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관음을 통해 보는 악의 평범성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설계한 “루돌프 회스”와 그의 가족들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다른 홀로코스트 영화와 같이 어떤 인물이 느끼는 극한의 감정을 스크린에 담거나 그 시대의 이야기를 보여주면서 긴장감을 유발하지 않는다. 2차 세계대전의 홀로코스트를 생각하면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이와 관련된 인간들의 잔혹성을 쉽게 떠올릴 수 있는데, 이 영화는 이를 이용하거나 메인 스토리로 삼지 않았다.
다만 10대 가까이의 카메라를 일정한 장소에 고정시켜 루돌프 회스 가족의 모습을 관찰자적인 입장에서 보여줄 뿐이다. 감독은 수용소를 설계한 루돌프 회스가 수용소 옆 자신의 저택에서 살면서 누리는 안락한 삶을 우리에게 관찰시켜준다. 이런 관찰을 통해 우리는 겉보기에 능력 있고 가정적인 남편이자 아버지인 루돌프 회스와 그런 가장을 잘 따르는 평화롭고 화목한 가족 사이에 스며들어있는 악을 확인할 수 있다.
카메라는 루돌프 회스의 집을 메인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그 뒤의 배경에는 굴뚝이 언제나 까만 먹구름을 내뿜고 있고 그들이 정성들여 가꾼 꽃에는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가득하다. 그런데 이 집에 사는 사람이나 방문하는 사람은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산드라 휠러의 어머니만 빼고) 남편의 전출 소식에도 자신이 가꾼 집을 잃지 않으려 하는 산드라 휠러와 조국에 큰 공을 세워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남편, 그런 집에서 파티를 하고 행복한 순간을 보내는 아이들과 여러 손님들 모두 그 뒤의 배경을 신경 쓰지 않는다. 애써 모른 척하는 것도 아니다. 수용소에 수감된 그들은 인간이 아닌 것처럼 인식하고 그 인식에 죄책감이나 두려움, 아이들 정서에 대한 걱정은 기대할 수 없다. 나라가 나서서 하고 높은 사람들이 주도하는 일이다 보니 악에 대한 기준이나 인지 능력은 사라지고 그러한 행동이 자연스러워지는 악의 평범성을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은 관찰자적인 시각에서 이렇게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시각은 비록 재미를 보장하진 않는다. 하지만 루돌프 회스를 위시한 나치에 대한 혐오감이나 피해자에 대한 동정심을 넘어서 나도 이들과 같아질 수 있다는 경각심을 준다. 단순히 나치와 유대인의 이야기가 아니고 전 인류에 대한 이야기이자 경고를 관찰자로 전달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시각은 이 영화에 있어 탁월한 선택이었고 이를 효과적으로 활용한 감독의 연출 능력이 놀라울 뿐이다. 특히 잔인한 장면 없이 잔인함을 표현하는 연출은 가히 최고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영화가 끝난 이후에 여느 홀로코스트 영화와 같이 먹먹함 혹은 안도감은 없지만 두려움이 기억에 남는다. 나치가 그래왔고 일본인이 그러했으며 미국인 또한 다르지 않았고 최근의 유대인도 그러하니 나 또한 그럴 수 있다는 경고가 효과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은 영화를 통해 인간성을 상실한 사람들 이외에도 피해자를 위해 사과를 숨겨두는 사람도 있음을 보여주며 희망 또한 놓치지 않는다. 단순히 국적과 인종, 성별을 벗어나 인간이라는 모습을 통해서 두려움과 희망 모두를 주는 것인데, 이를 통해 존 오브 인터레스트라는 영화가 완성되었다고 생각한다.
P.S. “우리 모두의 이름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