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양이 물드는 골목 사이사이로의 탐험
로마에서 고속도로를 달려 아씨시로 향했다. 아씨시는 프란체스코 성인을 모시는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가 시작된 곳으로, 이번 여행에서 엄마가 꼭 가보고 싶으셨던 곳이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엄마는 한국에서 프란치스코회 활동을 오랜 기간 해 오셨고, 그 프란치스코회가 시작된 아씨시라는 도시를 꼭 가보고 싶어 하셨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가난과 근검절약을 평생의 신념으로 삼고 복음을 따라 살아가고자 했던 성인으로, 아씨시에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기리기 위한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이 자리잡고 있다.
지도로만 접했던 아씨시는 생각보다 높은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아씨시 역 근처의 농가민박에 짐을 풀고 서둘러 아씨시 언덕으로 향했다. 농가민박은 지난 번 토스카나 여행 이후, 토스카나에 방문한다면 꼭 선택하는 옵션이다. 아름다운 농장 한가운데서 있는 곳에서 잠을 자고, 다음날 아침 신선한 토스카나 음식들로 가득한 아침식사를 먹을 수 있다. 이번 농가민박은 커다란 수영장과 로즈마리, 그리고 라벤더가 가득한 아름다운 정원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었다.
차를 달려 아씨시 언덕위로 올라가 구시가지 입구의 공영주차장에 주차해 놓고, 일단 성 프란치스코 성당까지 달려가 보기로 했다. 혹시 미사 시간에 맞출 수 있을까 해서였다. 너무 멀리 주차했던 탓에 지도를 보며 가는 길이 어렵기만 했다. 오후 4시경이 되니 해는 어느덧 오렌지빛으로 물들기 시작하고, 오래된 골목의 구석구석은 황금빛으로 빛났다. 하나의 코너를 돌아 나갈 때마다 감탄이 이어졌다. 마음은 빨리 대성당에 가야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골목골목의 아름다움에 계속 발길을 멈추게 되었다. 아씨시의 골목들에는 오랜 중세 시대의 시간이 한겹 한겹 쌓여 벽이 되어 있었다. 단단하게 올려져 쌓인 돌벽은 그 자체로 묵직한 시간이 뭉쳐진 듯, 아름답게 다가왔다. 오래된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집집마다 창문 밖으로 꽃을 걸어 놓아 찾아오는 사람들을 반긴다. 낮은 지붕, 아치로 된 언덕 위의 다리, 지칠 만 하면 나타나는 자그마한 벤치들. 사람이 드물게 보이는 저녁 무렵의 중세도시는 조용히 그 아기자기함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환대해 주었다. 작은 골목 어귀들에는 그 골목에만 다닐 수 있을 법한 조그마한 이탈리아식 스쿠터가 경차들이 세워져 있었다. 중세 건축물과 현대문명의 조화가 묘하게 귀여웠다.
굽이굽이 골목을 돌아 언덕 끝까지 돌아나왔을 때,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며 너른 들판이 나타났다. 성프란치스코 성당. 눈이 시리도록 푸르른 잔디밭 앞에 웅장한 모습으로 모습을 나타낸 성당은 푸르른 들판에서 밝게 빛나고 있었다. 햇살을 뒷편에서 받으니 후광이 비치고 있는 것만 같다. 때마침 저녁 6시가 되어 삼종기도의 종소리가 널리 퍼졌다. 토스카나의 너른 들판을 배경으로 홀로 하늘을 등지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곳에서, 프란치스코 성인은 가난한 수도승의 삶을 몸소 살면서 복음을 전파했겠지. 이곳을 바라보고 있자니 지금이 1200년대의 중세시대인지, 2000년대의 현대인지 구분이 아득해진다. 눈앞에 나타난 성당의 모습은 중세시대에서 그대로 박제되어 있다. 나는 8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그대로 시간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성당 아래로 보이는 로제 광장은 아름답게 늘어선 아치의 열주와 줄무늬 문양의 바닥으로 그 웅장함을 더한다. 시선을 돌리기만 해도 아름다운 풍광이 넘쳐난다. 성당 뒷편으로 펼쳐진 토스카나의 푸른 들판과 이따금씩 보이는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이곳이 이탈리아의 한복판임을 더욱 실감하게 한다.
서둘러 성당 안으로 들어가보니 마침 6시 저녁 미사가 시작하고 있었다. 수도자들과 수녀님들이 저녁 기도를 드리려 속속 모여든다. 조용한 가운데 오르간 소리가 울려퍼지고, 낮은 목소리의 그레고리안 성가가 나직히 불려진다. 미사는 이탈리아어로 진행되었지만, 전세계 동일한 형식의 양식이라 속으로 조용히 나만의 기도문을 외우며 따라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활동한, 성인의 유해가 묻혀있는 이곳에서 수도자들과 함께 미사에 참여할 수 있다니 새삼 뭉클한 기분이 들었다. 1228년에 이 성당이 건축되었다고 하니, 근 80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이곳에서는 미사가 진행되었을 것이다. 시간을 넘어 계속 같은 형식의 기도를 반복해 나가는 사람들과 그 모든 역사를 품고있는 건물. 그렇게 거듭되는 층위들이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분위기가 나를 압도했다. 저 천장에 달린 작은 조각 하나도 허투루 보이지 않았다. 계속 같은 내용을 반복해 나가며 전통을 지키고 또 만들어 나가는 사람들도.
미사가 끝나고 밖으로 나오니 해가 더욱 기울었다.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가 더욱 선명하게 다가온다. 저녁 시간이 다가오자 거리에는 사람들이 더욱 드문드문 보이고 작은 중세의 도시에는 점점 소멸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게들은 모두 문을 닫았고, 좁은 거리에는 아무도 걸어다니지 않는다. 다들 집으로 돌아간 걸까. 이 도시에는 사람들이 살기는 하는 걸까. 관광객 외에는 누가 이 도시의 저녁과 밤을 지키는 것일까. 대도시의 불빛과 저녁 늦게까지 소란스러운 음식점과 술집에 익숙해져 있는 "도시인" 인 나에게는 더욱 생소하게 느껴지는 거리의 풍경이다. 마치 소멸의 신이 거리를 휩쓸고 나간 마을인 듯 사람은 아무도 없다. 동네를 걸어다니는 강아지나 고양이만 이따금씩 마주친다.
어두워지자 더더욱 거리에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아, 서둘러 세워둔 차로 돌아와 숙소로 향했다. 어쩐지 타임머신을 타고 중세로 잠시 다녀온 것만 같았다. 마주쳤던 사람들이라곤, 성당안에서 만난 수도원 분들과 수녀님 분들뿐이라서였을까. 저녁 시간의 아씨시 골목 탐험이란, 8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중세 시대로 여행을 다녀오는 특별한 순간의 연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