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전국 시대(4)
완벽(完璧) : 춘추 시대 초나라의 변화(卞和)라는 사람이 산에서 우연히 원석 형태의 옥을 발견하고는 귀한 보물이라 여겨 초 여왕(厲王)에게 바쳤다. 그러나 초 여왕이 아랫사람을 시켜 감정해보니 옥이 아닌 보통의 돌에 불과하다는 결론이 나자 진노한 초 여왕은 변화의 왼쪽 다리를 자르게 했다. 변화는 초 여왕의 사후 즉위한 초 무왕에게 이 옥을 다시 바쳤으나 역시 쓸모 없는 돌이라는 판정이 나자 이번에는 오른쪽 다리를 잘렸다. 초 무왕이 세상을 떠나고 초 문왕이 즉위한 후 변화는 옥을 바치려 했지만 걸을 수 없는 몸이어서 옥을 안고 사흘 밤낮을 슬피 울다가 마침내 피눈물을 흘릴 지경에 이르렀다. 소식을 들은 초 문왕이 변화를 불러 다리를 자르는 형벌을 당한 사람이 혼자만이 아닐 터인데 왜 그렇게 슬퍼하느냐고 물었다. 변화는 다리 잘린 게 서러운 게 아니라 천하의 보물과 자신의 충심을 몰라주는 게 억울해서 우는 것이라 답하였다. 변화의 절절한 대답에 마음이 움직인 초 문왕이 세공사에게 옥을 주어 다듬게 했더니 과연 천하에 둘도 없는 옥벽(玉璧)의 참모습이 드러났다. 이 보물을 변화가 발견한 옥벽이라 하여 세상에서는 ‘화씨벽(和氏璧)’이라 불렀다. 전국 시대 들어 조나라 혜문왕이 이 화씨벽을 손에 넣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이를 탐낸 진나라 소양왕은 혜문왕에게 진나라의 15개 성과 화씨벽을 교환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소양왕의 제안을 받은 조나라 조정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화씨벽을 주자니 진나라에서 땅을 줄지 말지 알 수 없었고 주지 말자니 강대국 진나라가 이를 핑계로 조나라에 쳐들어올 것이 걱정되었던 것이다. 혜문왕은 신하들과 의논 끝에 소양왕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진나라에 사신을 파견하기로 하였다. 문제는 호랑이 굴이나 다름없는 진나라에 누굴 보낼지 하는 것이었다. 이 때 혜문왕의 신하 중 한 사람이 본인의 가신 중 인상여라는 사람이 능히 그 일을 해낼 만한 능력이 있다고 추천하였다. 혜문왕의 부름을 받은 인상여는 만약 약속대로 진나라에서 성을 넘기지 않는다면 화씨벽을 온전히 조나라로 가지고 돌아올 것(完璧歸趙)이라 다짐하였다. 혜문왕의 특사 자격으로 진나라로 간 인상여는 소양왕을 만나 화씨벽을 바쳤다. 그러나 인상여는 첫 대면에서 소양왕이 화씨벽만 빼앗고 성을 넘기지는 않을 것임을 알아차렸다. 인상여는 소양왕에게 “그 옥벽에는 작은 흠집(옥에 있는 흠집을 한자로는 하자(瑕疵)라고 하는데 오늘 날에는 흠이나 결함을 나타내는 법률 용어로 주로 쓰인다.)이 있습니다. 주시면 제가 알려 드리겠습니다.”라고 하여 화씨벽을 다시 받아냈다. 인상여는 화씨벽을 받자 마자 소양왕의 신의 없음을 나무라며 약속을 지키지 않을 시에는 화씨벽을 부숴버리고 자신도 자결하겠노라고 결연하게 외쳤다. 인상여의 돌변한 태도에 놀란 소양왕은 결국 화씨벽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화씨벽을 무사히 가지고 조나라로 돌아온 인상여에게 혜문왕은 상대부(上大夫)라는 벼슬을 내렸다. 결함이 없는 옥벽을 가지고 조나라로 돌아온다는 뜻의 완벽귀조라는 고사에서 유래한 완벽이라는 말이 오늘날에는 완전무결함을 의미하게 되었다.
문경지교(刎頸之交) : 기원전 279년, 조나라의 인상여는 혜문왕을 수행하여 민지라는 곳에서 열린 진나라 소양왕과의 회담에 참석하게 되었다. 연회가 이어지는 도중에 소양왕은 혜문왕에게 비파를 연주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강대국인 진나라의 위세에 눌린 혜문왕이 마지못해 비파를 연주하자 소양왕은 자리에 있던 사관에게 조왕(趙王)이 진왕(秦王)을 위하여 비파를 연주했다고 기록하게 하였다. 이를 본 인상여가 소양왕에게 다가가 소양왕의 북치는 솜씨를 보여 달라 하였다. 소양왕이 코웃음을 치며 거절하자 인상여는 칼을 들고 소양왕을 협박하다시피 하여 북을 치게 한 뒤 사관에게 진왕이 조왕을 위하여 북을 쳤다고 기록하게 하였다. 인상여 덕분에 수모를 면하고 회담에서 돌아온 혜문왕은 인상여의 벼슬을 최고위직인 상국(相國)으로 높였다. 조나라의 백전노장 염파는 인상여에 대한 혜문왕의 파격적인 인사에 불만을 품었다. 나라를 위해 전장에서 목숨 걸고 싸웠던 자신보다 세치 혀를 놀려 출세한 인상여의 벼슬이 더 높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며 인상여를 만나면 욕을 보이고 말리라 다짐하였다. 이를 전해 들은 인상여가 의식적으로 염파를 피해 다니자 염파는 더욱 기고만장해졌다. 인상여의 측근들이 인상여에게 염파를 두려워하는 듯한 인상여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인상여는 측근들에게 염파와 진왕 중 누가 더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냐고 물었다. 측근들의 대답은 당연히 진왕이라는 것이었다. 대답을 들은 인상여는 자신은 그 진왕을 대할 때조차 일말의 두려움도 없었는데 하물며 염파를 두려워할 리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인상여가 말하기를 자신과 염파는 조나라를 떠 받치는 주석(柱石)과 같은 존재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자신과 염파의 갈등은 진나라에 이로울 뿐이기 때문에 염파를 피하는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염파는 크게 부끄러워하면서 상의를 벗은 채 가시나무를 짊어지고 인상여를 찾아와 가시나무로 자신을 때려 달라며 벌을 청하였다. 서로의 의기에 탄복한 두 사람은 이후 의형제의 교분을 맺었다. 사마천은 사기의 열전 중 염파와 인상여 편에서 두 사람의 교분을 가리켜 서로를 위해서라면 목이라도 내어 줄 수 있는 사귐(刎頸之交)이라며 높이 샀다. 친구를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내놓을 수 있는 경지에 다다른 우정이 문경지교인데 돈이나 사회적 지위를 친구보다 우선시하는 오늘날의 세태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하겠다.
모수자천(毛遂自薦)/낭중지추(囊中之錐) : 춘추 시대의 패자 중 하나인 진(晉)나라는 전국 시대 들어 가신들에 의해 삼진(三晉), 즉, 한, 위, 조 등 세나라로 분할되었는데 이 중 조나라는 군사력 면에서 진(秦)나라에 맞설 만한 강국으로 성장하였다. 특히 위치상 중원을 장악하고 있어 진나라로서는 천하통일을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진나라 소양왕은 56년간 재위하면서 통일 진제국의 기반을 닦은 인물로 기원전 262년에는 명장 백기를 앞세워 조나라와 장평대전이라는 전국 시대 최대 규모의 전투를 벌였다. 조나라에도 백기 못지않은 명장 염파가 있었으나, 진나라의 이간계로 조나라 효성왕이 염파를 젊은 장군으로 교체하면서 전투는 조나라의 참패로 끝났다. 승리에 고무된 소양왕은 조나라의 수도인 한단마저 공략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대군을 동원해 한단을 포위하였다. 전국사군의 한사람인 조나라 평원군은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하기 위하여 또 다른 강국인 초나라로 가 지원을 요청하기로 하였다. 평원군은 자신의 빈객 중 초나라로 갈 수행원으로 문무를 겸비한 인물 20명을 선발하려 했으나, 본인의 선발기준에 부합하는 인물은 딱 19명에 그쳤다. 평원군이 수많은 빈객 중 조건에 맞는 인물이 20명도 안된다며 안타까워하고 있을 때 모수라는 빈객이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나섰다(毛遂自薦). 모수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던 평원군은 모수에게 자신의 빈객으로 있은 지 얼마나 되었냐고 물었다. 모수는 3년이 다 되었다고 답하였다. 평원군은 모름지기 뛰어난 인물이란 자루 속의 송곳(囊中之錐)과 같아서 송곳이 자루를 뚫고 나오듯 두각을 나타내기 마련이라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평원군의 말은 자신의 빈객으로 있으면서 3년이 지나도록 자신의 눈에 띄지 않았다면 모수의 인물됨이 그저 그런 수준 일거라는 얘기였다. 그러자 모수는 자신은 자루 속에 넣지도 않은 송곳이라며 만약 자루 속에 넣었다면 송곳의 끝 부분만이 아니라 손잡이 부분까지 튀어나왔을 것이라고 받아 넘겼다. 밑져야 본전이라 생각한 평원군은 결국 모수를 수행원의 일원으로 선발해 이들과 함께 초나라로 향하였다. 초나라 고열왕을 만난 평원군이 반나절 동안 조나라와의 연합을 설득했으나, 고열왕은 강대국인 진나라를 적으로 돌리는 데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선뜻 제안에 응하지 않았다. 이를 지켜보던 모수가 두 사람의 협상 중간에 나서 진나라에 대한 굴종이 초나라의 수치임을 논리정연하게 지적하자 고열왕도 조나라와의 연합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고사에서 재주 있는 사람은 결국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는 낭중지추라는 말과 함께 스스로를 적임자로 추천한다는 의미의 모수자천이라는 고사성어가 유래하였다.
일자천금(一字千金) : 오랜 전란을 마무리하고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의 아버지 자초는 진나라 왕족이기는 했지만 서자(庶子) 출신으로 젊은 시절에는 진나라의 적국인 조나라에 볼모로 가 있는 처량한 신세였다. 한나라 출신의 거상 여불위는 재화의 가치를 한 눈에 알아보는 안목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여불위가 장사를 위해 각 나라를 돌아다니던 중 조나라 수도 한단에서 볼모로 와 있던 자초를 만나게 되었다. 자초를 본 여불위는 자초에게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음을 간파했다. 자초를 위해 본인의 전재산을 쏟아 부은 여불위는 우여곡절 끝에 진 왕실의 별볼일 없는 서자에 불과하던 자초를 태자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기원전 249년, 자초가 진의 장양왕으로 즉위하자 여불위 역시 일개 장사꾼에서 강대국 진나라를 호령하는 승상의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장양왕이 재위 3년만에 사망하면서 자초의 아들 정이 1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후일의 진시황이다. 진시황이 어린 탓에 실권은 승상인 여불위가 휘둘렀으며 어린 왕을 보필한다는 명목으로 본인의 지위도 승상을 능가하는 상국(相國)으로 높였다. 진시황 8년인 기원전 239년, 욱일승천의 기세에 있던 여불위는 맹상군보다 더 많은 수의 식객과 학자들을 전국 각지에서 불러모아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을 집대성한 백과사전 ‘여씨춘추(呂氏春秋)’를 편찬하게 했다. 여불위는 여씨춘추의 완성 후 이를 기록한 목간이나 죽간(종이가 없던 시절이므로 나무껍질(木簡)이나 대나무(竹簡) 등을 이용하여 책을 만들었다.)과 함께 천금의 돈을 수도 함양의 번화가에 늘어놓고 이 책에서 한 자라도 더하거나 뺄 수 있는 자에게는 이 돈을 주겠노라(增損一字者, 予千金)며 호기를 부렸다. 완성도 높은 명문을 가리키는 말인 일자천금의 유래이다.
절치부심(切齒腐心) : 기원전 230년, 바로 이웃한 한나라를 멸망시킨 진나라는 그야말로 파죽의 기세로 남은 여섯 나라에 대한 정복전쟁을 이어 나갔다. 진시황이 정(政)이라 불리던 어린 시절 아버지 자초와 함께 조나라의 볼모 신세였을 때 육국 중 상대적으로 소국이었던 연나라의 태자 단(丹)도 조나라에 볼모로 와 있었다. 비슷한 또래였던 둘은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었다. 태자 단은 진시황이 장양왕에 이어 진왕으로 등극한 후 또다시 진나라에 볼모로 가게 되었는데 진왕 정이 옛 친구인 자신을 푸대접하자 한을 품고 연나라로 탈출했다. 기원전 228년, 강국인 조나라의 수도 한단까지 진나라에 함락당하자 힘으로 진나라를 상대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깨달은 태자 단은 진시황 암살 계획을 세웠다. 자객으로 보낼 인물을 물색하던 태자 단에게 누군가가 형가라는 협객을 추천하였다. 어렵사리 태자 단의 요청을 수락한 형가는 암살을 위해 진시황에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두가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 중 하나는 연나라의 전략적 요충지인 독항이라는 지역의 지도이며 나머지 하나는 진시황에게 죄를 짓고 연나라로 망명 와있던 진나라 장군 번어기의 목이었다. 태자 단은 독항의 지도만이라면 문제없지만 번어기는 자신을 믿고 몸을 의탁하였는데 차마 죽일 수는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형가는 직접 번어기를 찾아가 진시황 암살을 위한 자신의 계책을 말하고 번어기의 목숨을 청했다. 진시황에 의해 일가족이 몰살당한 번어기는 형가의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탄식했다. 번어기는 진시황을 죽이는 것이야 말로 자신이 이를 갈면서 애태운 것(切齒腐心)이라는 말과 함께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 형가는 ‘상절(霜切)’이라는 맹독을 바른 비수를 독항의 지도에 말아서 숨긴 채 번어기의 목과 함께 진시황을 만날 수 있었으나, 암살 계획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연나라는 태자 단을 죽여 진시황의 용서를 구하려 했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기원전 222년, 요동 땅까지 쫓긴 연왕이 진나라군에 사로 잡히면서 연나라는 멸망했다. 절치부심의 의미는 앞에서 살펴본 와신상담과 마찬가지로 본인이 뜻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붓는 마음가짐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