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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다 털렸어요, 여자애 두 명한테!

by 김지민

2025년 10월 10일 >>>


일요일 교회 예배순서 중에 대표기도라는 것이 있다. 가령 1시간 예배라면 그 첫 15분경에, 교인 한 명이 “대표”로 나가 3~5분 “기도”를 올리는 순서다. 세상으로 치면, 형제자매 중 하나가 아버지께 한 주간의 이모저모를 아뢰고, 감사드리고, 용서도 구하고, 부탁도 드리는 일이다. 세상에서는 맏이 또는 똑똑한 자녀가 나선다면, 교회에서는 장로/안수집사들이 매주 순번제로 단상에 올라간다. 세상이 고개를 끄덕여 대표자의 말에 공감을 표할 때, 교회는 “아멘!” 하며 호응한다. 형식은 조금씩 달라도, 본질적으로는 매우 비슷하다. 단, 가정도 교회도 많이 쪼그라든 요즘에는, 집에선 하나뿐인 자녀가, 교회에선 매주 똑같은 사람이, 그 일을 할 수도 있다.


각각 형편이야 어떠하든, 상식적으로 이런 것은 다 “말”로 한다. 가족이 모여 앉아 말 대신 글로 의사소통하는 법은 없다. 기도 또한 단지 듣는 분이 눈앞에 안 계실 뿐, 모두 “말”로 뉘우치고, 호소하고, 간청한다. 땅의 아버지든 하늘의 아버지든, 상대는 “아버지”. 유창한 웅변, 화려한 수식(修飾)이 필요치 않으신 분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 말하면 다 알아들으신다. 어쩌면 말 안 해도 다 아신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교회가 이 대표기도를 “글”로 써서 읽는다. 가식과 겉치레의 극치다. 다들 용기뿐 아니라 일말의 문제의식조차 없으니, 개선은 요원해 보인다. 가수가 "노래"를 안 하고 “가사 낭독”을 하는 이 기상천외한 진풍경, 과연 언제까지 가려나?


감성, 이성, 기쁨, 슬픔, 번뇌, 불안, 불만, 원망, 감사, 환희, 경이, 후회, 낙심, 깨달음, 결심, 복수심, 굴욕감, 절망감, 공포, 공허, 눈물, 콧물...... 이런 것들이 뒤범벅돼 저도 모르게 나오고 부지중에 끝나야 진짜 기도다. 말짱한 정신에 “4분 분량”을 염두에 두고 펜으로 적기 시작하면, 이미 그건 엉터리. 엄마 무릎 위에서 조잘대는 아이 같은 순수함. 추호의 가식도 없는 100% 진정성. 이런 것이 느껴져 “아멘”이 절로 터져 나와야 그것이 진짜다. 그 주간의 사건사고/이슈, 당일의 날씨를 빼곤 누가 읊어도 매주 똑같은 문장들. 지금은 에이아이(A.I.)가 뒤에 손봐 주거나 아예 다 써 주기도 한다 하니...... 이 무의미하고 불경스러운 순서는 이제 정말 폐지/개선할 때가 됐다.


우리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많은 분들께서 문상을 오셨다. 그 수백 명 중 유일하게 내 눈물을 자아낸 이는 옛날 아버지 회사의 여직원. 집안이 어려워 아버지께서 각별히 돌봐 주셨다고 들었다. 그녀는 신을 벗고 빈소로 올라오자 그냥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곤 양손으로 바닥을 짚고 영정을 바라보며 한없이 엉엉 울기만 했다. 이보다 더 짠한 조문이 어디 있나? 진심은 정녕 못 숨기는 것이다. 총기 소유가 허용되는 미국, 배우자가 총에 맞았다는 911 신고전화가 종종 온다. 사건이 잘 안 풀릴 경우, 즉시 되돌아가는 곳이 바로 그 전화 “음성”. 허둥댐 없이 침착하고 논리정연하면, 거의 그 신고자가 범인이다. 계획된 것, 정제된 것은 어딘가 표가 나기 마련이다.


교회의 대표기도가 염려될 때마다 떠오르는 인물이 하나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남자 아이다. 광주(廣州) “사랑의 집” 안에 살 때, 우리 아래층 집사님 부부 집에 놀러 왔던 그 댁 손자다. 우연히 차 마시러 내려갔다가 우리는 그 아이를 만났다. 그리곤 생전에 다신 어디서 못 들어 볼 것 같은, “놀라운 고백”을 곁에서 들었다. 지금도 한 번씩 그 아이 얘기를 하며 웃는다.


“할머니, 제가 여자친구가 하나 있었는데요, 선물도 사 주고 맛있는 것도 많이 사 주고 정말 잘 지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다른 여자애가 또 마음에 드는 거예요. 그래서 걔한테도 몰래 또 이것저것 많이 사 주었어요. 그러다가 그 처음 여자친구한테 들켜서 삼각관계가 돼 버렸어요. 여자친구가 하나에서 둘이 되니까 진짜 돈이 많이 들데요. 저는 여자애 사귀는 데에 그렇게 돈이 많이 드는 줄은 정말 몰랐어요. 결국 처음 여자친구한테는 차이고 지금은 여자친구가 한 명밖에 없어요. 제가 모아 놨던 돈이 진짜 많았걸랑요? 그런데 지금은 하나도 없어요. 다 털려 버렸어요, 여자애 두 명한테!”


얼마나 예쁜가? 진솔함, 친밀함, 꾸밈 없음, 통한, 후회, 자성, 뒤늦은 깨달음, 새로이 채워 주심을 바람, 두리뭉실하지 않고 세밀함 등등...... 어른들이 못 갖춘 것들을 전부 다 갖추었다. A.I.의 미사여구 백일장(白日場)이 돼 버린 대표기도, 속히 이런 순수(純粹)를 되찾아야 한다. 원고가 없어 버벅댈 것은 걱정 마시라. 두려워 떨며 버벅대는 그 순진함을 더 귀하게 보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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