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들>, 유령은 여전히 우리 곁에 있는가

공연

by 인산


사실주의 연극의 개척자, 사회 비판과 도덕적 해체자, 인간 내면의 해부자로 불리는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Henrik Ibsen)의 대표작 중 하나인 〈유령>(Gengangere, 1881)이 양손프로젝트의 <유령들>(연출 박지혜)로 각색되어 새롭게 태어났다. 2025년 10월 16일부터 26일까지 LG아트센터 서울, U+ 스테이지 가변형 무대에서 공연되었다. 나는 10월 18일 19시 공연을 관람하였다. 젊은 층의 관객이 주를 이루었다.


이 희곡은 당시 노르웨이 사회의 가정, 도덕, 종교, 위선에 대한 냉철한 비판으로 유명하다. 이번 공연에서 유령이 단수(유령)에서 복수(유령들)가 된 것은, 원작에서 <유령>이 의미하는 세대를 거듭하며 반복되는 비극의 사회적 심리적 상장을 좀 더 강화하여, 유령이 과거에만 머무는 것이 아닌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강한 영향력을 미친다는 데 주목한다는 의미로 다가온다. 그러니까 현재에도 여전히 가족, 관습, 도덕, 종교 나아가 사회적 시선이 한 개인에게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이 유령처럼 존재한다는 것이다.


공연 양식의 독특함

KakaoTalk_20251020_062534628_01.jpg 알빙 부인이 흰 옷인 것은 공연 후반부에 검은 겉옷을 벗었기 때문이다.

극이 시작되면 여전히 조명이 환한 상태에서 매우 편한 검은색 복장 차림의 세 배우가 등장한다. 한 남자 배우(양종욱)가 자기를 소개하고 맨더스 목사 역과 레긴느 역을 맡았다고 말한다. 당연히 관객은 손뼉을 친다. 이어 두 배우도 소개한다. 양조아가 알빙 부인 역을, 손상규가 오즈발트와 엥스트란드 역을 맡을 것임을 말한다. 다음으로 그는 입센의 <유령>이 무엇을 뜻하는지 설명한다. 그는 해설가가 되어 관객에게, 유령은 노르웨이어 ‘Gjen’과 ‘gangere’의 합성어로, gjen은 “다시, 되돌아, 반복하여”의 뜻이 있고 ‘gangere’는 “걷는 자, 가는 자”의 뜻이 있으므로, 문자 그대로 풀면 “다시 걷는 자들”, 즉 ‘되살아나 돌아다니는 존재들’의 뜻이라고 말한다. 유령은 단순히 죽은 자의 혼령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이어져 오는 보이지 않는 힘들, 죽지 않고 계속해서 반복되는 존재라는 것이다.


아하 그렇구나! 관객은 머리를 끄덕인다. 그런데 공연이 계속해서 이렇게 관객과 눈을 맞추면서 진행되는 것인가? 해설가는, 전체 등장인물은 다섯이지만 오늘 이 무대에서는 세 배우가 이들의 역할을 소화해 낼 것이라고 덧붙인다. 그리고 이제부터 자기는 목사가 되고, 여자 배우는 알빙 부인이 될 것을 말한다. 그리고 두 사람이 반갑게 만나는 장면이 연출되며 본격적인 연극이 시작된다. 공연이 전반적으로 이런 식이다. 어떤 장면은 양종욱과 손상규가 한꺼번에 목사가 되어 알빙 부인과 이야기한다. 두 배우가 한 역이 된 것은 마치 분신이거나 혹은 내적인 중얼거림처럼 들린다. 또 다른 장면도 있다. 가령 “한 시간 전”이라는 배우의 대사와 함께 진짜 한 시간 전에 있었던 무대가 만들어진다. 마치 플레이백 씨어터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입센 그리고 <유령>

각색된 줄거리는 원작과 거의 유사하다. 3막의 <유령>이 전개되는 장소는 바닷가 근처 알빙 부인의 대저택이다. 등장인물은 존경받는 과부로서 남편의 부정과 부패를 숨기며 살아온 알빙 부인, 그녀의 아들로 파리에서 돌아온 화가 오즈발트, 이들 가족의 조언자로서 위선적인 맨더스 목사, 알빙의 사생아이자 하녀인 레긴느, 레긴느의 양아버지로서 탐욕스러운 엥스트란드이다. <유령들>에서도 다섯 인물 모두가 등장하여 하루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1막은 맨더스 목사가 알빙 부인의 집을 방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녀의 집은 겉보기엔 평온하다. 그녀는 죽은 남편의 이름으로 고아원을 세우기 위해 목사에게 방문을 요청한 것이다. 오즈발트는 건강이 악화되어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이 집안은 겉으로는 존경받는 가문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다. 알빙 부인이 과거를 회상한다.


2막에 들어서면 알빙 부인은 맨더스 목사에게 충격적인 진실을 고백한다. 남편은 방탕하고 부도덕한 인물이었지만, 그녀는 수년간 그 사실을 숨기며 살았다. “남편의 명예를 지켜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 때문에 진실을 말하지 못한 것이다. 그녀는 말한다. “우린 모두 죽은 자들과 함께 살고 있어요.” 이는 과거의 거짓과 위선이 그곳을 지배한다는 뜻이다.


3막은 고아원이 불타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 화재는 도덕적 위선의 붕괴를 상징한다. 오즈발트가 레긴느를 사랑한다고 말하자, 알빙 부인은 레긴느가 남편의 사생아, 즉 오즈발트의 이복누이임을 밝힌다. 충격을 받은 레긴느는 집을 떠난다. 이 부분은 자연주의 핵심으로, 피할 수 없는 유전과 혈통의 비극을 보여준다. 고아원의 화재에서 맨더스 목사의 위선적 태도가 분명히 드러난다. 오즈발트는 아버지의 병(매독)이 유전되었다는 사실을 털어놓고 어머니에게 “정신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자신을 죽여 달라”고 부탁한다. 오즈발트가 발작을 일으키고 알빙 부인은 아들의 부탁대로 해야 할지,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느끼며 절규한다. 무대에는 떠오르는 태양과 오즈발트의 공허한 시선만 남는다.


<유령>의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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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내용의 〈유령〉은 “사라졌다고 믿는 과거가 어떻게 현재를 다시 걸어다니는가”를 보여주는 근대 연극의 전환점인 작품이다. 사실 연극사적으로 〈유령〉은 사실주의와 자연주의의 경계선에 있는 작품이다. 즉 유전, 환경, 사회적 억압이라는 주제를 통해 자연주의적 문제의식을 매우 선명하게 드러낸다. 입센은 흔히 근대 사실주의 연극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가 도입한 사실주의는 현실 묘사 너머로 사회 제도 속 개인의 내면적 갈등을 드러내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인형의 집〉, 〈유령〉, 〈민중의 적〉 등에서 보듯 그는 중산층 가정의 일상적 언어와 거실, 식탁, 교회 등을 통해 당대의 위선과 억압된 진실을 폭로하려 했다. 이 점에서 그는 “사실적인 언어로 인간의 정신을 해부한 작가”라고 평가받는다.


한편, <유령>에서도 그렇지만 그의 희곡에는 유전과 환경의 지배라는 자연주의적 요소가 풍부하다. 자연주의는 인간의 행동이 자유의지보다 생물학적, 사회적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는 입장을 취한다. 이는 대표적인 자연주의자인 에밀 졸라(Émile Zola)의 자연주의 소설론과도 통한다. <유령>에서는 이런 자연주의의 핵심 주제가 드러난다. 예컨대, 유전이라는 관점에서 아버지로부터 태생적 매독을 물려받은 오즈발트를 통해 인간은 부모의 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아울러 환경 속의 개인이라는 관점에서, 알빙 부인은 체면과 종교 때문에 진실을 숨기고, 사회적 위선이 개인의 선택을 결정한다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도덕적이고 육체적 병에 의해, 인간의 삶은 결정된 결과로 귀결된다는 자연주의 이론과 정확히 부합한다. 입센의 인물은 자유로운 인간 존재가 아닌, 유전적·사회적 유령에 사로잡힌 존재인 것이다.


아레나(arena) 무대, 거리두기의 미학


공연장 안으로 들어서면 무대를 두고 네 면이 둘러싸인 객석 구조가 펼쳐진다. 아레나형의 무대 구조는 한편으론 관객이 사건 속에 있다는 느낌을 주어 몰입을 증가시킬 수 있는 장치다. 관객과 배우 사이의 심리적 거리를 최소화하고, 공동으로 사건을 경험하게 한다는 점, 배우의 동작과 표정을 사방에서 관찰할 수 있다는 점에서 몰입을 높일 수 있다. 하지만 관객의 시선이 분산되고 배우 역시 모든 방향에 신경을 써야 하는 상황에서 몸짓의 제한, 조명과 무대장치의 제한 등으로 몰입이 억제되는 점이 분명히 존재한다. 마치 우리 전통극처럼 관객이 무대를 빙 둘러싼 형국은 프로시니엄 무대에서 추구하는 몰입보다는 거리를 둔 상태가 된다. 이번 <유령들>에서 바닥이 흰색 사각형의 무대는 관객과의 엄격한 경계가 설정되어 있고, 배우가 관객의 눈앞에서 이루어지는 직접 변신, 그리고 해설을 곁들이는 배우들의 연기 스타일 역시 몰입감을 방해하며, 이러한 맥락을 고려할 때 아레나 무대는 거리두기 효과 쪽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고 하겠다. 그럼에도 몰입과 거리두기가 동시에 작동하는 역설적 공간인 것은 사실이다.


무대는 미니멀하다. 크기와 형태가 다른 검은 색 의자 세 개가 전부다. 무대, 의상 등의 색깔 역시 단조로운 흑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조명과 음향을 약간 활용하긴 한다. 하지만 이 역시 최소한으로 자제된다. 긴장이 고조되는 장면에서 두어 번 조명이 살짝 어두워질 뿐이다. 다만 고아원이 불타는 장면에서 객석 뒤 한쪽에 밝은 빛이 들어온다. 이것이 전부다. 조명의 변화에 곁들여서 들릴락 말락 한 음향이 배경을 이룬다. 그 작은 음향이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효과가 상당하다. 모든 사건은 인물들의 말과 행동으로 전해진다.


연극이란 무엇인가 ?


<유령들>을 보면서 가장 근본적이면서도 동시에 진부한 질문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연극이 완성되려면 희곡이 있어야 하고, 이를 실행하는 사람(배우)과 공간(무대)이 필요하며, 그들을 봐줄 관객이 있어야 한다. 연극의 4요소라 불리는 이것 중 하나만 빠져도 곤란하다. 아무리 실험적이고 해체적인 연극이라도 이들 요소 자체를 건들지는 않는다. 그럴 수는 없다. 다만, 새롭고 독특하고 혁명적인 연극은 이들 4요소 사이의 균형과 거리를 조절하면서 연극 양식을 개발해 냈다. 특히 공간의 유용과 관객과의 거리를 통해 독창적인 연극 미학을 만들어 냈다. 오늘의 <유령들>은 이 점을 다시금 재고하도록 한다. 가령 미니멀리즘의 무대는 그로토프스키를 언뜻 떠올리지만, 배우의 연기법이 이와 무관하다는 생각에 서둘러 지운다. 관객과 직접 소통하고 말 한마디에 배역이 바뀌는 양식은 브레히트를 생각나게 한다. 배우의 발성과 움직임은 자연스럽고 사실적이다. 이렇듯 여러 양식이 혼합된 독특한 <유령들>의 무대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무대 구조가 거리두기를 위한 것이라면, <유령들>에서 이 거리는 무엇을 위한 것일까? 브레히트에 따르면, 관객이 몰입에서 벗어나게 되면 냉정한 관찰자가 된다. 관객은 공연 내내 무대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자기와 어떤 관계이며, 자기가 살고 있는 현시점에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냉정하게 판단한다. 이처럼 거리두기는 분명히 관객을 교육시키려는 의도가 있다. 이를 <유령들>에 적용하면, 원작자 입센이 그랬던 것처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관습이나 타인의 시선이 관객 여러분을 옭조이고 있는 건 아니냐고 강하게 질문하는 것이 된다.




교육에 초점을 맞출 때, 양손프로젝트의 <유령들>의 미덕은 치유의 영역으로 이어진다. <유령들>의 무대에서, 소위 “남 보기에”라는 사회적 시선과 관습으로 인해 상처받고 고통받은 영혼들, 할 말을 꾹꾹 참고 살았던 인간의 등을 가만히 안아주고 토닥이는 손의 온기가 느껴진다. 유령들은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아직 완전히 놓지 못한 ‘우리 자신’의 그림자일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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