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 편
역사적으로 우리나라만큼 굴곡진 역사도 없을 것이다. 성경에는 당시 사회적 필요악이나 연약함을 드러내는 장치로 창녀가 등장한다. 함석헌은 상처로 만신창이가 된 우리나라를 성경에 나오는 창녀에 비유했다. 가장 낮은 곳 골짜기까지 굴러 떨어진 역사. 하지만 그 고통과 낮음은 온 세상을 품을 수 있는 넓은 품을 가지고 있다.
노자《도덕경》에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이 있다. ‘지극한 선은 물과 같다’라는 말이다.
“최고의 선(善)은 물과 같나니,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해주면서도 다투지 않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머문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땅처럼 낮은 곳에 거하고 마음은 연못처럼 고요하며, 같이 어울릴 때에는 아주 인자하고, 말에는 신의가 있고 발라서 잘 다스려지고, 일에는 매우 능란하고 움직임이 때를 잘 맞춘다. 오직 다투지 않으므로 허물이 없다.”
왕필 저, 임채우 옮김, 《왕필의 노자주》, 한길사, 2008.
대개 저는 일생을 남을 위하여 산 자라, 엎누름을 받았고, 짓밟음을 당하였고, 물건같이 다룸을 받았고, 짐승같이 대접함을 겪었다. 그뿐 아니라, 제 스스로가 저를 업신여겼고, 저를 잃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어떤 값을 받고 있는가? 온몸에 남은 것은 더러움의 기록뿐이요, 한 마음에 남은 것은 슬픔의 기억만이다. 세상에 그 계집을 동정하는 이 없고, 구해주는 이 없고, 간 해에 그를 사랑하여 데리고 놀던 놈들도 냉랭히 한번 돌아보는 놈이 하나 없고, 이제 저는 사회적 영겁의 처벌 밑에 불쌍한 존재를 남의 세상에 붙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듯 생각하고, 나는 그 계집을 향하여 업신여기는 침을 뱉었다.
그러나 읽는 이들아, 그 계집은 나를 놓지 않았다. 수그리고 거들떠보지도 않는 눈과 다물고 말하지 않는 입은 내게 그보다 이상의 것을 요구하였다. 그렇다, 그 이상의 것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단순히 슬픈 느낌이나 업신여기는 생각 이상의 것을 저에게 주어야 한다. 존경을 주어야 한다. 저는 사회의 죄악을 대신 맡아 졌기 때문이다. 늙은 갈보야, 너는 사회의 무지와 잔인과 비루와 거짓과, 인간 속에 들어 있는 수성(獸性), 인격 밑에 숨는 마성, 이 모든 것을 가냘픈 네 한 몸으로 다 받아 걸머졌었다. 그 때문에 너는 처녀성을 빼앗겼고 인간성을 잃었고, 젊음을 다 없애 먹었다. 너 때문에 신사는 그 점잖음을 뽐낼 수 있고, 숙녀는 그 깨끗함을 자랑할 수 있다. 사회는 네 앞에 사죄하고 존경하는 뜻을 드리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사람이 침 뱉는 더러움 속에 엄숙한 미를 발견한 로댕은 과연 뛰어난 바치 조각가다. 읽은 이들아, 우리도 로댕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아시아의 대륙에서 태평양으로 나아가는 큰 길가에 앉아 천년 동안 그 비참한 모양을 하고 앉은 이 늙은 갈보 앞에, 이 수난의 여왕 앞에 슬픔과 엄숙함과 존경을 가지고 머리를 숙여야 한다.
고난은 인생을 위대하게 만든다. 고난을 견디고 남으로써 생명은 일단의 진화를 한다. 핍박을 받음으로 대적을 포용하는 관대함이 생기고, 궁핍과 형벌을 참음으로 자유와 고귀를 얻을 수 있다. 고난이 닥쳐올 때 사람은 사탄의 적수가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친구가 되든지 둘 중의 하나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고난은 육에서는 뜯어가지만 영에서는 점점 더 닦아낸다. 고난이 주는 손해와 아픔은 한때나, 그 주는 보람과 뜻은 영원한 것이다. 개인에서나 민족에서나 위대한 성격은 고난의 선물이다.
고난을 받아야 한다. 우리 지은 죄로 인하여 고난을 받아야 한다. 재난이 올 때마다 피하기부터 하려 하고 비탄만 하지만, 그 당파심을 버리지 않는 한, 그 시기심을 버리지 않는 한, 의인 대접할 줄을 모르는 한, 환난은 절대로 떠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법칙에 의하여 그럴 것이다. 죄가 무슨 죄냐? 나를 버린 것이 죄요, 뜻을 찾지 않은 것이 죄다. 나를 버린 것이 하나님을 버린 것이요, 뜻을 찾지 않은 것이 생명을 찾지 않은 것이다. 우리의 평면적인 인생관을 고치기 위하여 고난을 받아야 한다. 자아에 충실하기 위하여, 고식주의를 깨뜨리기 위하여, 은둔주의를 벗기 위하여 이보다 더 심한 고난이라도 받아야 한다.
우리의 바탈을 드러내기 위하여 고난을 받아야 한다. 착한 성질이 나약함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하여, 잃었던 용기를 다시 찾기 위하여, 약아빠짐으로 타락해버린 지혜를 도로 끌어올리기 위하여, 중간에 생긴 종살이 버릇을 없애기 위하여, 굳센 의지가 자아가 되고 고결한 혼을 다듬어내기 위하여 불 같은 고난이 필요하다.
우리의 생명을 마비시키는 숙명철학을 몰아내기 위하여 최후의 반발을 찔러 일으키는 지독한 고통이 필요하다. 장차 올 새 역사에서 우리의 사명을 다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되기 위하여 고난은 절대 필요하다. 보다 높은 도덕, 보다 넓고 진보적인 사상의 앞잡이가 되기 위하여, 우리가 가진 낡은 모든 것을 사정없이 빼앗아가는 고난의 좁은 문이 필요하다.
그러면 일어서라, 고난의 짐을 지는 자들아, 수난의 겟세마네에 밤은 깊었고, 기드론 내를 이미 건넜다. 마지막이 가까울 것이다. 2천 년 전 고난의 왕이 “오직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고난의 쓴 잔을 바짝 당겨 들이켜고 십자가를 향하여 냅다 달린 것같이, 우리도 이 짐을 쾌히 지고 저 목메는 마지막 여울로 내려가자. 이때까지 우리를 비렁뱅이로 표시했던 누더기를 여기서 다 버리자. 그것은 우리가 허영의 저자에서 얻어 입은 것이었다. 이때까지 아끼던 모든 소유도 여기서 다 버리자. 그것은 우리 정신이 흐렸을 때 남의 집의 쓰레기통에서 주워 넣은 것이었다. 지금까지 꼭꼭 간수해가지고, 자면서도 쥐고 잤던 조상 전래의 이 문서도 여기서 다 버리자. 그것은 다 불쌍한 우리 이웃에게 지운 빚 문서다. 우리의 땅을 빼앗았던 것도 다 용서하자. 이제부터 네 땅, 내 땅이 없다.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 죽인 원수도 용서하자. 이제 네 민족, 내 민족, 네 집, 내 집이 따로 없다. 우리 어린이를 우리 손에서 빼앗을 때 이를 갈고 뼈에 새겼던 원한도 이 흐름 속에 버리고, 우리들의 처녀를 짐승 같은 놈들이 잡아가고, 우리들의 아내를 우리들의 눈앞에서 욕보일 때에 털끝까지 올랐던 분, 세포 갈피 갈피에 박혔던 독, 그것도 이 물속에 다 던져버리자. 이 여울을 건너면 골고다가 있다. 고난의 임금에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오직 이 짐만 져라. 이 지워주는 십자가만 사랑으로, 믿음으로, 소망으로 지고 건너라.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인(仁)한 사람임을 믿어야 한다. 그것은 그렇게 쉬이 없어지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의 민족적 성격이 되기까지에는 길고 긴 세월이 들어서 된 것이다. 거기 비하면 아직 삼국시대 이후 천오백 년은 아무것도 아니다. 낙심할 것 없다. 우리가 가만히 손을 대어보면 이 상한 가슴 밑에 오히려 인의 일맥이 할딱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너져가는 초막 속에 다른 것은 없어도 아직 ‘인’이 남아 있다. ‘인’은 알맹이다. 그것이 곧 생명이다. 하나님의 명이다. 없어질 수 없다.
오늘날 한국의 모양을 보고 생각하면, 여기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는 말은, 마치 제선왕이 불인지심을 자기 속에 품으면서도 어지러운 전국시대의 세상을 볼 때 도저히 믿기지 않았던 모양으로, 우리도 스스로 믿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믿음이 될 수 있다. 맹자가 겨눈 것도 그점이었다. 위대한 교사가 겨누는 요점은 늘 안에 있다. 듣는 자로 하여금 자기 속에서 발견하게 함이다. 자기 속에서 발견하는 것이 지극히 작으나 그것이 지극히 큰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으로서는 능치 못하나 하나님께서는 능치 못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민족을 살리는 길은 믿음을 일으키는 데 있다. 상식을 가지는 사람이면 아무도 한국을 가지고 세계적 사명을 다할 수 있다고 생각은 못 할 것이다. 모든 판단의 표준이 바뀌지 않는 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사실 모든 판단의 표준이 바뀌는 일이 있다.
그것이 신앙의 세계이다. 믿음은 세계를 뒤집는다. 보통 이성으로써 아는 세계는 현상의 세계다. 그것은 참이 아니다. 참의 세계는 현상 뒤의 참을 믿음으로 열린다. 그러므로 세계가 바뀐다. 믿음의 자리에서 볼 때 세상이 크다는 것이 작고, 세상이 강하다는 것이 약하고, 세상이 옳고 귀하다는 것이 그르고 천한 것이 된다. 그것은 참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옳게 말한다면, 믿음이 세계를 뒤집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뒤집어놓은 것을 믿음이 도로 바로잡는 것이다. 세상은 겉을 보는 것이요 믿음은 속을 보며, 세상은 육으로 판단하는 것이요 믿음은 영으로 판단한다. 그러므로 서로 반대된다.
이제 생각해보라. 한 행렬이 어떤 목표를 향하여 나가는데, 중간에 가서 이때까지 목표로 알았던 것이 정말 목표의 그 반대쪽 공중에 비쳐 보인 허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어떠하겠나? 그리하여 전군을 향하여 “우로 돌아, 앞으롯!” 하는 구령을 내린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겠나? 그야말로 앞선 자가 뒤가 되고 뒤에 선 자가 앞이 되지 않겠나? 그런 일이 과연 있다. 아침 해가 올라올 때에 동편보다는 서편 산봉에 먼저 보이듯이, 역사에도 그런 일이 있다. 이제 우리 보기에는 인류역사 위에 그 일이 일어나려 하고 있다. 아니다. “때가 오려니와 지금이 그때라.” 벌써 일어나고 있다. 한국이 세계의 한국이 되고, 아프리카 흑인이 세계 열강을 코에 걸고 놀려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나? 이때까지 약육강식을 근본 원리로 삼고 나오던 문명이 차차 그 목표가 허상인 것을 알기 시작하였다. 이제 장차 역사의 방향이 180 도로 변할 것인가.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왜? 그렇게 되지 않으면 세계는 파멸을 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제는 상식이다. 그러나 세계가 그렇게 될 리는 없다. 이 점은 과학적 지식이 아니요 믿음이다. 그러므로 역사에 “우로 돌아, 앞으롯!” 은 꼭 올 것이다. 우리가 사명이 있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때까지의 역사는 폭력으로 하는 쟁탈의 역사였으나, 인류가 망하기를 자처하지 않는 한, 이 앞으로의 역사는 도덕적 싸움의 역사일 수밖에 없다. 전에는 힘이 강하고 병기가 날카롭고 성질이 호전적인 자가 앞장을 섰고, 착하고 온유한 자는 바로 그 때문에 뒤에 서고 학대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우로 돌아, 앞으롯!”의 구령이 내린 장래 역사에서는 반드시 이와 정반대가 될 것이다. 도덕적으로 나은 자에게 높은 지위가 주어질 것이다. 그날에는 한국이 하기만 하잔다면 할 일이 있지 않을까?
퇴각을 시작한 것은 믿음을 잃었기 때문이다. 정신이 스스로 저는 불사신인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싸움은 이겨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져도 졌다 하지 않으므로 이긴다. 죽음을 죽음으로 알지 않으므로 정신이 된다. 믿음이 정신이요, 믿음이 불사신이다. 그것을 내버리므로, 혼이 스스로 죽으므로 갇혀버렸다. 갇혀버린 혼, 그것이 곧 운명이다. 그러므로 운명은 자기를 잊은 자에게는 언제나 있는 것이요, 스스로 하는 자에게는 없다.
선전에 속아서는 아니 됩니다. 사람의 세상을 만드는 것은 결코 정치가 아닙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인간의 양심을 뺏어버려야 코 꿰인 소나 목 매인 강아지인 양 지배를 할 수 있고 그래야 짜먹고 저희들이 호강을 할 테니까 그런 선전을 하지만, 절대로 거기 속아서는 아니 됩니다. 정치하고 지배했다는 것들 다 갔습니다. 잘난 것 같지만 가고 나면 물결에 놀다 흘러가버린 가랑잎입니다.
죽어도 남는 것이 참입니다. 영웅이라던 것들 어디 있습니까? 그것들과 한가지로 그 정치도 그렇게 가버렸습니다. 오늘까지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인간을 인간으로 붙들어갑니까? 인정입니다. 양심입니다. 정신입니다. 뜻입니다. 이것은 정치가 만들어준 것이 아니라, 정치와 싸워가면서 얻은 것입니다. 몸은 죽어도 이것은 넘겨주고 넘겨받았습니다.
농사를 잘하는 농부에게는 봄이 좋듯이 겨울도 좋으며, 바로 사는 사람에게는 삶이 고맙듯 죽음도 고마운 것같이, 역사를 능히 창조하는 사람에게는 성공이 의미가 있듯이 실패도 의미가 있고, 올라가는 길이 없어서는 아니 되듯이 내려가는 길도 없어서는 아니 된다. 그런 자리에 선 다음에야 역사를 말할 수가 있다. 선한 사람을 칭찬하고 선하지 못한 사람을 깔보는 마음이 없고 난 다음에야 사건을 공정히 판단할 수 있으며 의미를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진시황이 오늘날 어디 있습니까? 카이사르가 오늘 어디 있습니까. 다 갔습니다. 영원히 있겠다고 붙들던 놈들 다 갔습니다. 아직 남아 있는 것들이 있으나 그것의 운명은 뻔합니다. 그와는 반대로 가지려 하지 않고 주려 했고,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않고 즐겨 남을 섬겼던 사람들은 지금도 서 있어 다스리고 있습니다.
예수요 석가입니다. 삶으로 죽은 것은 욕심이었습니다. 죽음으로 산 것은 정신이었습니다. 가짐으로 잃은 자는 정치가였습니다. 내버림으로 얻은 자는 성인이었습니다. 해가 없어질 날은 와도 이것이 가릴 날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분하면서도 분을 참고, 슬프면서도 눈물을 머금으며, 못 생긴 것 같아도 위로를 얻고, 얻은 것이 없어도 소망을 가지고, 증명을 할 수 없어도 확신을 가지면서 이 역사의 수레를 멥니다.
함석헌 저,《함석헌 저작집 세트》, 한길사,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