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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흰]을 읽다가

끼적끼적...

by 명희진


오늘은 뭘 좀 쓰려고 내내 빈둥댔다. 고쳐야 하는 단편이 두 개 있는데, 파일을 열고 싶지 않다.

뭘 읽을까, 하다가 한강의 [흰]을 읽었다. 시라고 하기에도 산문이라 하기에도 어려운 글이었다.

벌써? 하는데 해설이 나오고 끝났다. 거기 작가의 말이 있어서 읽었는데, 읽다가 울컥했다.




한강 작가가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반년을 지낸 걸 알았다. 바르샤바를 나는 일 년에 한 번은 꼭 간다. 고양이를 시댁에 맡기고 거기 쇼팽 공항에서 한국 가는 비행기를 타기 때문이다. 한강이 말한 전쟁 기념관을 매번 지나면서도 나는 거길 들어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항상 시간이 적기도 했고 피곤하기도 했다.


우리가 바르샤바에서 하는 건 정해져 있다. 올드타운으로 가서 일 년에 한 번만 갈 수 있는 우리의 최애 식당에 간다. 거기서 오리 고기와 피로기, 와인을 마시고 타운을 조금 걷다가 커피를 마시러 간다. 그리고 다시 택시를 타고 공항 호텔로 와서 잠을 청한다.


폴란드는, 슬픈 나라다. 나는 폴란드 역사를 잘 모르지만 내가 알기론 나라가 없어진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라파엘을 만나기 전까지도 폴란드는 내게 위험한 공산 국가였다. 도시는 어둡고 우중충하고 사람들은 뭔가 잔뜩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가 본 적도 없으면서 알고 싶지 않은 나라였다.


우리는 폴란드에 살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내겐 폴란드 가족이 있다. 그들은 순진하고 겁이 많고 소심하다. 내가 만난 폴란드 사람들은 대부분 그랬다. 마음을 열면 강아지처럼 모두를 주려는 사람들이었고 말이 많고 빠르다. 그래서 한 시간 같이 있으면 그에 관한 모든 걸 알게 된다. 물론, 사람은 다양하니까 아닌 사람도 있겠지만. 내가 오랜 시간 만나온 폴란드 사람들은 그랬다.


우린 네덜란드에 산다. 라파엘은 반도체 회사에서 일한다. 그는 꽤 괜찮은 교육을 받았고 스펙을 잘 쌓았다. 사실 라파엘의 부모님도 공대 출신이다. 당시에는 국가에서 대학을 갈 사람과 아닐 사람을 정했으니 두 분도 꽤 영리하셨던 것 같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건, 라파엘이 폴란드인이라는 이유로 많은 차별을 받았다는 거다. 지금은 어느 정도 위치가 있으니 함부로 무시하지 못하지만, 꽤 자주 오랫동안 나는 그런 일을 겪는 라파엘을 봐왔다. 은근한 무시와 괄시.... 가난할 거라는 생각을 내비치는 무뢰한들을 너무 많이 만났다. 그를 마치 일자리를 찾아 서유럽에 온 것처럼 대하는 영국인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꽤 오랫동안 거만하게 라파엘을 대했다.


"너희는 집 고칠 때 싸게 고치겠다." 같은 말을 들을 때는, 어이가 없다. 폴란드 사람들이 영국이나 네덜란드에서 막노동을 많이 하기 때문이다. 대놓고 폴란드인들은 좀 가난....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예전에는 무슨 의미인지 몰라 듣고 있었는데, 이제는 척이면 척이다. 나는 라파엘이 듣기 전에 먼저 목소리를 높인다.


“유럽은 폴란드에 빚이 있잖아. 자기 싸움 아닌데도 전쟁이 터질 때마다 제일 먼저 땅을 내주고 제일 먼저 무너진 나라야. 바르샤바는 전쟁 후 80~85%가 폐허였고, 재건할 자재가 없어서 아우슈비츠 근처에서 나온 목재까지 떼 와서 도시를 다시 세웠어. 왜 아직까지 폴란드가 완전히 복구되지 않았는지 정말 모르는 걸까? 그 뒤로는 원하지 않는 소련 체제에 수십 년을 묶여 있었고. 이제 좀 평범해지나 했더니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인데, 유럽은 또 멀찍이 보고만 있잖아.”


그러면 상대는 입을 닫는다. 나는 정말 다다닥, 진짜 한숨도 쉬지 않고 이 말을 해 상대를 곤란하게 한다. 폴란드에 대해 더 나쁜 말을 하면 더 많은 봉변을 당할 수 있다는 암시 같은 거다. 나는 라파엘이 더는 그런 상처를 받지 않길 바란다. 그에게 자주 네가 폴란드 사람인 걸, 네 할아버지가 폴란드를 위해 싸운 걸, 할머니가 시베리아에서 살아남은 걸 자랑스러워하라고 말한다.


나는 아우슈비츠에 세 번 정도 방문했다. 네 번이었나? 아우슈비츠는 시댁에서 가깝다. 프리모 레비의 소설을 읽다 보면 내가 아는 폴란드 도시가 나온다. 다른 생존자의 이야기에도 카토비체를 걸었다는 증언이 나온다. 우린 카토비체로 쇼핑을 간다. 거기엔 우리가 너무 사랑하는 카페가 있다. 카토비체도 십오 년 전에 처음 갔을 때보다 많이 좋아졌다. 역을 새로 지었고 주변도 깨끗해졌다. 글리비체도 마찬가지다. 글리비체는 도시가 다 망가졌었다. 지금은 역도 새로 짓고 도로도 새로 깔렸지만 함께 간 조카는 혼자 나가길 꺼렸다. 나는 폴란드 사람들이 따뜻하고 다정하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들만큼 따뜻한 사람들을 만난 적이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폴란드를 공산주의 국가로만 기억한다. 그들은 유머를 사랑한다. 모든 말에 되도 않는 유머를 해서 가끔 나를 피곤하게 하지만.

이런 사랑스러운 사람들은 여전히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공포에 지내고 있다. 기껏 재건한 그들의 도시가 또 무너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항상 가지고 있다. 그들은 동맹국인 유럽도, 지금은 그들의 도움을 받지만 한때는 먼 이웃었던 우크라이나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적국인 러시아는 말 할 것도 없다. 모두가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거라고 했을 때, 폴란드는 러시아를 믿지 않았다. 그들의 역사가 그렇다.


처음에 아우슈비츠는 호기심이었다. 충격을 받았지만 그뿐이었다. 두 번, 세 번... 나는 독일인이 한 짓을 용서하지 않는다. 물론, 나에겐 그들을 용서할 자격이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용서할 수 없다. 인간이, 인간에게 어떻게 저런 짓을 할 수 있나... 갈 때마다 이상하게 충격은 더 커진다. 더 이해해서일까? 나는 종종 다시 그런 상황이 되면 그들이 그런 짓을 또 할 수 있다는 이상한 생각을 하기도 한다. 이런 이야기는 너무 슬프다. 인간이 너무 아프기 때문이다. 지금의 이스라엘을 보면 알 수 있기도 하고.


한강의 소설은, 흰 연기 같다. 죽은 이의 흰 옷을 태울 때 하늘로 오르는 연기처럼, 눈앞에 아른거린다. 읽을 땐 술술 읽히는 데, 읽고 나서 아리고 아프다. 오후에는 내처, [순이삼촌]을 읽었는데, 이게 또 여운이 깊고 커서 벗어나기 힘들다. 예전에 글을 읽으며 받는 타격이 이렇게 크지 않았는데, 요새는 버겁다는 생각이 든다.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가 떠오른다. 그러니까 이마저도 인간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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