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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박현진 개인전 리뷰

공연·전시

by 인산


사진작가 박현진의 개인전(프로젝트 공간 낫씽이즈리얼, 2025.3.5~3.23)을 다녀왔다.


스마트 폰 덕택에 사진 찍기가 일상이 되어버린 요즘 사진작가는 무엇을 찍고 작품을 어떤 방식으로 창작할지 궁금하다.


개인전의 제목은 ‘어느 날’이다. 무슨 이유로 제목을 그렇게 지었는지 작가한테 물었다. 작가가 말했다. “우린 항상 그 시간을 현재로 살아가고 있고 그 순간이 ‘어느 날’일 수 있지 않을까요?” 작가 노트에는 “돌이켜 보면 삶에서 나와 관련된 사건들은 대부분 예상하지 못한 ‘어느 날’ 우연히 발생한다”고 적혀 있다. 나와 관련된 사건은 관계를 의미하고 관계 속에서 우연히 일들이 벌어지며 그 순간이 바로 사진예술로 승화된 ‘어느 날’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은 찰나의 순간 예술이라고 생각했던 까닭에 무슨 의미인지 금방 와닿았다. 흰 벽에 걸린 사진들, 그런데 아무리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평소에 생각했던 사진과는 느낌이 다르다. 전시실에 들어서면서 맞닥트린 첫 작품에 잠시 생각을 멈추게 하였다.


KakaoTalk_20250319_092515127_06.jpg?type=w773 제목 : jeju-231

어떤가? 두 눈을 의심했다. 이게 사진이라고? 마치 수채화 같은 느낌을 주는 한 폭의 그림이 아닌가? 이 이미지를 보는 순간, 사진예술에 문외한인 나는 사진작가는 가장 황홀한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부단히 애써야 할 뿐 아니라 현대의 첨단 기술에 통달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스쳐 지나갔다. 단번에 내가 생각했던 사진, 그러니까 카메라로 외부의 피사체를 잡아내는 것을 기본으로 생각했던 기존의 관념이 산산이 부서졌다. 작가는 이 작품에 대해 "현장의 오리지널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사건, 시간에 의해 변형되어 기억되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들 사진은 어떤가?

KakaoTalk_20250319_092515127_04.jpg?type=w386 제목 : exchang glances #01


KakaoTalk_20250319_092515127_05.jpg?type=w386 제목 : exchang glances #18


마치 동양화의 느낌을 주는 사진들이다. 이쯤이면 굳이 사진과 회화를 구별한 필요가 있을까 할 정도다. 예술로서 사진은 가장 적절한 순간에 빛과 구도를 조합하여 작가만의 독창적인 이미지를 창작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나는 오늘 박현진의 작품을 보면서 너무 안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작품은 뭘까?

KakaoTalk_20250319_092515127_03.jpg?type=w773 제목 : 시(詩)


이탈리아 베네치아 산마르코 광장의 사진이다. 일반 건물 사진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분명 이 속에 뭔가가 숨어 있다. 인간이 지은 건물은 인간의 속성, 가령 권력, 부, 명예 등을 표상한다. 그런데 고색창연한 건물 가운데로 두터운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 그림자는 실체가 만들어낸 비실체다. 작가는 실체인 건물에 그림자를 투영하여 비실체가 실체를 덮고 있는 것을 제시하면서, 이 건물 역시 결국은 하나의 그림자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닐까? 인간이 추구하는 욕망이 실은 그림자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다음 작품을 보자.


KakaoTalk_20250319_092515127_02.jpg?type=w773 제목 : 시(詩)


이 작품에는 단단한 건물과 두 개의 비눗방울이 대조를 이룬다. 오래된 서양의 건물은 땅에 뿌리를 내린 듯 권위를 뽐내며 당당한 모습이다. 그 옆 공간에 하늘을 배경으로 톡 건들면 터지는 두 개의 비눗방울이 위를 향하고 있다. 분명 올라가는 비눗방울이다. 단단함과 허약함, 고정과 유동성의 극적인 대비를 강하게 전한다. 두 개 중 위의 비눗방울은 프레임에 걸려 있다. 하늘로 올라가는 힘을 표현한 것인가? 오랫동안 바라보니 온전한 비눗방울과 걸친 비눗방울의 역동성이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


그런데 위의 비눗방울은 엄밀히 말해 완전한 원형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당연히 완전한 원형이라고 선 듯 결정해 버린다. 그렇다면 이 비눗방울은 완전하지 않은 완전함을 지향하는 것인가? 당연한 것으로 인식해 온 시각의 습관을 해체하려는 것인가? 아울러 프레임에 걸쳐 있는 이 비눗방울은 화면 밖의 하늘을 상상하게 하여 틀의 영역을 확장하는 효과도 있다.


또 다른 이미지를 보자.


KakaoTalk_20250319_092515127.jpg?type=w773 제목 : 시(詩)


성당 내부의 이미지다. 중앙 오른쪽에 창문이 나 있고 빛이 들어온다. 빛은 사선으로 사진 가운데를 가로질러 왼쪽으로 관통한다. 마치 인위적인 조명이 어떤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것 같다. 만일 진심 어린 기도를 마친 한 독실한 신자가 우연히도 작은 창을 통해 비친 빛을 발견한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할렐루야를 외치며 신의 현현을 찬양하지 않을까? 성당 안으로 들어온 빛의 이미지는 창문 위에서 두 손을 들고 있는 성인과 조화를 이루며 신과의 영적인 교감을 느끼게 한다.


이쯤 되면 박현진의 작품에 일맥상통한 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눈으로 보면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하지만 일상에서 우리의 눈을 백 프로 믿는 사람은 없다. 시각적 오류가 얼마나 많은가. 스포츠에서도 심판의 눈보다 카메라의 눈을 더욱 믿는다. 물론 작가의 카메라는 정확성을 위한 것은 아니지만, 습관적인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을 포착하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작가의 카메라는 보이지 않는 것을 포착하려는 시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명상, 영혼, 신의 세계처럼 일상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세계를 포착하려고 한다. 이 점에서 작가가 창작한 이미지는 시적 은유가 된다. 실물을 있는 그대로 포착하는 대신 사물 속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를 탐구하려는 몸짓인 것이다. 우리는 각자의 인식 체계가 있다. 자기만의 인식 틀로 세계를 보기 때문에 자기가 아는 만큼만 본다. 박현진의 작품은 이러한 습관적인 바라봄을 해체하고, 보이지 않던 것을 보도록 권유한다.


또 다른 하나가 있다.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은 작가(인간)지만, 즉 그가 어떤 피사체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은 작가로서 마음이 움직인 것이지만, 한편으론 피사체가 작가를 불러 세웠기 때문이다. 박현진은 자신의 시선과 사물 사이에서 한쪽이 다른 쪽을 향하는 일방향이 아니라 상호 주고받는 균등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가 나를 부르고 내가 그를 부를 수 있는 것은 주체가 사라진 상태에서 누군가(무엇)와 관계를 맺을 때 가능하다. 나는 내가 아니며 세상 그 어느 것 하나 나 아닌 것이 없다. 이번 전시회에서 인간과 사물 그리고 자연의 평등하고 자유로운 관계 미학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다음의 사진은 이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KakaoTalk_20250319_092515127_01.jpg?type=w773 제목 : 시(詩)


잔잔한 바다 저 편에 두 섬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서로 닮은 듯 닮지 않은 섬은 실은 외따로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이들은 바다 밑으로 연결되어 있다. 조용하고 진한 바다와 왠지 소란스러울 것 같은 하늘을 가르는 경계선에 희미하지만 존재감을 드러내는 두 섬이 서로를 부른다. 그리고 두 섬과 작가 사이에도 서로를 향하는 따뜻한 시선이 묻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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