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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나무는 자기를 찍은 도끼에도 향을 묻힌다

by 정영기

향나무는 자기를 찍은 도끼에도 향을 묻힌다

“향나무는 자기를 찍은 도끼에도 향을 묻힌다”는 말은 과장된 덕목을 요구하는 격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일상에서 마음이 휘청거리는 순간에 쓰기 좋은 비교적 소박한 힌트에 가깝다. 특히 요즘처럼 말이 빠르게 오가는 SNS나 메시지 환경에서는 누군가의 날카로운 언어나 반응이 곧바로 나의 감정에 영향을 준다. 톤이 조금만 달라도 상대 의도를 과하게 해석하게 되고, 작은 오해가 순식간에 큰 감정으로 번진다. 이런 상황에서 향나무의 비유는 “상대의 톤에 자동 반응하지 않아도 된다”는 정도의 가벼운 조정을 떠올리게 해 준다.

SNS에서 흔히 있는 일이 있다. 어떤 게시물에 올린 내 의견을 누군가 짧고 단정적인 문장으로 비판하는 경우다. 이때 나도 바로 날카로운 문장을 쓰고 싶은 마음이 튀어 오르기 쉽다. 하지만 욕설이나 비아냥은 아니더라도, 단 한 문장만 더 부드럽게 쓰면 상황이 많이 달라진다.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대신 “이 부분은 저는 조금 다르게 보았습니다” 정도로 말투를 조정하면, 상대의 공격적인 문장이 나를 그대로 ‘도끼 모양’으로 만들지 않고, 내 쪽 말투를 일정하게 유지하도록 도와준다.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유리한 톤을 골라 쓰는 쪽에 가깝다. 이게 향나무의 향과 비슷한 지점이다. 상처를 안 받는 것은 아니지만, 상처 난 자리에서 내가 내 방식의 언어를 유지하면 거기서 향이 남는다.

메신저 대화에서도 이런 순간은 자주 생긴다. 예를 들면, 늦은 밤에 보낸 내 메시지가 읽히지 않고 넘어가자 조급해진 마음에 “왜 답장이 없냐”라고 바로 되묻고 싶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반응이 상황을 나아지게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도끼가 내려친 자리에 또 다른 도끼가 찍히는 셈이다. 대신 “바쁠 것 같아서, 시간 괜찮을 때 이야기하자”라고 톤을 바꿔보면 상대의 침묵이 나를 즉각적으로 흔들어 놓지 못한다. 이 역시 상대를 이해하려는 과한 선의라기보다, 내 감정이 바로 튀어나가 불필요한 파장을 만들지 않도록 나 자신을 보호하는 방식에 가깝다.

대면 관계에서는 상황이 더 섬세하다. 억양, 표정, 말투가 모두 실시간으로 오가기 때문에 감정이 오해로 바뀌는 속도가 더 빠르다. 누군가 회의 자리에서 내 의견을 끊어버리면 기분이 상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상한 감정이 그대로 말투로 튀어나오면 그 순간부터는 의견 충돌이 아니라 감정싸움이 된다. 그때 숨을 한 번 고르고 “제가 마저 설명해도 될까요?”라고 차분히 톤을 낮추면, 나도 내 페이스를 찾고, 상대도 무의식적으로 속도를 낮춘다. 이건 도덕적 우월감도 아니고 고상한 관용도 아니다. 그냥 다음 대화의 흐름이 덜 복잡해지도록 나를 위해 선택하는 작은 조정일뿐이다.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 관계에서는 말투가 훨씬 직설적으로 오가기 때문에 작은 말 한마디에도 상처가 남기 쉽다. 예를 들어, 피곤한 상태에서 던진 무심한 말이 내 마음을 건드릴 때가 있다. 바로 “너는 늘 그렇게 말해” 같은 단정적인 반응을 해 버리면 관계는 더 무거워진다. 대신 “방금 말은 나한테 좀 신경 쓰였어”처럼 감정만 가볍게 전달하면, 상대의 말투가 내 감정 전체를 좌우하지 못하게 된다. 이 역시 향을 묻히는 방식에 가깝다. 상대를 감싸거나 이해하려 한다기보다, 내 감정이 폭발해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들지 않도록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이런 예들을 보면, 향나무의 비유는 결국 ‘부드러운 사람’이 되라는 말이 아니다. SNS든 대면 관계든, 상대의 거친 톤이 내 말과 행동까지 자동으로 거칠게 만들지 않도록 작은 틈을 확보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누군가의 반응이 내 리듬을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내가 편안한 말투와 속도로 대응하는 것. 그 정도의 실질적이고 가벼운 전환이면 충분하다. 그렇게 반응할 때 남는 흔적이 자연스럽게 향처럼 느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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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이 비유는 ‘참을성’이나 ‘선행’보다 훨씬 일상적인 마음의 사용법에 가깝게 읽힌다. 불교에서는 감정이 일어나는 순간을 붙잡아 반응하기보다, 그 감정이 움직이는 흐름을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보는 연습을 중요하게 여긴다. 누군가의 말이 나를 찍는 도끼처럼 느껴질 때, 그 감정에 곧바로 얹혀 나도 날카로워지는 대신 “지금 내 안에서 뭐가 일어나는지”를 잠깐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면 공격적인 말이 나를 자극하더라도, 그 자극이 곧바로 행동으로 번지지는 않는다. 불교가 말하는 자비도 상대를 무조건 포용하라는 말이 아니라, 내 마음이 상대의 감정에 자동으로 반응해 흔들리지 않도록 나를 단단히 지키는 태도에 가깝다. 향나무가 도끼에 향을 묻힌다는 이미지는 바로 그 자리에서 나온다. 상처는 생기지만, 그 상처가 나를 대신 결정하지는 않게 하는 태도. 불교적 언어로 보면, 이것은 ‘화를 억누르는 선함’이 아니라 ‘흐름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작은 깨어 있음’ 정도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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