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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우울이 내 탓인가요

우울의 근원을 찾아서

by 시월의 치라



‘우울증인 것 같다’고 처음 인식한 것은 2013년 겨울, 짙고 푸른 한려수도를 바라보면서였다.


그 시기의 나는 지역 언론사 직원으로,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인터넷 신문 기자이자 편집자로 발령받아 일하고 있을 때였다. 일주일에 한 번씩 도내 관광지를 찾아서 직접 여행해 보는 콘텐츠를 작성하는 게 나의 주요 업무였다.


2013년의 12월 어느 날, 나는 통영의 달아공원을 찾아 차갑고 매서운 바람 속에서 웅장하게 빛나는 푸른 바다, 한려해상 국립공원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넋을 놓고 있다가도 문득 눈물이 차오르는 내 감정을 어떻게 수습해나가야 할지 몰랐다. 그렇게 한 시간을 찬 바람을 맞으며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내가 지금 우울한 상태이고, 우울증일 수도 있겠다’고 인식했다.


무엇이 그 시절의 나를 우울하게 했을까.


생각해 보면 나는 타고나길 소심하고 우울한 아이였던 것 같다.


인생의 첫 기억이 할머니에게서 뺨을 맞는 장면인데, 그때부터 남다르게 사람들의 행동에 예민하게 반응하거나 기색을 살피곤 했던 것 같다. 부모님이 싸우면 세상이 두 쪽이 날 것처럼 비통해했고, 친구들의 눈빛 하나에 나를 싫어하는 건 아닌지 눈치를 살폈다. 그렇게 예민한 기질인 것에 비해 밝은 성정에 주관은 강해 어떤 집단에 가든 눈에 띄게 리더 역을 하곤 했다. 그러니 절로 가면을 쓰는 일에 익숙했던 것 같다. 밝고 행복한 얼굴 뒤로는 늘 누군가는 나에게 질리지 않았을까, 손가락질하지 않았을까 하는 불안감에 떨곤 했다.


이런 나의 성향을 확 찔러버린, 내 안의 부끄러운 면모가 드러난 것이 2013년 3월 지자체 인터넷 신문으로 발령받으면서부터였다.


그 당시 나는 언론사에서 광고와 신문 지면에 실리는 사진 보정 같은 일들을 맡아했었는데, 편집부와 우리 부서 간의 갈등이 되는 원인을 알고 있었다. 나를 제외한 같은 부서의 선배들이 태업을 했고, 편집부의 요청이나 지적을 받아도 고치지 않는 등의 상황이 벌어지는 상황이었다. 가장 바쁠 시간에 밥을 먹으러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거나, 출근해야 할 시간에 출근해있지 않는다거나 들어오는 업무를 일부러 하지 않으려 하는 등 문제점들이 많았다. 그런 선배들의 행동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 행동에 동조하지 않으면서 선배들과 삐그덕거리기 시작했고, 내가 발령받는 것으로 서로 간의 신뢰에 균열이 파국으로 치달았다. 그 시기의 나 역시 어린 나이로, ‘당신들이 그렇게 행동하면 나 역시 똑같이 갚아주겠어!’란 마인드였고, 발령 사실을 떠나는 날까지 굳이 말하지 않았다. 끝의 끝이 되고 나서야 선배 한 명이 날 붙들고 말했다.


“먼저 발령 나간다는 이야기를 했으면 좋았을 텐데. 끝내 말하지 않으니 섭섭하네.”


그 말에 발끈했던 나는 “그럼 알면서도 아무 말 안 하고 있다가 지금 와서 섭섭하다는 것도 섭섭하네요”라 대답했다.


그 말 탓이었는지, 내가 발령 후에 잘난 체를 한다는 소문이 그녀들 사이에서 돌기 시작한 걸 알고 있었다. 계속해서 편집부와의 갈등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퇴근 후였는데도 업무 하나를 알려줬던 적이 있는데, 그때도 선배들은 나를 향해 건방지게 잘난 척을 한다며 말을 더했다는 것도 소문을 들어 알게 됐다.


그 소문을 전하는 사람에게조차 질리고 질려 나는 본사에 가는 것을 꺼렸는데, 청사에서의 4년간 근무를 끝으로 본사로 돌아오게 됐을 때 대표이사로부터 충격적인 말을 듣게 된다.


그것이 2017년.


나는 청사에서 일하는 4년간 도내 20여 개에 가까운 시군을 무려 3바퀴 반이나 걸어 다니며 기사를 작성하고 눈물 콧물 쏙 빼며 일했다. 사람도 없고 차도 없는 시골길을 걷고 또 걸으며 나라는 존재에 대한 의문을 품고, 불안을 부풀리고, 우울의 땅을 개척하며 일을 했다.


하지만 대표 이사님은 누구로부터 파생됐을지 분명한 소문을 듣고는 나에게 폭력과 다를 바 없는 거친 언사를 내뱉었다.


아무도 너랑 일하고 싶지 않아 하니 어디로 발령 내야 할지 모르겠다, 네가 그렇게나 잘난 척을 한다며, 선배들을 가르치려 들었다며, 건방지다, 태도에 문제가 있다는 등등의 내용이었다. 변명도 반론도 들으려 하지 않는 대표 이사 앞에서 나는 그저 눈물을 쏟아낼 수밖에 없었다. 필요할 땐 억지로 등 떠밀더니 필요 없어지니 당장 일 그만두고 썩 꺼지라는 느낌을 받았다. 절벽 위에서 밀쳐지는 느낌이었다.


이런 취급을 받았을 때 일을 그만뒀어야 했는데. 나는 어리석게도 복수를 결심했다. 어떻게든 내가 회사에 필요한 사람이 되겠다고. 그 후에 가차 없이 버리겠다고.


그래서 약 1년간 그렇게나 무리를 했다. 예스맨이 되었다. 불평 한 마디 내뱉어보질 못했다.


꾹 참고 참다 결국 그해 시월 내 생일. ‘공황 장애와 우울증’ 진단을 받고 말았다.


나에게 나타난 공황 증상은 자리에 앉아있지도 못할 정도로 불안했고, 숨이 막혔고, 손 발이 떨리고, 이대로 쓰러져 죽을 것 같다는 압박감, 불면, 우울, 눈물, 폭식, 발열 등이 있었다.


증상이 심화된다 싶었을 때, 처음엔 무거운 카메라나 삼각대 같은 것을 짊어지고 살아서 어깨가 아픈 줄로만 알았다. 정형외과에 가서 목과 어깨에 주사를 맞는데, 얼마나 힘들게 살았으면 젊은 아가씨가 여기가 다 아파서 왔을까- 하며 다정히 건네는 말에 엉엉 울었다.


이런 상황이 벌어졌던 사이, 그러니까 2014년에는 아버지의 희귀 혈액암 확진 소식까지 들었다. 이외에도 나에게 벌어진 두 건의 교통사고, 집안의 여러 가지 우환들이 나를 썩어가게 만들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혼자가 된 집 현관에 드러누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몇 시간을 보내며 깜빡이는 현관 불빛만 본 적이 여러 차례. 아버지는 결국 그해 겨울 떠나셨고, 나의 우울은 차곡차곡 쌓이고 쌓여 나를 짓눌렀다.


그렇게 한 해 한 해 차곡차곡 쌓아온 우울을, 결국 온몸에서 거부하게 된 회사를 그만두고 2년을 쉬었다. 그 사이에도 일을 찾아서 해보려 노력했으나, 쉽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렇게 해외여행을 많이 하고 사치를 즐겼다. 있는 돈을 다 쓰고도 부족해 빚을 지면서도 여행을 했다. 그렇게라도 해야 내가 살 것 같아서.


하지만 살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어디선가 사라지고 싶었다.


어떻게든. 어떤 방식으로든.


하지만 멀쩡히 두 발 디디고 사는 사람의 생사가 그렇게 쉽게 결정되지는 않더라. 나는 나를 죽이지도 못하는 끈을 상하이의 어딘가에 있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한국으로 귀국했다. 이런 내 사연을 알고 있던 친한 언니가 자신의 회사에서 일해보는 것이 어떻겠냐며 서울로 불러들였다.


그것이 이 모든 사건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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