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iley Aug 04. 2023

페르소나(Persona)에 감정 필터 씌우기

2023 EAC 작가지원프로젝트 한승훈 개인전 서문

한승훈 작가의 작업을 처음 모니터 속의 이미지로만 마주했을 때 매력적으로 꾸며진 인형이랄까, 캐릭터랄까, 새로이 창조된 이 존재는 작가의 자화상인 걸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하는 궁금증들이 떠올랐다. 좋은 신호였다. 잘 정돈되어 그려진 도상(圖像)에 머무르지 않고 표면 너머의 속내가 궁금해졌으니 말이다. 인형처럼 영롱하지만 초점을 맞추기 힘든 눈빛 속에 숨어있는 누군가가 나에게 전할 말이 있는 듯한 낌새가 모니터 화면 밖으로 전해졌다. 

조물주의 취향과 의도에 의해 태어난 캔버스 안의 초상은 우리와 같은 동시대를 살아가며 새로운 역할을 수행해 나간다. 주술적이거나 제의적인 도구에서부터 아이들의 장난감이나 장식용, 현대의 성인들이 소비하는 키덜트(kidult) 문화까지를 아우르는 인형이나,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사회의 소비문화를 우리와 친근한 특정 몽타주로 보여주는 캐릭터 등과 마찬가지로, 가상의 초상들은 어느 정도 인간을 투영하고 자아를 실현 시키는 대체제로 사용된다. “현대인의 불안과 공허함”을 표현한다는 작가의 작품 속 ‘존재’도 마찬가지로 단순히 작가 개인의 감정, 혹은 현대인의 모습을 투영시킨 또 하나의 페르소나(Persona)로서 창조된 것일까?      


작가의 전반적인 작업 프로세스를 물었을 때, 당시 감정이 잘 묻어날 수 있는, 그리고 시각적으로도 매력적인 무드를 구축하기 위해 기초 구상과 스케치 과정에 가장 집중하여 감정을 표출한다고 말했다. 스케치를 통해 작가의 머릿속에 구상이 짜여지고 나면 채색은 상대적으로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신체의 움직임이 되는 것이다. 피부톤이나 머리 컬러, 옷의 질감과 배경의 효과는 계산된 조화로움이 유지된다. 최대한 절제된 붓질을 통해 매끈한 표면을 연출하는 것 또한 붓끝으로 전해지는 개인의 자아와 감정의 흔적을 최대한으로 남기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자기표현(self-expression)이 마치 의무인 양 각광 받는 현대사회에서 작가의 작업에는 타인을 생각하는 ‘배려’의 필터가 씌여져 있다. 그가 창조해낸 페르소나와 캔버스 속의 세계에서는 어느 것 하나 강조되지 않고 공평하다. 이는 보는 이로 하여금 동일시를 통한 공감(empathy)을 이끌어냄과 동시에 각자의 새로운 감정들을 발화시키게 하는 따듯한 페르소나이다. 

작업들의 제목을 살펴보더라도 이와 같은 숨은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작품 속의 ‘존재’들은 이름이 없다. 아니, 작가는 이름을 명명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이름 지어지는 순간 화면 속의 캐릭터는 하나의 ‘누군가’가 되어, 발언하고 표현하는 우리 현대인과 별 다를 바 없는 자아로 태어나 버리기 때문이다. 이름 대신 선택된 <Time to Blossom>, <Piece of Mind>와 같은 제목들은 감정과 무드가 작가 작업 전반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을 반증한다. 화면 속 그 ‘존재’는 특별한 발언 없이 강력한 감정적 메시지를 제안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예쁘고 늙지 않는 매끈한 외형의 그녀는 표정이 없다. 작가의 초기 작품에서는 조금 더 스토리가 가미되어 연상을 불러일으키는 어떠한 상황 속에 존재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최근 들어 도상 속의 그녀도 세월에 따라 변모하는 듯 보인다. 아이라기 보다는 세련된 현대를 살아가는 젊은 여성의 이미지를 한 그녀는 성숙해지는 만큼 갈수록 표정을 숨긴다. 한 꺼풀의 가면을 한 초상 뒤에 작가는 숨어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너는 어떠니? 

작가의 작업을 처음 마주했을 때 들었던 궁금증들이 여기서 풀리는 듯했다. 읽기 힘든 표정으로 서 있는 ‘존재’는 스스로의 감정을 돌보지 않고 솔직하지 못한 현대의 우리에게 내면을 되돌아보고 감정을 꺼내 읽어보며 자기실현을 가능케 하는 기회를 선물한다. 표정 없는 차가움 속에 작은 불씨로 피어나는 따듯함을 가진 화면 속의 그녀에게 각자의 필터를 씌워 바라보면 어떨까? 오늘은 허무와 외로움의 필터를, 내일은 작은 기쁨과 희망의 필터를. 작가의 작업을 마주하며 나만의 감정이 덧대어진 페르소나를 그려보고 그와 함께 어디로든 새로운 세계로 떠나보는 경험을 해보길 바란다.


이혜원 큐레이터

작가의 이전글 노비스르프 작품론: 불의 연소 조건에 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