개인의 책임으로 몰기도 했다.
이런 과정 속에 악을 참아가며 사회를 구성하던 구성층 중 일부가 더 이상의 인내를 포기했고, 그 중심에는 조커가 있었다. 이를 어떻게든 잡아보려던 경찰은 그들의 희생양이 되었고, 아서 플렉은 죄책감이 느끼지 못하면서 자신에게 무례했던 사람들을 처벌했다. 그리고 고담시는 사회 시스템이 무너진 채 영화는 끝이 났다. 토드 필립스 감독은 이러한 반대 사례를 통해 기본적인 인프라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 같다. 사람은 애초에 선하지 않고 그들이 놓이는 환경에서도 꾸준히 악이 축적되기 때문에 사회 유지를 이들의 본성과 본능에 맡길 수 없고, 그 본성을 억누를 여러 가지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는 것 같다.
P.S. “불편하게 만들 생각은 없는데 왜 다들 이렇게 무례하죠?”, “최소한의 예의는 보이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