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의 수요일의 초대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2 코린 5,20)

by 어엿봄

한밤 중에 잠이 깨버렸다. 주님 부활을 준비하는 회심의 여정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 새벽이다. 다시 일어나 걸어가야 할 길은, 죄의 용서와 구원을 믿는 희망의 길이다. 하느님과 화해하라는 오늘 제2독서의 말씀이 계속 내 안을 울린다. 죄가 없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죄가 되셨단다. 그리고 나를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신단다.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어쩌면 하느님을 용서하지 못한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말없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흠 없는 어린양의 이미지에 나는 가끔 울컥했다. 때로는 그 어린양의 모습에서 그리스도가 아닌 세상의 무수한 작은 이들을 발견하기도 했었다. 저기 먼 곳의 전쟁으로 가족을 모두 잃고 혼자 살아남았다는 소년의 얼굴이, 서울 한복판 꽃다운 나이의 자녀를 차가운 바닷물 속에 떠나보내야 했던 아버지의 얼굴이, 어제 거리에서 건조한 목소리로 아이 먹을 빵을 사게 도와달라는 어머니의 얼굴이 그리고 알 수 없는 슬픔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나의 얼굴이 보인다.

애석하게도 '나'를 지켜주지 못한 하느님을, 십자가의 죽음을 끊임없이 허락하는 하느님을 나는 감히 용서하지 못한 것 같다.


재의 예식 때 사제는 내 머리에 재를 얹으며 말할 것이다. 사람인 나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기억하라고... 우리의 고통은 그리하여 바람 불면 흩어 사라질 한 줌의 재에 불과한 것일까.


하느님은 인간을 당신의 모습대로 빚어 숨을 불어넣으시고는 살게 하시고, 그 인간을 보시며 좋아하셨다(창세 1,27 - 2,7 참조). 내가 하느님 눈에, 그분 마음에 들었단다.


어린 마음에 하느님의 사랑이 참 대단하게 느껴졌었다. 하느님은 나를 만드시고 나를 사랑하시며 그리하여 그분의 가장 값진 외아들까지 내어 주셨다니, 작은 키의 내 눈에 든 커다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의 처절한 희생은 그 사랑이라는 이유 아니면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런데 나는 두려웠던 것 같다. 나를 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내셨다는 그분의 사랑이 조금은 두려웠다. 누군가의 죽음으로 생명을 얻기엔 부족한 나였으니까.


오랜 시간 내 존재가 잘못이었다고 믿어왔다.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이 가난한 가족에게 부담이 되었고, 또 내가 아팠던 것이 그들을 더 힘들게 했으리라고. 그냥 그렇게 모든 것을 내 잘못으로 끌어안는 게 더 편했던 것 같다. 때문에 목숨을 다 바쳐 죽음으로 내 생명을 구했다는 그 큰 신비가 나에게는 참으로 어려웠다.

한편으로는 아주 오랫동안 나는 내 잘못이 그리고 우리의 잘못이 아니길 바라왔을 것이다. 무고함에 쏟아진 세상의 폭력에 숨죽이며 아무 말하지 못했지만, 내가 외치고 싶었던 것은 자비가 아닌 정의였는지도 모르겠다. 남몰래 눈물을 훔치며 언젠가 정의의 하느님이 승리할 때까지 나의 무고함을 간직하리라 다짐했다. 그 폭력에 물들지 않은 깨끗한 마음을 끝내 간직하여 한 송이의 꽃을 피워내리라. 결국은 부활의 그날이 와야만 한다. 내가 빼앗긴 영혼의 한 줌에 다시 숨이 불어넣어 질 때가 와야 한다. 나는 스스로 생명을 되살릴 수 없다.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이 부재한 적은 없었다. 나를 지금껏 살게 한 것은 내 안의 주님이었다. 내가 그분의 십자가의 길을 걸은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내 십자가의 길을 걸어왔다. 이 길로 당신 전부를 내 던진 그분의 사랑을 용서해야 하는 때인지도 모르겠다. 화와 분노를 다 쏟아내 버리고 뜨거운 눈물로 녹아내린 심장의 한가운데 새겨진 예수의 이름을 본다. 우리의 구원은 다른 데에 있지 않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은 끝, 그 죽음의 찰나에 스친 승리의 미소. 사랑의 미소를 기억한다. 내 손끝과 발끝에 번지는 사랑의 온기를 기억한다. 죽지 않았다. 죽지 않을 것이다. 한 줌의 재가 되어 고통이 날아가는 그 순간에 나는 사랑의 숨으로 살아날 것이다.

그러니 나는 나지막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화해의 손길을 내민다. 오늘, 구원의 날을 살기 위하여.


"은혜로운 때에 내가 너의 말을 듣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2 코린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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