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7월 21일 >>>
나는 중3 때 태권도 초단을 땄다. 단증번호 20444. 고된 수련 끝에 얻은 그 단증이 얼마나 좋았으면 아마 수백 번도 더 꺼내 봤을 것이다. 고교 때는 운동을 중단했고, 대학 가서 태권도부에 가입해 수련을 계속, 2단으로 승단했다. 승단심사는 서울 역촌동의 국기원에서 했는데, 전국대학연맹 태권도대회도 매년 거기서 열렸다. 그때만 해도 몸이 날씬하여, 나는 밴텀급에 1, 2학년 연속 학교 대표로 출전했다. 결과는 2패. 당시 학교명으로 유도대와 한국체대에 각각 지고 예선 탈락했다. 평생 두고두고 뼈아픈 패배다. 신장 170cm, 체중 55kg이면 밴텀급으로선 "꿈의 체형". 그런데 바보 같이 그 장점을 못 살렸던 것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갈 수만 있다면, 혹독하게 훈련해서 꼭 다시 한 번 겨뤄 보고 싶다.
그래도 난 이론에는 다소 밝았다. 가령 "옆차기"는, 양발이 다 공중에 뜨는 회전차기 종류나 이단옆차기를 빼곤 가장 힘이 좋은 발차기다. 차는 순간 몸을 반대로 뉘므로, 체중이 상당 부분 그 킥에 실리기 때문이다. 초보자들에게 이 옆차기를 시켜 보면, 거의가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린다. 목도 잘 못 가누고, 양팔도 허공에서 춤을 추고, 차는 발은 힘없이 발레를 하고, 딛는 발은 중심을 못 잡아 흔들거린다. 왼발로 찰 경우, 정석은 이렇다. 오른발을 왼발 앞으로 한 발 내딛고, 몸의 균형을 잡으며 왼다리를 교차시켜 팍 차는 순간, 공격자의 몸은 "곧은 1자" 모양으로 상대에게 보여야 한다. 고개가 숙여지거나 엉덩이가 뒤로 빠져 그 1자가 비뚤면 안 된다. 즉, 차렷 자세에서 왼다리가 옆으로 뻗은 채, 상체는 우측으로 기울고, 고개는 곧추서 좌측을 향한 자세. 거기에 왼팔은 쭉 뻗어 왼다리와 평행을 이루고, 오른 주먹은 상대의 반격에 대비, 명치를 가린다.
진짜 중요한 것이 아직 남았다. 바로 킥 하는 "발 모양"이다. 이름이 왼발 옆차기니까 왼발 "옆면"으로 찬다? 틀렸다. 그것은 전형적인 하수(下手)의 킥 모습이다. 올바른 킥은, "왼발 뒤꿈치 바깥 부분 6~7cm"가 정확히 상대방 몸에 갖다 꽂힌다. 그래야 파괴력이 최고다. 그런 정밀한 타격을 위해선, 왼발 뒤꿈치를 최대한 앞꿈치보다 높이고, 동시에 앞꿈치를 최대한 내 얼굴 쪽으로 바짝 당긴다. 즉, 왼발 앞꿈치를 바닥 쪽으로 30도, 내 몸 쪽으로 30도 기울인다는 개념으로 차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내뻗는 킥의 "최종 3분의 1" 시점에 깊고 힘찬 "허리 스냅(snap)"을 주는 것이 필수! 이 스냅이 제대로 먹히면 아랫도복(道服)이 공기를 찢으며 "빵", 멋진 파열음을 낸다. 수천 번을 차고 또 차야 다다르는 꽤 높은 경지다. 나도 옆차기 연습을 1만 번은 족히 했는데, 실제 대련에서 100% 유효타는 기억에 없다. 움직이는 상대는 그만큼 더 어려운 것이다.
중3 한 해, 대학 3학년 1학기까지, 총 3년 반 나는 태권도를 했다. 그 맨 끝 학기엔 관악캠퍼스 기숙사에서 태권도 새벽반을 지도하고 있었다. 그러다 1980년 5월 18일 새벽, 무장 공수부대의 기숙사 난입/폭행, 뒤이은 휴학, 입대, 제대, 복학, 졸업, 취직, 유학...... 정신 없이 세월이 갔고, 어느 날 돌아보니 나의 태권도는 그것이 끝이었다. 군대 시절 군사령부 대회에서 밴텀급 준우승, 포상휴가는 한 번 갔다. 하지만 학교 대표선수로서의 그 두 패배는 내내 가슴에 남았다. 체중에 비해 키가 크고 체형상 하체가 길어 유리했던 나. 발차기의 원리를 나름 꿰뚫어 후배들까지 가르쳤던 나. 하지만 실전에선 발 한 번 제대로 못 써 보고 맥없이 깨진 쓰라림. 안일하게 머리로, 말로 한 것이 잘못이었다. 끝까지 독을 품었어야 했다. "Practice, practice, practice!" 온몸을 바쳐 오직 연습, 연습, 연습! 지면 죽는다 생각하고 2만 번, 3만 번도 더 찼어야 했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이 온통 "뒷심 부족" 그 자체다. 직장생활, 사업경영, 체력단련, 신앙생활...... 어느 것 하나 "죽자사자" 한 것이 없었으니 이룬 것도 없고 발전도 없다. 이러니 66세에 자식 회사(brilliant.org)의 녹을 먹으며 자식보다 어린 사람들 밑에서 일하고 있는 것이다. 낙망 중에 그래도 "마지막 희망"이 있다. 너무너무 열망했던 나머지 스스로 내 발로 찾아가 레슨을 받았던 것이 평생 딱 두 가지. 그 하나가 태권도였고, 다른 하나는 바이올린. 환갑 다 돼서 갔더니, 하하, 여자 원장 선생님보다 내가 한 살 더 많았다. 한 달 뒤 학원 정기발표회 땐, 초등 1년생 다음 순서로 내가 무대에 나가 어설프지만 독주도 한 곡 켰다. 코로나 영향도 컸고 늘 미국을 왔다갔다한 탓도 있지만, 이 바이올린도 지금 "뒷심 부족" 상태. 나는 역시 이것도 여기까진가? 아니면 은혜로운 찬송, 아름다운 곡들을 켜며 버스킹(busking)하곺은 황홀한 꿈이 언젠가는 눈물 속에 이뤄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