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프 톨스토이의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짧은 이야기 속에 인생의 진실을 압축해 담아낸 작품만큼
강렬한 울림을 주는 것은 드물다.
레프 톨스토이의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는 단 몇 장의 이야기로 인간의 욕망이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떻게 끝을 맺는지를 보여준다.
이야기는 농부 바흠의 단순한 욕심에서 시작되지만,
그의 죽음으로 끝날 때 우리는 오히려 인간 존재의 본질을
마주하게 된다.
욕망은 언제나 ‘조금 더’에서 출발한다.
지금의 땅도 충분하지만, 만약 조금 더 넓은 땅이 있다면,
조금 더 큰 집이 있다면, 조금 더 많은 돈이 있다면,
더 행복할 것이라는 믿음이 우리를 유혹한다.
그러나 욕망의 본성은 충족이 아니라 끝없는 확장에 있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쾌락의 쳇바퀴(hedonic treadmill)’
라고 부른다. 만족은 오래가지 않고, 더 큰 것을 요구하는
반복의 굴레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욕망을 무조건 억제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한 욕망은 끊임없이 솟아난다.
중요한 것은 욕망을 어떻게 다스리고 어떤 방향으로
전환하느냐이다.
철학자 스피노자는 욕망을 인간 존재의 본질,
곧 *코나투스(conatus)*라 불렀다.
모든 생명체가 스스로를 보존하고 확장하려는 힘이
바로 욕망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욕망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맹목적 탐욕으로 흐르느냐, 혹은 자기 성장과 타인과의 조화를 위한 힘으로
승화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바흠의 비극은 욕망이 잘못된 방향으로 발현될 때
어떤 결과를 낳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는 땅을 더 얻기 위해 하루를 불태웠지만, 종국에는 삶을 잃었다. 그러나 만약 그가 같은 에너지를 이웃과 나누고,
더 나은 농사법을 개발하며, 땅을 가꾸는 일에 썼더라면,
그의 욕망은 파괴가 아니라 창조의 힘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욕망을 긍정적으로 전환할 수 있을까.
우선, 욕망의 크기를 ‘비교’가 아니라 ‘성장’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갖는 것이 아니라,
어제의 나보다 더 충실히 살아가는 것에 욕망을 두는 것이다. 또한, 욕망을 개인의 충족에만 묶어두지 않고 공동체적
가치와 연결시켜야 한다.
나의 성취가 타인과 세상에 어떤 기여로 이어질지를
생각할 때 욕망은 이기심을 넘어선 창조적 동력이 된다.
바흠이 마지막으로 얻은 땅은 단 두 미터였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묻고 있다.
“당신은 욕망을 어디로 이끌고 있는가?”
욕망을 피할 수 없다면, 그것을 나를 불태우는 불씨로
남겨둘 것인가, 아니면 세상을 밝히는 빛으로 전환할 것인가. 이에 우리의 선택이 욕망에 대한 오해가 아닌 방향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