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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 15만 원, 막내 스타일리스트의 삶

서울행이 두려웠던 이유

by 시월의 치라




그러니까 이건 어린 나날의 이야기다. 나는 대학을 갓 졸업했고, 패기는 넘쳤고, 돈은 없었다. 꼭 서울에서 일하고 싶다는 열망은 있었고, 그걸 실천하기 위해 서울로 가 면접을 몇 번 봤다. 그중에서도 가장 내가 원하는 바와 일치하는 잡지사 스타일리스트 실장님 밑에 들어가게 되었다.


아버지는 서울에서의 생활 그 어떤 지원도 해주지 못하겠다 말했고, 어머니는 아버지 몰래 30만 원씩 매달 보내주었다. 그 돈으로 나는 논현동에 있는 낡고 좁은 고시원에서 월 15만 원을 내고 살게 됐다.


꿈만 꿔오던 서울 생활, 화려한 스타일리스트 생활의 시작이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우선 월급이 15만 원이었다. 그 당시에 스타일리스트 막내에게는 아예 임금을 주지 않거나 10만 원만 쳐주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당시의 나는 그중에서도 한 달 중 보름은 일 하고 보름은 쉬는, 잡지사 스타일리스트 밑에서 일하며 15만 원이나 받는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출근은 가로수길 근방에 있는 주택 반지하로 했다. 그곳은 다섯 명 정도의 스타일리스트가 함께 집을 빌려 사용하는 사무실이었다. 말이 사무실이지 일반 주거용 투룸이었다. 주방과 방 가릴 것 없이 행거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고 각자 빌려온 옷들이 수도 없이 빽빽하게 걸려 있었다.


실장님은 조금 엄했지만 그간 매체에서 다뤄왔던, 보여졌던 스타일리스트에 대한 편견에 비해 성격이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점심만큼은 꼬박꼬박 사 먹였고, 지방에서 온 나에게 꽤나 친절하게 필요한 곳들의 지리를 알려주곤 했다.




다만, 옷을 빌려주는 대행사들이 문제였다.


그들은 바빴다. 너무나 바빴다. 일은 많고 적은 임금을 받으니 그들은 매사 날카로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시즌이 되면 밀려들어오는 스타일리스트들에게 옷을 내어주고 또 체크하고 반납을 받아야만 하니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그 예민함 속에서 나는 살아남아야만 했다. 지역 사투리를 쓰고 무던하고 순해빠진 어린 나는 그들에게 쉬운 무시의 대상이었을 거다. 말을 걸어도 모른 체 하는 곳이 대부분이었고, 실장님과 동행을 해야 그나마 눈길이라도 던져줬다.


당시 실장님이 맡은 일은 한 럭셔리 잡지와 웨딩 잡지 등 대부분 고가의 상품이 실리는 화보였다. 그러니 누구나 알법한, 아니 당시의 나는 전혀 몰랐던 명품 브랜드들의 협찬이 필요했다. 그런 곳에 갈 때는 의상을 단정히 하고 가서 굽신거리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실장님은 말했다. 우리는 그 물품들을 모시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2900원짜리 원피스를 입은 주제에 천 배, 만 배가 되는 고가의 제품들을 받아 고작 자전거에 매달고 가는 나에게 그들이 쉽게 제품을 내어줄 리가 없었다. 일이 조금 적응되어 혼자 다닐 때부터는 협찬에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이건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라 생각하며 나는 부지런히도 뛰어다녔다.




잡지 화보를 담당하는 스타일리스트의 일상은 협찬을 받고, 화보를 찍고, 협찬받은 물품들을 반납하는 것의 반복이었다. 얼핏 들으면 단순한 일이지만 협찬을 받기 위해 수많은 대행사를 돌아야 했고, 그 안에서도 치열하게 내 몫의 옷을 예약(홀딩) 해야만 했다. 협찬 스케줄이 엉키거나 중복이 되면 스타일리스트에게서 스타이타일리스트로 직접 퀵을 보내야 하는 일도 있었고, 반납 스케줄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다음번 화보 때는 협찬에 제약을 받는 등의 일도 있었다. 그러니 이 직업은 일하는 센스도 물론이거니와 약속과 신뢰를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까다로웠던, 그러나 제일 트렌디했던 도산 공원에 있는 대행사가 있었다. 그 대행사가 다루는 의상과 액세서리들은 억대까지는 아니었지만, 고가는 고가였다. 그만큼 콧대가 높고 도도했다. 반납이 1분이라도 늦을 시 실장님이 아닌 내게 전화가 들어왔다. 실장님이 옆에 있다면 차를 타고 빠르게 도착해서 옷을 반납하면서 머리라도 덜 조아렸을 텐데, 혼자서 일을 하는 날이면 의상이 든 종이봉투들을 주렁주렁 달고 자전거를 탄 채로 땀을 뻘뻘 흘리며 도착하곤 했다. 동시에 엄청나게 쓴소리를 들었다.




한 번은 백인 남성 두 명과 함께 화보를 진행한 적이 있다. 온스타일에서 자주 봤던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함께하는 화보였기 때문에 나도 제법 설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화보가 하필이면 수영복 화보였던 것이 문제였다.


"수영복으로 갈아입혀"라는 실장님 말에 내가 그들에게 뭘 어떻게 옷을 갈아입혀야 할지 몰라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을 보며 백인 모델들과 헤어 스타일리스트가 영어로 나를 비웃기 시작했다. 나는 스피킹이 모자란 사람이지, 리스닝이 떨어지는 사람은 아니다. 그래서 그들의 비웃음이 섞인 조롱이 귀에 쏙쏙 박혔다. 정말이지 창피해서 나가 죽고 싶었다.




일한 지 석 달쯤 되었을까. 혼자서도 일하는 것이 가능해 보인다며 실장님은 나와 자신을 분리해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돈을 좀 더 벌어야겠다며 무리해서 일을 더 잡아왔다. 당시 M.net 에는 VJ들이 있었는데, 그 VJ 2명과 트로트 가수 한 명 그리고 중년 여성 연기자 한 명의 일을 따내왔다.


그러니까 나는 실장님이 은근히 태업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협찬과 반납 일을 혼자 진행해야 했고, 동시에 연예인들 스케줄을 따라가 현장 스케줄까지 소화해야 했다. 혼자서 일을 하기 시작했으니 '부실장'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월급을 20만 원으로 올려줬다. 하지만 그 돈은 교통비와 퀵비로 다 나갔다. 퀵 비 정도는 실장님이 내어줄 줄 알았는데, 모르쇠 하셔서 결국 내 사비로 나갔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다행히 혼자 일하기 시작한 시기부터는 의상을 제법 잘 고르게 됐고, 화보에 잘 실렸고, 그 결과물이 좋았다. 그러니 대행사 측에서도 자기네 제품 잘 실린 거 봤다며 살갑게 대해주기 시작했다. 명품 브랜드에 가는 건 여전히 어렵고 힘든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신뢰 관계가 쌓이니 건물 경비원 분들에게마저 좋은 인상으로 찍혀 건물 출입까지 자유로워졌다. 비로소 서울에서 일하며 어딘가에 소속이 되었다는 충만함이 차올랐다.




트로트 가수 언니를 따라다니는 일은 제법 즐거웠다. 그녀는 수더분하고 밝았고, 자신에게 '코디네이터'가 생겼다는 사실을 너무나 즐겁고 뿌듯해하는 것 같았다. 지방으로 촬영 가는 날이면 그녀와 나는 몇 시간이고 신이 나서 수다를 떨곤 했다. 같이 촬영하는 가수들에게도 나를 소개하곤 했다. 그렇게 한 두 번 이상 마주치기 시작한 트로트 가수들과 면을 트고 예쁨 받기 시작했다. 사투리를 쓰는 어린 나이의 내가 기특하다며.


언니의 매니저나 소속사 사장님은 실은 전부 언니의 가족이었다. 삼촌이 매니저, 아버지가 사장 뭐 이런 식으로. 그래서 회식을 하면 당연히 그 집안 가족 모임이 되었다. 월세와 차비를 빼고 나면 생활비가 거의 없다시피 했던 나는 그런 자리가 아니면 고기를 먹을 수가 없었다. 남의 가족 회식이라는 것에 전혀 굴하지 않고 잘만 먹었던 것 같다. 행복하게.




하지만 누군가를 팔로우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는 걸 중년 여배우를 통해 배웠다.


그분은 어딘가의 공채 출신 배우로, 이른바 '짬이 찬' 사람이었다. 어떤 드라마에는 조연 중의 조연을 맡았으면서도 어떻게 자신에게 이렇게 좁은 대기실을 내어줄 수 있느냐며, 다른 배우들 2인이 쓰고 있는 방에 찾아가 그 방이 좋다고 방 바꿔 달라 성질을 부린 적도 있다. 황당한 얼굴을 하던 그 유명한 주조연 배우들의 얼굴이 아직도 잊히질 않는다. 지방 촬영지에서 서울까지 돌아가는데 3시간도 더 걸리는 여정 동안, 자신은 넓게 누워 자야겠다며 앞자리인 나는 최대한 앞유리와 밀착해서 앉으라 했다. 그렇게 좁고 불편하게 발도 뻗지 못하고 서울에 실려온 적도 다수 있었다.


그녀는 동시에 돈을 너무 아꼈다. 청담동의 헤어 메이크업 샵이란 샵은 다 돌아다녔다. 첫 테스트는 저렴하게 해 준다는 걸 악용해 스케줄마다 온갖 샵을 다 돌아다녔다. 정착하질 않았다.


한 번은 청담의 잘 나가는 헤어숍 앞에서 사고를 친 적이 있다. 반납으로 바쁜 나날 중, 실장님의 차를 타고 서둘러 도착하느라 문을 쾅 열면서 벌어진 일이다. 실장님의 차는 흰색, 내가 문으로 콕 찍어버린 차는 검은색, 벤츠였다. 한 남자가 튀어나와서 이걸 어떻게 할 거냐고 길길이 날뛰는데 실장님은 진작에 사라지고 없었고 나 혼자 울면서 빌고 또 빌었다. 와중에 선생님(배우)에게 늦었다고 혼 날 것도 너무 걱정이 되었다. 우선 샵에 얼굴만 찍고 나오겠다며 겨우 들어가 선생님께 인사를 드렸다. 엉망이 된 얼굴을 보고 무슨 사고라도 쳤냐고 깔깔대며 웃는 그 얼굴이 본 것 중 가장 행복해 보였다.


다행스럽게도, 그렇게나 나를 닦달하던 사람은 건물 발렛 파킹을 맡는 사람이었고 차주는 따로 있었다. 그는 어딘가의 높으신 분으로 이런 흠 하나 남는다고 큰일 나는 거 아니라며, 우는 나를 달래주었다. 오히려 명함을 주며 무슨 일 있을 때 전화를 하라 했다. 그저 감사해서 90도로 인사를 했었다.


그리고 또 지방 촬영, 지방 촬영, 지방 촬영. 새벽에 서울을 떠나 새벽에 서울에 도착하는 스케줄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상상하던 스타일리스트의 삶과는 닮은 듯한데, 현실로 마주하니 몸과 정신이 너무나 힘들었다. 좁은 고시원 방에 수백수천이나 하는 의상들을 걸어놓고 다림질을 하면서 울다 잠들곤 했다.




이 시기에 실장님이 손이 더 필요하다며 나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 한 명을 어시스턴트로 채용했다. 그는 한 모델의 전속 코디로 박아놓고 가끔 화보 스케줄에 부르곤 했다.


나는 바빠서 미칠 것 같은데, 그 모델네 집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매일 맛있는 거 먹은 걸 자랑하는 그가 미웠다. 처음에는 일을 친절하게 알려줬지만, 그렇게나 단순한 협찬과 반납을 너무 못하고 일정이 밀리는 걸 보며 인내심이 터졌다. 그쪽이 잘못하면 나한테 전화가 와서 욕을 내가 다 먹는데 어떻게 책임 질 거냐, 제발 반납이라도 좀 잘해달라며 애원했다. 그랬더니 그 오빠는 그 길로 실장님에게 나와의 일을 일러바친 거다.


"네가 그렇게 텃세를 부린다며?"라는 말을 들었고, 나는 그 길로 입을 다물었다.


그런 와중에도 일은 해야 하니, 실장님이 건네주는 옷 하나를 들고 여의도로 뛰어갔다. 여의도는 그 중년 배우의 집이 있는 곳인데, 초행길이었기 때문에 나는 길을 제대로 확실하게 헤매고 만다. 나도 모르게 급행열차를 타서 여의도를 지나쳐버렸고, 역에 내려서도 한참을 걸어야 하는데 위치를 못 찾았다. 그 당시에는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이라 지도가 있을 턱이 없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 물어 아파트를 찾았다.


아파트 입구에선 담배를 태우고 있던 매니저가 날 보며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선생님이 화가 많이 났다며. 서울 생활 각박하고 힘든 거 알지만, 그래도 시간은 지켜야 하지 않겠냐며. 각오는 하고 올라가라, 고 했다.


제대로 혼쭐이 날 각오를 하고 선생님의 집 앞으로 가 벨을 눌렀다.


그녀는 손만 겨우 나올 정도로 문을 열고는 폭언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져온 옷을 피팅해 봐야겠다며 문을 쾅 닫고 들어갔다.


나는 그렇게 덩그러니 십 여분을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문이 열렸다. 헤어롤을 말고 있던 그녀는 나의 얼굴로 옷을 집어던졌다.


"사이즈가 안 맞잖아!"


그 옷은 그 배우에게 협찬이 될 리가 없는 상당한 고가 브랜드의 옷이었다. 실장님이 화보 촬영을 핑계로 빌렸다가 배우들에게 몰래 입히려고 빼돌린 옷이었다. 그 고가의 옷이 내 얼굴을 지나 바닥으로 내동댕이 쳐졌다.


실장님과 무슨 이야기를 하면서 이 옷을 배우에게 주게 됐는지, 이렇게 사이즈 문제가 터져야 했는지 당시의 나도 지금의 나도 알 길이 없다. 다만 내가 그 옷 때문에 아주 곤혹스러운 상황까지 겪게 됐다는 거다.


어찌어찌 그 옷을 끼워 입고 촬영을 했는데, 컷이 중단되고 그다음 주 촬영으로 옷이 '연결' 되어야 했다. 그러니까 같은 옷을 입고 있어야 하는 씬인데, 그 옷이 알고 보니 아시아에 단 한 벌뿐인 옷이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브랜드 측에서는 난리가 났다. 한국에서 빌릴 수 있는 기간은 한정되어 있고, 남은 기간을 우리가 독식하고 있으니 당장 반납하라고 독촉해 왔다. 바로 싱가포르로 옷을 보내야 하는데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 그 전화를 받았던 것도 나고 머리를 조아리는 것도 나였다. 실장님은 일을, 자신의 포지션에서 해야 할 대응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옷은 반납하고, 그와 비슷한 디자인의 패턴을 찾아 동대문에서 옷을 급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촬영 현장으로 가 스크립터와 감독님께 고개를 조아리고 눈물을 흘리며 죄송하다 말했다.




선생님과의 기억은 이렇게 나쁜 것만 있었던 것은 또 아니다. 대기 시간에 심심하면 나를 불러 맛있는 걸 먹이고, 대본 연습을 같이 하곤 했다. 그녀는 나에게 발성이 좋으니 연기를 해도 될 아이라며 배우에 도전해 보는 건 어떻겠느냐 말했다. 그 말이 그렇게나 뿌듯하고 기뻐 아직까지 그 말을 기억하고 있다.




이 시기와 동시에 또 한 사건이 터진다. 실장님이 화보 한 건은 나에게 맡겨버리고 자신은 해외 화보 촬영을 하러 떠나버린 거다.


아예 독립된 화보를 혼자 진행하게 된 경우는 처음이라 임무가 막중했고 부담스러웠다. 그래도 그간 쌓아온 신뢰 덕분에 협찬이 순조로웠고, 새로 뚫은 협찬사도 만들어 화보 촬영에 차질이 없게 만들었다. 무사히 화보 촬영이 끝났고, 귀국한 실장님이 반납은 도와줬다.


그런데 실장님이 차를 꺼내어 후진을 하다가 의상 봉투를 와장창 다 밟아 버렸다. 의상만 있었으면 티라도 안 났을 텐데, 하필이면 그 안에 60만 원짜리의 아주 키치 한 진주 목걸이가 들어있었다. 새로 뚫어서 협찬받아온 그 진주 목걸이였다.


나는 절망했다. 월급이 20만 원, 엄마가 주는 돈이 30만 원. 나는 이 돈을 감당할 수 없다.


실장님에게 더 이상은 안 되겠다 고하며 일을 그만두게 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서울행이 두려웠던 이유.


서울에서 당한 여러 수모들 탓에 서울행이 너무나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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