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남, 데미안, 헤르만헤세, 봄
봄의 절기는 입춘, 우수, 경칩을 지나 춘분, 청명, 곡우의 시간을 가진다. 글을 쓰는 지금은 만물이 겨울로부터 깨어나는 시기인 경칩을 지나고 있다. 지난 글(아래 링크)에 이어 절기를 계속 이야기하는 것은 이번 한 해의 의미를 알고자 하는 나의 노력이다. 태양이라는 큰 생명에너지의 흐름과 더불어, 내 에너지의 상태를 지속적으로 체크하고자 하는 부단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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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며 귀기울이지 않았던 봄이 말하는 시작의 이야기들, 어떻게 알고 씨앗, 나무, 개구리는 스스로 깨어나는 능력을 가진 것일까. 알람이나 달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적당한 날을 어떻게 찾는 것인가. 신기한 자연이다. 본래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서 우리 스스로도 이 변화와 흐름을 알고 겪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치이지 않을까. 우리가 Spring, 봄의 깨어남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혹 온전히 온 힘으로 자신에게 에너지를 비축하는 겨울의 시간이 충분치 못해서는 아닐까?
어느 모임에서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책을 서로에게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내게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었다. '데미안'을 읽으면 마치 예술 중에 최고의 예술인 음악을 들을 때처럼 나와 책 사이 경계가 없어지고 가장 날 것의 나였던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세계라는 알을 파괴하고 태어나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어려운 일일 것이다. 번데기가 누에고치를 뚫고 나오듯, 씨앗 속의 생명이 껍질과 땅을 뚫고 봄 새싹을 피우듯, 이것은 나비가 되기 위해 또는 꽃을 피우기 위해 거쳐야 하는 관문이다.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깨고 나와도 알은 또 계속 다른 형태로 존재한다. 온전히 자유로운 새로 태어나려는 여정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왜 알에서 나오려 투쟁해야 하는가? 본연의 새는 알에서 살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깨야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면 나를 알아야 하고 그렇게 하나씩 깨어나고 태어나며 자유와 자아에 가까워진다.
주인공 싱클레어는 헤세처럼 탐구자다. 밖이나 남으로부터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이고 결국 나 자신을 조금 떨어져서 바라볼줄 아는 구도자의 모습이 되며 책은 끝을 맺는다. 헤세는 데미안을 통해 궁극적으로 인간에 대한 사랑과 인간의 본연의 삶을 이야기한다. 소중하고 고유한 인간의 삶은 오로지 자신만이 알 수 있고 본인만이 할 수 있는, 나를 찾아가는 길이라는 것을 주인공의 이야기로 전달하는 듯 하다.
유사한 두 개를 찾아서 비교분석하고 연결지어 말하려는 것이 내 글의 의도가 아니다. 해의 생명에너지는 프라나(Prana)와 같고, 싱클레어는 데미안이자 우리이고, 나무도 그렇다.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니, 나에게 너는 나인 것이다.
결국 같은 것들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요즘이다. 구분 짓고 경계를 나누는 것의 무용함은 데미안의 첫 Chapter인 '두 세계'에서부터 얘기가 시작한다. 음과 양, 선과 악, 탄생과 죽음, 밝음과 어둠과 같이 양면성을 가진 상징인 아브락사스를 통해 그것은 모두 하나의 통합으로 가는 것이고, 경칩에서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춘분을 향해가는 에너지의 흐름도 결국 같은 것이다.
내가 원 그리기 작업에 흥미를 갖는 것도 바로 그 '하나'를 추상화해가는 과정이기 때문인듯 하다.