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습관
방금 [사탄탱고]를 다 읽었다. 요새 스레드를 시작했는데, 참 많은 사람이 다양한 독서를 하는 걸 알았다. 원래는 [사탄탱고]에 감상평을 써볼까 했다. 내 최애로 등극한 이 작가에게 소설을 읽는 내내 감탄했기 때문이다. 서사 전체를 완전히 장악하는 느낌이었고 내가 마치 그 농장에 유령처럼 떠 있는 기분이었다. 인물 하나하나가 살아있고 모두가 주연이면서 모두가 주변 인물인, 특이한 소설이었다. 이게 1985년 소설이라니 더 놀랍다. 헝가리 사람들은 이런 소설을 읽었구나 싶으니 그들이 부러웠다.
이 책을 읽을 사람이나 읽고 싶은 사람이라면 마지막에 조원규 선생님의 해설을 꼭 추천하고 싶다. [사탄탱고] 리뷰도 이 해설을 읽고 굳이, 해야 하나 라는 생각을 했다. 너무나 훌륭한 해설이었다.
[사탄탱고]를 완독하고 할 말이 너무 많았는데, 또 하고 싶은 말이 모두 사라졌다. 지금 카프카 [성]을 읽을까 한다. 지금 읽고 있는 병렬 독서를 멈추고 카프카와 크리스너호르 커이 라슬로의 [저항의 멜랑콜리]를 시작할지 고민 중이다. 카프카가 없었으면 [사탄탱고]가 나올 수 없었다고 크리스너호르 커이 라슬로가 말했으니, 나도 좀 진지하게 카프카를 읽어볼까 싶다.
나는 꽤 오래전부터 병렬 독서를 하고 있다. 이십 년도 더 됐고 그래서 내겐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라 이 병렬 독서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다른 분들은 어떤 식으로 병렬 독서를 하는지 궁금하다.
전자책이 없던 시절에는 많은 책을 읽을 좋은 방법이 병렬 독서였던 것 같다. 화장실에서는 미술이나 음악에 관련된 짧은 책을 읽었다. 그러다 마음에 들면 화장실 밖으로 들고 나와 읽다가 다 읽기도 했다. 출근하는 길에 버스에서 읽는 책은 주로 소설이었다. 30-40분을 가니까 단편 하나를 읽으면 딱 좋았다. 짧은 이동에는 시집을 들고 나갔다. 시는 쭉쭉 읽힐 때도 있지만, 어차피 두세 번은 읽어야 해서 여러 번 읽을 걸 고려한 선택이었다. 보통은 세 권 이상을 넘기지 않았는데, 언제부턴가 한꺼번에 읽는 양이 늘었다. 그건 또 음악처럼 돼 버린 독서습관이 아닐까 싶다. 영화광이 기분에 따라 그날 감상할 영화를 고르듯, 이제는 기분에 따라 책을 선택한다. 어떤 날에는 어느 책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한다. 그에 반해 또 엄청난 독서를 하는 건 아닌 것 같다. 내 독서에 중간중간 읽는 단편은 포함되지 않는다. 그건 숙제 같은 거다.
보통 독서는 한 작가를 알게 되면 그의 책을 다 읽는다. 알아듣든 아니든 난 일단 그의 책을 다 산다. 바로 다 읽는 경우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다. 프리모 레비나 제발트는 책을 사서 바로 읽었다. 어렵고 힘들었는데 좋았다. 그게 중요한 것 같다. 좋다는 느낌. 이 작가 좋아 죽겠다는 느낌이 들면 일단 책을 읽는 속도가 생긴다. 그리고 이 책들은 언젠가 꼭 한 번은 더 정독하고 싶다.
철학 서적은 공부처럼 읽으니 집에서 정색하고 읽어야 한다. 또 시간도 오래 걸리고 이해가 안 되는 건 인터넷이나 다른 책도 뒤져 자료를 찾아야 하니, 이건 온전히 독서라 부르기 어렵다. 그럼에도 책을 읽는 기간에는 병렬 독서에 들어간다.
요즘 드는 생각은, 내내 소설을 쓰니 소설이나 시를 읽는 행위는 내게 인풋에 해당된다. 소설을 쓰다 막히거나 뭔가 안 풀리는 날에는 거기에 어울리는 독서를 해야 한다. 내 기분을 다시 글쓰기로 데려갈 만한 글을 찾아야 한다. 그렇다고 지금 쓰는 것과 비슷한 글을 읽을 수는 없다. 그럼 나도 모르게 그 작가를 따라 할 수도 있으니까.
일단 독서도 습관이다. 나는 활자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그래서 자주 사람도 책이나 활자에 비유한다. 나는 함초롱 바탕 같은 사람도 좋지만 대체로 명조체 같은 사람을 좋아한다. 눈이 아프지 않게 오래 볼 수 있는 사람. 내겐 그 안에 책도 포함인 것 같다. 함께 오래 할 수 있는 친구 같은. 그러니 병렬 독서는 내게 일종의 친구와의 티타임 같은 거다. 좋은 친구와 오랫동안 조용히 이어지는 수다 같은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