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cordia Fratrum (형제간의 화음/ 조화)
루이제 린저의 『삶의 한가운데』는 이렇게 시작한다.
“여자 형제들은 서로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든지 혹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든지 둘 중 하나다.”
문장을 떠올리는 순간, 마음속 깊은 서랍에 넣어 두었던
작은 의문이 조용히 깨어나는 듯하다.
두 명의 여동생과 한 명의 남동생이 있는 나는,
어쩌면 나를 가장 모르는 사람들이 나의 형제들이
아닐까 하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히곤 한다.
우리는 분명 오래 함께 살았다.
1991년, 내가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달력으로
계산하면 20여 년이라는 시간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중 상당수는 ‘각자가 될 준비’조차 하지 못했던 시절이다. 나이 차이도 제법 있었고, 우리가 스스로를 하나의 주체로
자각하기 전의 해묵은 시간들—
만약 유아기와 혼란스러운 성장기를 제외하고 나면,
결국 제대로 얼굴을 마주하며 한 지붕 아래 살아낸 시간은
겨우 10년 남짓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서로의 가장 가까운 목격자였지만,
동시에 서로의 내면을 거의 모르는 채 어른이 되어 버렸다. 각자의 집에서, 각자의 언어로, 각자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어느새 멀리 떨어진 섬처럼 살아가고 있다.
나는 미국에 있고, 그들은 또 다른 일상 속에서 저마다의
질감으로 하루를 살아내고 있다.
그래서일까.
가끔은 과거의 장면들이 몽당연필처럼 짧아진 기억으로
다가와 아득해진다.
어릴 때 함께 밥을 먹고 싸우고 화해했던 그 시간들이
사실은 서로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흘러간,
오래된 흑백필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심리학에서는 우리가 실제로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의
대부분이 ‘추정’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상대의 표정, 말투, 기억을 지나치게 단순화해
이해하고, 그 단순화된 이미지를 곧 “그 사람 자체”라고
착각한다. 형제 사이도 다르지 않다. 오히려 더하다.
오래 알고 지냈다는 편안함이 “더 깊이 알고 싶다”는
노력을 무디게 만든다.
철학적인 관점으로 보면,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에게조차
솔직하지 못한 존재이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말한 이유도 어쩌면
완전한 이해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라는,
철저히 인간적인 권유였는지도 모른다.
하이데거 역시 인간을 ‘미지의 가능성으로 열려 있는 존재’라고 설명했는데, 그 말은 곧 우리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세월따라 천천히 달라지며 고정되어 있지않기 때문일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서로의 형제이기 이전에,
서로에게 끝없이 낯선 타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낯섦이 반드시 슬픈 것만은 아니다.
서로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많기에, 때로는 작은 관심 하나가 의외의 다정함이 되어 마음을 건드리기도 한다.
가까웠지만 멀고, 알았지만 모르는 관계.
그 모순이 바로 형제라는 이름에 깃든 역설이다.
이해의 결핍이 곧 깊은 애정의 증거가 되는, 묘한 인연.
어쩌면 우리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솔직한 마음은
“나는 너를 완전히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너를 이해하고 싶다.”
가 아닐까?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에서 “우리는 서로의
마음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단언했지만,
나는 그의 문장 끝에 이렇게 덧붙이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에게 다가가려 애쓰는
존재이다.
그 애씀 속에서 관계는 비로소 온기를 얻는다.
오늘도 먼 미국의 하늘 아래에서 나는 형제들의 안부를
떠올린다.
우리가 더 이상 함께 살지 않더라도,
서로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럼에도
여전히 서로를 향한 조용한 진심이 남아 있음을 느낀다.
우리는 서로를 모른다.
그러나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여전히 알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 마음이야말로 가족이라는 이름이 가진 가장 아름다운
힘이라고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