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체르노빌의 폐허 안쪽, 사람이라면 몇 분도 버티기 힘든 방사능 구역의 벽을 까만곰팡이가 뒤덮고 있습니다. BBC Future가 11월 28일 소개한 이 곰팡이는 단순히 “버티는” 수준이 아니라, 방사선을 에너지처럼 활용하며 자라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한때 인류의 악몽이었던 체르노빌이, 이제는 우주를 향한 인류의 다음 도약을 준비하는 실험실이 되고 있는 셈입니다. “방사능을 먹는 곰팡이”라는 표현이 더 이상 SF 소설의 설정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꽤 낯설게 다가옵니다.
물리적으로 곰팡이가 방사능을 ‘씹어 삼키는’ 것은 아닙니다. 핵심은 곰팡이 세포를 까맣게 물들이는 색소, 멜라닌입니다. 체르노빌에서 발견된 클라도 스포리움 스페로스페르뭄 같은 방사선 친화성 곰팡이는 멜라닌을 이용해 감마선과 같은 고에너지 방사선을 흡수하고, 그 에너지를 화학 에너지로 전환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를 ‘라디오합성(radiosynthesis)’이라고 부르는데, 햇빛을 이용하는 광합성과 비슷한 개념입니다. 실제로 방사선 환경에 둔 멜라닌 보유 곰팡이가 그렇지 않은 곰팡이보다 더 빨리 자라고, 대사 활동도 활발해졌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이 특이한 능력은 체르노빌이라는 비극의 현장에서 먼저 주목을 받았습니다. 원자로 내부의 고방사선 환경에서도 살아남은 이 검은곰팡이들은, 오히려 방사선이 더 센 쪽으로 자라는 ‘라디오트로 피즘’까지 보입니다. 어떤 개체들은 방사선이 가장 강한 방향으로 뻗어나가며,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빛을 향해 손을 뻗는 식물처럼 행동합니다. “죽음의 구역”으로 불리던 공간이 곰팡이에게는 일종의 풍부한 에너지 농장처럼 기능하고 있는 셈입니다.
여기서 과학자들의 상상이 우주로 뻗어 나갑니다. 지구의 자기장과 두꺼운 대기 덕분에 우리는 어느 정도 우주 방사선으로부터 보호받지만, 달과 화성으로 가는 긴 여행에서는 얘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우주선 벽과 우주 정거장, 화성 기지의 돔을 어떻게 방사선에서 지킬 것인가가 인류의 장기 탐사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 중 하나입니다. 실제로 체르노빌 곰팡이 일부는 국제우주정거장(ISS)으로 보내져 방사선 차폐 성능이 시험되었고, 얇은 곰팡이 층만으로도 우주 방사선량을 줄일 수 있다는 고무적인 데이터가 보고된 바 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조금 더 미래 시나리오를 그려 봅시다. 2045년, 화성 궤도에 진입한 첫 장기 연구 기지. 우주비행사들이 타고 온 모듈 벽 안쪽에는 검은색의 얇은 생체 코팅이 덧칠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페인트가 아니라, 유전자 조작과 소재 공학을 거쳐 만들어진 “곰팡이 기반 방사선 차폐 재료”입니다. 낮에는 우주 방사선을 흡수해 에너지를 저장하고, 밤에는 미세한 열로 내보내며 구조물의 온도 편차를 줄입니다. 균사가 벽 내부를 천천히 메우며 미세 균열을 스스로 메우기 때문에, 미세 운석에 맞아 생긴 상처도 시간이 지나면 ‘아물어’ 버립니다. 한때 원자로 벽을 뒤덮던 체르노빌의 악몽이, 이제는 화성 기지의 보호막이 된 셈입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아직 연구와 실험, 그리고 상상력이 섞인 단계입니다. 곰팡이를 그대로 우주선에 들여보내기보다는, 멜라닌 구조만 떼어내 인공 고분자와 섞어 쓰거나, 곰팡이의 유전적·대사적 특성을 모사한 합성 재료가 먼저 등장할 가능성이 큽니다. 통제되지 않은 생물의 증식은 또 다른 위험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살아 있는 방패”를 얼마나 정교하게 제어할 수 있을지가 핵심 과제가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두려웠던 방사선 환경에서 살아남은 이 검은곰팡이가, 언젠가 우주 비행사를 감싸는 최후의 방어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자체가 과학과 SF의 경계선을 흐리게 만듭니다.
체르노빌은 늘 인류가 저지른 실수와 재앙의 상징으로 이야기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그 잔해 속에서 조용히 자라난 “방사능 먹는 곰팡이”는, 같은 장소가 동시에 회복과 적응, 그리고 미래 기술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줍니다. 어제까지는 끔찍한 사고의 잔해로만 보였던 것들이, 내일의 우주 탐사를 떠받치는 숨은 동료가 될 수 있는 시대. 이 곰팡이를 둘러싼 이야기야말로, 현실이 천천히 SF를 따라잡아 가는 과정의 한 장면인지도 모릅니다.
"어제의 재앙도 끝까지 들여다보면, 내일 우주를 지켜 줄 방패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