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어떤 분이 진료 후에 아들이 혈압이 140이 넘는 다고,
경험이 많던 나는 요새 아들 스트레스가 뭐냐고 물었다.
학원 가기를 너무 싫어한다고, 중3인데 너무 안 한다고.
그래서 내가 그랬다.
그렇게 억지로 학원 가서 아들이 열심히 공부할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꾸면 안되요. 거기서 뭘 배워서 자기 거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은 꿈도 꾸지 마세요
공부시키려다가 아이 고혈압 환자 만들 뻔 한 것이다. 나는 일단 거기 관두고 인터넷 강의를 듣거나
냅두거나 엄마랑 사이가 좋으니 일단 그 관계만 유지하라고 했다.
그러면 원래 착한 그 아들은 ( 8년 넘게 진료한 아이다) 엄마 얼굴을 봐서라도 마음에서 우러나온 그 뭔가를 하게 된다. 공부는 어차피 하게 되 있다. 하고 싶은 일이 생기는 순간부터 하는 것이 공부니까.
뒤에 환자가 이미 20명이다. 더 길게 얘기할 순 없다
엄마는 머리를 한 대 얻어 맞은 표정으로 가셨다.
공부를 아이가 스스로 했으면 좋겠지 않은가.
공부를 좋게 느껴야 공부를 알아서 하는 것이다.
공부든 뭐든 그 행동의 질은 그것을 어떻게 느끼느냐가 반드시 결정하는데.
또 어떻게 느끼느냐는 어떻게 해석하느냐로 결정된다.
지금 안되어도 하다보면 익숙해진다는 해석은 희망적인 느낌이 들게 하고 그래서 더 노력하고 행동하게
만든다.
나는 해도 안 된다. 원래 수학 머리는 없다는 해석은 해도 안 될 것 같이
느끼게 하고 포기 하게 만든다.
행동하지 않게 한다.
그런데 이 “우리 애는 안된다. 원래 수학 머리 없다”는 말은 누가 한 말일까.
공부를 포함한 세상에 대한 해석은 만 12세 전까지 주입된 말들과 경험이다.
실제로 12세 이전 아이들의 뇌파는 상대의 말에 최면이 잘 되는 뇌파이다.
그리고 그 이후의 뇌파는 최면된 대로 굳어진 채로 살게 한다
지금 공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공부로 어떻게 세뇌되고 있냐가 핵심이다.
공부 또한
너는 연습하다보면 결국 해내는 사람이라고
세뇌시키는 수단일 뿐인 것이다.
공부를, 학원을 갈 때마다 나는 더 부족해 보이고 쓸모 없는 사람같이 느껴진다면
공부를 절대 열심히, 잘,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초2 때 내 아들에게 수학교과서 2바닥씩
매일 같은 부분을 다 맞을 때까지
5일 동안 풀게 훈련시켰었다.
너는 결국 익숙해지면 하는 아이라는 말을 반복해 주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아들은 미친 듯이 성실한 사춘기 남자 사람이
되어 있다.
아들은 계속 하다 보면 자기는 된다는
말을 끝도 없이 들어왔기 때문에.
그렇게 세뇌되어 왔기 때문에.
그래서 아들에게는 지금 안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다.
익숙해지면 하게 된다고 혼잣말한다.
그래서 매일 같은 일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내 아들의 성실함이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