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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리나 333

열한 번째 여자, 첫 이야기 <한정>

by 아리미 이정환

LA 출장 이튿날 저녁, 스티브 김과 뒤풀이로 간 술집에서 내 파트너였던 정아를 만났다.
맞다. 정아는 그 술집의 웨이트리스였다.

재밌게 시간을 보내고 숙소로 향하는데, 정아가 슬쩍 내 주머니에 쪽지를 넣어준다.
집 주소와 전화번호. 카탈리나 333번지.

다음 날 비즈니스 일정을 일찍 마치고, 숙소인 가든스윗으로 돌아와 호기심에 전화를 걸었다.
정아는 왜 이제야 전화하냐며 장난을 섞어 투정을 부렸다.

“오늘 일 안 나가도 되면 여기로 올래?”
그러겠단다.

그때가 김득구를 모티브로 한 영화 **‘챔피언’**을 찍고 있을 때였다.
가든스윗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자, 마침 촬영을 마친 챔피언 팀이 복귀 중이었다.
아는 얼굴이 잔뜩 보여서, 우린 마치 숨듯이 택시를 잡아 한인 식당으로 이동했다.

정아와 소주를 한참 맛있게 마시는데, 챔피언 일행이 또 들어왔다.
우린 다시 자리를 옮겼다.
2차로 간 식당에서 술이 얼큰히 올랐다.

이어서 간 노래방은 서울의 웬만한 텐프로보다 분위기가 좋았다.
기분이 한껏 올라 조니워커 블루까지 주문했다.
몇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데, 정아가 갑자기 안기더니 키스를 퍼붓는다.

그 순간 서울에서 같이 온 친구놈이 가든스윗 방에 있을 게 떠올랐다.
나는 정아에게 말했다.
“카탈리나 333, 너희 집으로 가자.”
그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시다 남은 블루를 챙겨 택시를 타고 정아의 집으로 갔다.
거실에서 몇 잔 더 마시다 그대로 잠든 것 같다.

속이 쓰려 눈을 떠보니, 속옷만 입은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내가 무거웠을 텐데, 정아가 어떻게든 끌어다가 침대에 눕히고
자신은 거실 소파에서 자고 있었다.

거실로 나가 보니, 소파 끝에 웅크린 채 곤히 잠들어 있는 정아가 보였다.
소파에서 자고 있는 정아의 몸을 안아 들어 올리니,
따뜻한 체온과 가벼운 숨결이 목덜미에 스친다.
침대에 눕히며 “내가 거실에서 잘게. 네가 편히 자”라고 하자
정아가 내 팔을 붙잡는다.
그대로 또다시 침대로 빨려 들어갔다.

아침에 죽을 끓여주겠다며 그녀가 일어났다.
속을 달래며 죽을 먹는 동안,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업소에서 사기를 당해 큰 빚을 지고 도망치듯 캐나다로 갔다가
그 길로 미국 국경을 넘었다는 삶의 파편들.

그녀는 그 모든 걸 담담하게 말했다.
그 작은 부엌의 김이 오르는 죽 냄새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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